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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여의도에 역사적인 C-47 수송기가 착륙하였다.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7.04.13|조회수330 목록 댓글 0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98주년 기념일을 맞아 13일 서울 여의도 문화공원에 'C-47 수송기'가 전시되고 있다.

이번에 전시되는 C-47은 1945년 11월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 요원 15명이 타고 온 비행기이다.
C-47비행기는 여의도공원 내 광장(문화의 마당)에 머물며 1945년 항일전선의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공간 C-47비행기 전시관>의 안내문은 그 비행사연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1945년 8월 18일 이곳 경성비행장(여의도공항)에 비행기 한 대가 내려앉았다. C-47 수송기였다.

비행기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정진대원 이범석 김준엽 노농서 장준하가 타고 있었다.

이들은 이날 새벽 버드 Willis H. Bird 중령 등 미군 전략정보처 OSS대원 18명과 동행하여

시안(西安)비행장을 이륙하였다.

정식명칭은 미국군사사절단(작전명 '독수리')이었다.

미군 중에는 한국계 함용준 정운수 서상복이 동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곳 여의도에 도착한 한국인은 7명이었다.

                                                          AFTERNOON

비행기가 서해바다 위에 날고 있을 무렵 이범석 장군은 펜을 꺼냈다.

보았노라 우리 연해의 섬들을

왜놈의 포화 빗발친다 해도

비행기가 부서지고 이 몸 찢기워도

찢긴 몸 이 연안에 떨어지리니

물고기 밥이 된들 원통치 않으리

우리의 연해 물 마시고 자란 고기들

그 물고기 살찌게 될 테니

1945년 8월 18일 02:18 PM

(장준하 기록 오후 2시 18분 OSS쪽 증언 오전 11시 56분)

여의도공항 활주로 끝에 멈춘 비행기에서 광복군 정진대와 미군이 내리자 착검을 한 일본군이 포위망을 형성하면서 좁혀왔다.

일본도를 뽑아 든 대열도 대기하고 있었다. 일왕 히로히토가 포츠담선언을 수락한 지 사흘 지난 8월 18일 오후였지만

여전히 한반도는 일제가 장악하고 있었다. 8.15 이후 한국인의 봉기를 우려해서 도리어 치안권을 강화한 상황이었다.

공항에는 제로센 20대를 포함해서 비행기 50여 대가 있었다. 미군은 연합군 포로와 접견을 요구하였으나 일본군은 이를

거부하였다.


대화가 막히자 일본군은 탱크 두 대를 끌고 나오고 활주로에 박격포를 배치하였다.

정진대원 넷은 오른쪽 겨드랑이에 멘 토미건 기관단총의 자물쇠를 풀었다.

김구 주석의 명령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이름으로 조국에 들어가 장렬히 전투를 벌이라는 것이었다.

비로소 그때 한국은 참전국이 될 수 있는 터였다. 그들의 운명은 살아서는 귀환할 수 없는 것이었다.

품에는 실탄을 채워 넣은 리볼버 권총이 들어 있었고 허리춤에는 수류탄이 매달려 있었다.

네 명은 서로의 등 쪽을 기대면서 전투태세로 들어갔다. 목숨 따위 벌써 칠푸른 서해바다에 흩어버리고

조국 땅에서 죽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고 여기고 온 그들이었다.

단장 버드 중령이 정진대원들을 제지했다.


                                                          LATE NIGHT

경성비행장 책임자 시브자와 대좌와 우에다 히데오 소좌가 여의도 일본군 막사에서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대기하고 있던 이범석 김준엽 노능서 장준하 광복군 정진대원 네 사람을 찾아왔다.

맥주와 사케통을 들고 온 그들은 무릎을 끓고 술을 권했다. 장준하는 김준엽의 권유로 난생 처음 술을 받아마셨다.

일본군이 광복군에게 항복의 예를 취한 오직 한 번의 술판이었다.

1945년 8월 19일 05:00AM

긴 실랑이 끝에 이튿날 새벽 다섯시 무렵 평양에서 실어온 가솔린을 채운 비행기는 여의도비행장을 떠나

기수를 돌려 중국 산동성(山東省)으로 향해야 했다. 정진대원 넷은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려서

전투를 전개하고자 했으나 버드 중령은 다시 이들을 말렸다.


1945년 11월 23일 01:00 PM

C-47기는 상하이 강만(江灣)비행장을 떠나 김포비행장으로 향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국무위원 이시영 선정부장 엄항섭 문화부장 김상덕 참모총장 류동열 장군 주치의 유진동 박사 비서 김진동

수행원 안미생 민영완 윤경빈 이영길 백정갑 선우진 장준하 환국하는 임시정부 요인 15명을 대우고서였다.

이는 중국 국민당 정부 장제스 주석과 주중 웨드마이어 미군사령관의 주선으로, 주한 미사령관 하지 중장이

보내준 수송기였다.

                                          

                                                             04:00 PM

3시간의 비행 동안 말 한마디 없이 항해를 나는 그들의 회포는 도리어 침묵으로 무겁기만 했다.

15인의 임시정부 요인들은 광복 석 달 만에, 임시정부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어수선한 조국에 도착했다.

환영객 한 명 없는 쓸쓸한 김포비행장이었다.

공항 도착 직후 장준하는 <돌벼개>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벌판뿐이었다. 일행이 한 사람씩 내렸을 때 우리를 맞이하는 건 미군 병사들 몇이었다.

우리의 예상은 완전히 깨어지고 동포의 반가운 모습은 허공에 모두 사라져버렸다. 조국의 11월 바람은  퍽

쌀쌀하고 하늘도 청명하지 않았다......나의 조국이 이렇게 황량한 것이었구나. 우리가 갈망한 국토가 이렇게

차가운 것이었구나. 나는 소처럼 힘주어 땅바닥을 군화발로 비벼댔다. 나부끼는 우리 국기, 환상의 환영인파,

그 목 아프도록 불러줄 만세 소리는 저만치 물러나 있고, 검푸레한 김포의 하오가 우리를 외면하고 있었다."

2015년 8월 18일

그들이 조국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고 착륙했던 이곳 옛 여의도 활주로에 70년만에 비행기를 세우고 뜨거운 기록을 남긴다.

어찌 이들뿐이겠는가. 이곳은 이름조차기록, 기억도 하지 못하는 숱한 항일투사들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들 대부분에게는 고단한 애국심 말고는 다른 복은 주지 않은 조국이었다.

우리 헌법 첫 줄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토 박혀 있다.

다만 아쉽게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그 활동을 기릴 수 있는 터가 이 땅에 부재한 까닭에

이곳에 어린 숨결은 더 격렬하게 가슴을 두드린다.

따라서 이 C-47 수송기는 우리 헌법 첫 줄 사이에 착륙해 있는 셈이다.

                         -3.1운동 100주년,대한민국 1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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