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사당은 고려의 도읍지 개성이 아닌 조선의 도읍지인 서울에 두 군데에 있다.
조선왕실의 사당인 종묘에 들어서면 망묘루와 향대청 사이에서 공민왕의 사당을 만날 수 있다.
또 서강나루 근처 와우산 자락 광흥창 바로 옆에도 고려의 공민왕의 사당이 있다.
공민왕 사당을 조선의 도읍지 한양에 두게 된 설화가 전해진다.
종묘의 공민왕 사당의 정식 이름은 '고려 공민왕 영정 봉안지당(高麗 恭愍王 影幀 奉安之堂)'이다.
신당 안의 중앙 벽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를 함께 그린 영정(影幀)이, 옆면의 벽에는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하는 준마도(駿馬圖)가 봉안됐다.
종묘지의 필사본에는 '종묘를 지을 때 북쪽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공민왕의 영정이 묘정에 떨어졌다.
조정에선 의논 끝에 그 영정이 떨어진 곳에 사당을 건립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속내는 조선의 역사적 정통성을 세우고, 고려 유민을 달래기 위한 태조의 정치적 의도로 보인다.
실제로 태조는 고려의 계승을 말했고, 공민왕의 후비인 정비 안씨의 교지를 받들어 보위에 올랐다.
태조가 1392년 발표한 즉위교서에서도 정권승계를 주장했다.
'왕씨(王氏)는 공민왕이 후사(後嗣)가 없이 세상을 떠난 뒤 종사를 보전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혼란을 수습코자 백성의 지지를 얻어 하늘의 뜻을 받든다.
나라 이름은 그대로 고려(高麗)라 하고,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는 한결 같이 고려의 고사(故事)에 의거한다'는 내용이다.
역성혁명이 아니라 공민왕을 계승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함께 고려 왕족 달래기도 언급되어 있다.
‘왕씨(王氏)의 후손인 왕우에게 경기도의 마전군을 주고 귀의군으로 봉하여 왕씨의 제사를 받들게 하라’는 구절이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고려 왕족의 포섭, 백성의 민심을 얻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가 공민왕 신당으로 볼 수 있다.
마포 서강나루 근처 와우산 자락에 공민왕 사당을 두게 된데는 이런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조선 건국 초 공무원들에게 월급으로 줄 양곡을 보관하는 광흥창을 지을 때이다.
어느날 밤 이 광흥창을 짓는데 참여하고 있는 동네 노인의 꿈에 공민왕이 나타났다. 이렇게 호소한다.
"이곳은 전에 내가 자주 찾던 곳이다. 이곳에 당(堂)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내준다면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풀려질 것이다.
만일 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해마다 사고가 날 것이다."
그 노인이 꿈에서 깨여나 그 자리에 가 보니 공민왕 부부를 그린 영정이 바위 밑 함에서 나왔다. 그 자리에 사당을 지었다.
사당을 완성한 뒤에는 매년 10월 1일 밤 12시에 제사를 성대하게 지내왔다. 혹시라도 제사를 소홀하거나 불경스러울 때면
광흥창에 화재가 나거나 곡식을 실은 배가 풍랑에 파손되는 등의 재난이 뒤따랐다.
공민왕 사당에는 공민왕과 왕비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최영 장군 그외 왕자 공주 옹주의 화상이 걸려있다.
공민왕은 왜구를 싫어하였다.
그래서인지 신당 근처에는 일본인들이 얼씬 거리는 것도 용서치 않았다.
개항 무렵과 대한제국 때는 물론 일제 때에도 일본인들이 이 근처에 오면 반드시 해코지를 당하였다.
그 후로는 일본인들이 아예 접근 조차하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조선강안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쓴 일본인 토목기사 장목(長木)은 우연히 이곳 신당 앞을 지나게 되었다.
갑자기 창자가 뒤틀리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며 먹을 것을 다 토해내고 잠시 기절하였다.
그때 수염을 기르고 금색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뺨을 치면서 “썩 물러가라!”며 호통을 쳤다.
순간 정신이 들어 사방을 살펴보니 동행하였던 한국인 보조기사들이 자신을 응급조치를 한 후
데리고 병원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병원에서 진찰한 결과 과로로 인한 급성맹장염으로 나왔다.
“수술 후 요양하여야 한다”는 병원 측의 진단이었다.
당시는 급병 때문에 당한 일이라는 생각에서 그냥 병원치료를 받았다.
기절한 상태에서 나타난 노인의 얼굴이 잊을 수 없었다.
몇 달 후 다시 신당을 찾았다. 처음 당한 것처럼 똑같은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놀란 장목은 다시 그 병원에 입원하고서야 신당에서 오는 신비한 힘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주위의 일본인들에게 서울 마포 창전동 와우산 자락에 있는 공민왕 신당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하였다고 전한다.
고려 31대 왕(재위, 1351~1374)으로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명덕태후(明德太后)이다.
왕비는 원나라 위왕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다.
공민왕은 12세가 되던 1341년에 원나라에 들어가 10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1351년에 충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위한 해인 1351년 11월 이제현, 조일신을 중심으로 한 전면적인 인사이동을 단행하여 정치적 기반을 다진 뒤
이듬해 1월에 몽골식의 변발(辮髮)과 호복(胡服)을 폐지하여 고려의 자주적 전통을 추구하려는 새로운 정치를 시작하였다.
공민왕과 신진사대부가 추진한 개혁정치는 권문세족을 정치적으로 배제한 가운데 이루어져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고려 충선왕 때 남경에서 격하된 한양부는 고려 말 공민왕 때부터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공민왕 5년(1356)에 원나라를 배척하고 주권을 회복하는 정책을 단행하여 문종 때의 관제를 복원하였다.
이 때 한양부도 남경으로 환원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이 한양천도를 결심하게된 것은 중 보우(普愚)가 “한양에 도읍하면 36개국이 조공을 바치게 됩니다.”라고 제안한 때문이다.
공민왕은 왜구와 홍건적이 침입하는 등 나라 안팎에 어려움을 겪자 수도를 옮김으로써 국내외적인 환난을 피하고,
국가 기업의 연장과 국운의 쇄신을 기하려 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남경궁궐을 수리하게 한 후 공민왕 6년(1357)에 봉은사로 가서
태조 왕건의 어진(御眞)을 배알하고, 한양 천도가 좋은지 나쁜지를 물었다.
며칠 후에 이제현(李齊賢)이 천도의 가부를 점을 친 결과 길조(吉兆)의 점괘를 얻음으로써 한양천도의 의사를 더욱 굳혔다.
공민왕은 그 해 2월에 이제현에게 한양의 집터를 보게 한 후 궁궐과 성곽을 다시 짓게 하는 외에 남경유수(南京留守)를 임명하는 등 한양에 대한 본격적인 경영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론이 많았고, 또한 태묘(太廟)에 점을 친 결과 불길하다는 점괘가
나와 한양천도를 포기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