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마포(麻浦)종점이다.
마포의 원래 이름은 삼개다. 삼개란 섬이 있는 갯벌이란 뜻이다.
옛 한국어에서 ‘삼’은 ‘섬’이다. 밤섬 노들섬 선유도 그리고 샛강을 사이에 두고
강의 남쪽과 붙어있는 여의도와 이어지는 갯벌이 삼개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의 지명들이 행정 편의를 위하여 한자로 표기될 때 엉뚱하게도,
삼을 뜻하지만 음은 마인 ‘麻’라는 글자에 나루라는 뜻의 포(浦)라는 글자가 합쳐져서,
마포라는 한자 지명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삼개나루는 그 지역의 상황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 마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 삼개나루는 제방과 강변도로, 마포대교가 얽혀있는 교차점이다.
그 교차점 주변의 곳곳에는 오랜 역사가 남긴 다양한 흔적이 숨겨져 있다.
밤 깊은 마포종점 갈곳 없는 밤 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곳 없는 나도 섰다
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
하나 둘씩 불을 끄고 깊어 가는 마포종점
여의도 비행장엔 불빛만 쓸쓸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생각한들(하면) 무엇하나
궂은비 내리는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
은방울자매의 노래 '마포종점'이다.
이 노래가사를 보면 50년대에는 전차 종점이 마포였다는 점,
마포 근처에는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없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겠다.
높은 빌딩들이 없었기에 당인리 발전소가 마포에서도 보였다는 점과
여의도에 비행장이 있었다는 것도 노래 가사에 그 당시의 서울 풍경이 그림처럼 아른거린다.
1968년 11월 29일 전차 운행 종료를 알리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이때 도화동에 살고 있던 작사자 정두수가 마침 그 방송뉴스를 듣고 탄식을 한다.
그리고 전차와의 영원한 송별을 기려 그 쓸쓸함을 연인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빌려
노랫말로 적는다.당대 최고의 작곡가 박춘석이 곡을 붙여 최고의 히트곡 '마포종점'이 탄생한다
마포역 4번 출구를 나서서 마포대교 쪽으로 조금 걸으면
‘불교방송’이라는 큰 글자가 벽에 붙어있는 다보빌딩 건물이 나온다.
그 건물의 마포대교 쪽 구석에 ‘3․1 독립운동기념터; 마포전차종점’이라는 표석이 앉아있다.
표석에는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마친 군중이 오후 8시경
이곳에 운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던 곳이라고 쓰여 있다.
옛 마포나루 일대의 모습니다. 1920년대 외국인이 촬영한 빛바랜 사진이다.
1919년 3월 1일 오후 8시경
약 1천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 이후 서울 시내 각처에서 벌어진 만세시위는
해질 무렵부터는 시가지에서 교외로 번져나가 오후 8시경에는 마포 전차종점 부근에서 다수의 군중이 시위하였다.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부근에서는 학생들이 오후 11시 경까지 해산하지 않고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처럼 이날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시위는 해가 저물도록 계속되었다.
그러나 독립선언의 공약삼장(公約三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질서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수십만 명의 군중이 활동하였는데도 단 1건의 폭력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가장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독립의지를 표시하려는 것이 3 1운동의 정신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일제는 군국주의(軍國主義)의 본성을 드러내어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경찰과 헌병 이외에도 용산에 있는
보병 3개 중대와 기병 1개 소대를 동원해서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빈손일망정 결사적으로 졸진하는
시위 행렬은 막지 못하였다. 따라서 일제는 진고개에서의 시위행렬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주동자로 보이는
학생 군중을 체포하였다.태화관에서의 민족대표 29명을 포함하여 약 130여명을 체포하였다.
이날의 시위운동은 서울에서 뿐만 아니었다. 평남의 평양 진남포 안주와 평북의 의주 선천, 함남의 원산 등지에서는
3월 1일 서울과 비슷한 시각에 독립선언식을 전개하였다. 이날의 서울과 이북 6개 도시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은
거족적인 3 1운동의 전체로 볼 때 그 첫 봉화에 불과하였다. 이처럼 마포전차종점 유적지는 역사적 의미는 있으나
당시 전차길이 사라지고 도로 확장 등으로 당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다만 그자리에 표시석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