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궁(衍禧宮)이 자리하였던 장소임을 알리는 표석이다.
연세대학교 백양로 오른쪽 길가 언덕에 설치한 표석 "연희궁터.서잠실터'이다.
문종 이후에는 延禧宮으로 표기가 달라진다.
연희궁은 세종 2년(1420년)에 서별궁(西別宮)으로 낙성되었다.
세종 29권, 7년(1425) 8월 30일 2번째기사에서는
"서이궁(西離宮)의 이름을 연희궁(衍禧宮)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연희궁(衍禧宮)으로 환어(還御)하였다. 효령 대군 이보(李補)에게 안장 갖춘 말을 내려 주고,
또 희우정(喜雨亭) 곁에 사는 백성 15호에 쌀을 각각 1석씩 내려 주었다
세종 108권 27년(1445) 4월 12일 1번째기사를 살폈다.
1426년(세종 8년)에는 아예 이곳으로 옮겨오기도(移御) 했으니 세자와 백관들이 어가를 따랐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세종은 이곳에 국립잠업연구소에 해당하는 잠실도감(蠶室都監)을 설치해 조선 잠업의 중심지가 되게 했다.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누에와 뽕나무는 옛사람들의 소중히 여기는 바인데, 연희궁(衍禧宮)에서 기르는 잠종(蠶種)이
아직 적어서 경복궁·창덕궁의 두 궁내에 심은 뽕잎이 자라서 무성하기만 하고 따서 쓸 데가 없으니,
내년부터 잠종을 더 준비하여 두 곳에 나누어 기르게 하라.”하였다.<세종실록 52권 1431년 4월 13일 기사에서>
동잠실이 낙천정(樂天亭: 자양동 강변북로 쪽)과 아차산에 자리잡고, 아마도 신잠실이 잠원동에 자리 잡았다.
또한 이 지역에는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의 남편 안맹담의 채마밭(菜園)도 있었다.
대야평(大野坪, 땟굴)이라 불리던 지역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궁궐지(宮闕志)에는 정종이 아우 방원에게 양위한 후 연희궁에 머물렀다 한다.
그렇다면 정식 이궁이 되기 전부터 이곳에는 상왕(上王)이 거처할 만한 건물이 있었을 것이다.
연희궁이 불행을 맞기 시작한 것은 연산군(燕山君) 시절이었다.
"왕이 서교(西郊)에 납시어 농사를 구경하고 돌아와 연희궁(衍禧宮) 뒷산에서 시위하는 군사를 시켜
여우와 토끼를 사냥하였다." 연산군 일기 31권 1498년 8월 18일 기사를 살폈다.
풍류 좋아하는 연산군은 연희궁을 놀이터로 바꾸고 지금의 연희동, 신사동에 해당하는 지역을 비롯한 고양군 일대에서
사냥을 즐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연산군이 폐위되어 교동 귀양길에 올랐을 때 이곳에서 하룻밤 유(留)했다고도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