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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선 비행장은 여의도비행장이다.
여의도 비행장은 1916년 일본군이 서울에 600m활주로 공사를 시작하였다.
현재는 비행장을 폐쇠하고 그 자리에는 여의도공원 KBS,MBC,한국거래소 등이 자리잡고 있다.
1916년 3월에 일본 당국이 군사적 목적으로 당시의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현재의 여의도) 일대에 간이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작이다.이후 9월에 활주로와 격납고를 완공하고 10월에 개장하여 운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제는 대륙진출의 근거지로 활용할 수 있는 두만강 인근지역이 전략 요충지로 떠오르자 1932년 3월 경성에서 함흥을 거쳐
청진에 이르는 신항로 건설을 결정하고 1938년 10월 1일부터 매일 취항시켰다. 해방될 무렵까지 우리나라 전역에 40여 개의
군겸용 비행장이 들어섰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공항을 경성항공사가 이용했다.
1917년에는 세계적인 곡예비행사 아트 스미스가 곡예비행을 선보였으며, 192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 비행사로
알려진 안창남이 시험비행을 선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구, 장준하, 윤경빈 등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서 귀국할 때 탑승한 C-47기와 같은 비행기가 서울 여의도공원에 전시되고 있다.
여의도공원에 전시되는 C-47 항공기는 1945년 11월 23일 상해 임시정부 요인 15명이 탑승해 귀국했던 비행기와 같은 기종으로 대
한민국 공군이 최초로 보유한 수송기다.
앞서 같은 해 8월 18일엔 대한민국 광복군 정진대, 이범석, 김준엽, 노능서, 장준하 선생 등이 C-46기를 타고 경성비행장(여의도공항)에 도착했다.C-47 수송기는 1950년에 대통령 전용기로 사용됐으며 보급품 수송, 환자공수 임무기로도 활약했다.
같은 해 미 공군 C-54 수송기들과 함께 제주도로 전쟁고아 1천여 명을 보내는 '전쟁고아 수송작전(Operation Kiddy Car)'도 진행해 우리의 아픈 역사와 함께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여의도공항은 광복, 6.25전쟁을 겪고 난뒤 1953년 국제공항의 지위를 부여받고, 국제공항으로 승격하였다.
잦은 홍수로 인해 침수피해가 늘어나면서 공항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이에 1958년에는 민간공항기능을 김포국제공항으로 이전하며, 여의도공항은 공군기지로만 사용했다.
그러다 1971년에는 공군기지기능도 현재 서울공항으로 이관되면서 여의도공항을 패쇄되었다.
오늘날 여의도 공항 터에는 여의도공원, 방송사, 한국거래소등 여러가지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현
재 여의도공항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흔적은 확인할 수 있다.
여의도광장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한반도에서 유사시 비행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설을 지시했다고 한다.
후에도 이곳이 비행장으로 쓰인 적은 없었고 국군의 날 기념식이나 국풍81 등의 관제행사가 드넓은 여의도 아스팔트 광장에서
열렸다.
여담으로 서울시는 여의도공항을 폐쇄한 후인 1960년대 후반 이 자리를 개발하면서 범람을 막기 위해 여의도 둘레에 둑을 쌓은 뒤
그 위에 여의도 일주도로를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매년 봄철 벚꽃축제 명소로 알려진 여의도 윤중로(여의동로·여의서로)다.
또 과거 여의도공항의 일부 공간이었던 여의도 버스환승센터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시절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하벙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