▲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한 보복 원정으로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했다.
고종 3년(1866년)에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사건인 병인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침입한 사건이다.
1866년초에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리고 프랑스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 수천명을 학살하였다.
이를 병인박해 또는 병인사옥이라 한다. 프랑스 선교사는 12명 중 9명이 잡혀 처형되었으며, 3명은 화를 면하였다.
그 중 리델(Ridel) 신부는 중국으로 탈출하여 주중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박해소식을 전하면서
보복원정을 촉구했다. 이에 로즈가 대함대를 이끌고 침입하였다.
1866년 9월 26일(음력) 아침,
짙은 안개로 뒤덮혀있는 제물포(인천)앞바다 물치도에 로즈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군함 세척이 나타났다.
로즈제목은 이곳에서 작은 군함으로 갈아타고 강화도 연안을 거쳐 한강을 따라 한양으로 향했다.
이 프랑스 함대가 1차로 한강을 뚫고 마포 한강까지 진입한다.
제1차 정탐 때의 상황은 신봉승석좌교수(추계예술대학)의 강의동영상을 통해 살폈다.
순탄한 항해 끝에 같은 달 말일게 양화진을 살짝 비껴 한 척은 서강대교에,
다른 한 척은 마포대교 부근 한강에 이르러 배를 멈추고 아예 1박을 하며 남의 나라 수도 한양을 정찰한다.
한 군함에는 프랑스 해병대 800명씩 타고 있었다. 1600명의 프랑스 해병대가 서울을 노린 것이다.
"서울에 상륙해서 서울을 정령하라!"
프랑스 황제의 특명을 받고 마포 한강까지 밀고 온 프랑스 군함이다.
함장은 망원경으로 한양 도성을 정탐하였다. 나무가 많지 않은 남산이었다.
남산의 도성 성벽이 멀리서 그대로 잘 보였다.
남산을 감싸고 도는 성벽에는 총구가 곳곳에 빼곡하게 뚤려있었다.
"만일 우리가 상륙하면 저 총구에서 일제히 불을 품어 영락없이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사실은 성벽에 총은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빈 총구만 뚤려 있었다. 멀리서는 대포가 있는지 없는지 구분되지 않았다.
이 괴선박을 보러 한양 백성들이 강안에 몰려 들었다.
대개 많은 사람들이 몰리면 옷의 색갈이 다양하기 마련이다.
이때 조선인들은 모두 하얀 옷을 입고 한양으로 밀려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다.
"This is a Korean soldier's uniform."
신봉승교수가 말하는 당시의 상황은 여기까지이다.
로즈의 제1차 원정은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서울까지의 수로를 탐사하기 위한 예비적 탐사 원정이었다.
로즈는 군함 3척을 이끌고 9월 18일부터 10월 1일까지 서울 양화진·서강까지 올라와서
세밀한 지세 정찰과 수로 탐사 끝에 지도 3장을 만들어 이렇게 돌아갔다.
로즈는 10월 5일에 한강 봉쇄를 선언하고, 10월 11일에 제2차 조선원정길에 올랐다.
군함 7척, 함재 대포 10문, 총병력 1,000명, 향도 수로안내인으로 리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최인서·심순녀 등 3명을 대동하였다.
10월 13일, 일곱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강화도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로즈제독은 14일 아침 유격대를 갑곶(甲串)에 상륙시켜 16일 결국 강화부를 점령하고 만다.
"우리는 자비로운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우리 동포 형제를 학살한 자를 처벌하러 조선에 왔다."
프랑스는 10월 16일에 강화부를 점령하고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조선이 선교사 9명을 학살하였으니, 조선인 9,000명을 죽이겠다."는 강경한 응징보복을 밝혔다.
이것이 병인양요다. 흥선대원군의 진노는 하늘을 찔렀다.
결국 올 것이 왔다고 판단한 대원군은 10월 22일 전국에 영을 내렸다.
“서양 오랑캐(洋夷)를 물리치고 나라를 지키라.
화친을 허락함은 매국(賣國)이요, 통상을 함은 패국(敗國)이며,
적이 한양으로 밀어닥침에 이를 피해감은 나라를 위태롭게…”라며 쇄국정책의 고삐를 죄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또 프랑스 군함이 거쳐간 양화진을 새로운 형장으로 지정해서
처음으로 천작쟁이(천주교도)이의송(李義松) 김어분(金於忿) 부부와 아들 붕익(鵬翼)을 참수했다.
양이가 더럽힌 한강을 서양에서 흘러 들어온 ‘천작쟁이’의 피로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로부터 이곳에는 대원군이 물러난 다음에도 1872년까지 2,000여 명에 이르는 천주교 신자들의 목이 잘렸다.
그때까지 덜머리 잠두봉, 용두봉이라 불리던 이 산봉우리는 ‘절두산(切頭山)’으로 부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