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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 선유봉

고균 김옥균 양화진에서 효수처형되다.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4.02.28|조회수34,675 목록 댓글 0

 

 

양화진 모래벌판에서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을 효수처리한 끔찍한 장면이다.

김옥균의 머리가 왼쪽에 걸려있고 그 옆에 '大逆不道玉均'라는 글자가 드리워졌다.

이 글씨는 김옥균을 살해한 홍종우가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풍운아 김옥균은 중국 상하이에서 홍종우에 의해 끔찍하게 살해되었다.

그의 시신은 몸과 다리 목 등으로 짤려 나무상자에 넣어 조선으로 왔다.

일본의 시사신보는 1894년 4월 28일자 기사에서 김옥균의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을 싣고 있다.

" 김의 시신을 관에서 꺼내어 땅 위에 놓고, 절단하기 쉽게 목과 속 그리고 발밑에 나무판자를 깔았다.
목을 자르고 난 다음에 오른쪽 손목 그다음 왼쪽 팔을 잘랐다.
이어 양 발목을 자르고 몸통의 등 쪽에서 칼을 넣어 깊이 한 치 길이 여섯 치 씩 열 세 곳을 잘라 형벌을 마쳤다."
"시신을 조각조각 떼어서 팔도에 보내어 저자거리에 내다 걸게 하고,
목은 대역부도옥균이라고 커다랗게 쓴 현수막과 함께 양화진 형장에 효수에 놓았다.
이 끔찍한 형벌은 임금(고종)의 이름을 빌려 민비와 민영익의 심년을 벼르다 벌인 철저한 복수극이었으리라.
아! 그렇게 조각조각 잘려진 시신은 그 후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어느 기간동안 저자거리에서
구경거리로 내 보인 다음엔 누군가 조각시신을 다 모아서 장례를 치러도 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시신을 처리할까?"

김옥균의 시신은 청국 군함에 실려 상해에서 마산포를 거쳐 인천으로 들어왔다.

 이곳에서 조선 배로 옮겨져 4월 13일 양화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능지처참형이 결정되어 시신의 목과 손·발을 잘라 효시하고,

손과 발 하나씩은 전국 팔도에 돌아가며 효시하도록 조치하였다.

시신을 능지처참하여 양화진에 효시한 것은 무엇보다도 양화진이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나루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백성들에게 대역죄인에 대한 처벌을 널리 알리려는 목적으로 양화진에서 김옥균의 시신을

능지처참하여 효시하였을 것이다. 김옥균의 시신에 참혹한 처형을 가하면 국가의 명예가 훼손되고

외국의 감정을 상하게 할 것이라고 일본 공사가 외아문 독판(지금의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조언하기까지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문제는 국왕이 직접 결정할 문제로 잘못 말하면

당사자도 김옥균의 당파로 몰릴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살해되는 장면을 삽화이다.

그는 1894년 전 주일 청국 공사이며 이홍장의 아들인 이경방의 알선으로 이홍장과 회담을 하기 위해 상하이에 갔다.

상하이에 간 그에게는 청나라, 조선, 그리고 일본에 의해 공모된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1894년 3월 27일 중국인 통역과 일본인 제자, 그리고 홍종우와 상하이에 도착한 김옥균은

미국 조계 내 일본 호텔 동화양행에 투숙하였다. 이튿 날 오후 홍종우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홍종우는 프랑스에 유학하였다가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민씨 정권이 보낸 자객에게 포섭되어 김옥균을 암살하였던 것이다.

사건이 터지자 청나라는 김옥균의 시체와 홍종우를 조선 정부에 인도하였다.

김옥균은 1884년 12월 개화당 동지들과 함께 정치 개혁을 목적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정변은 ‘삼일천하’에

그치고, 그와 개화당 인물들은 일본에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 김옥균은 도쿄 교토 오사카 등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일본의 정치인들과 교류하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일본 정부 측에 개화당 인물들의 신변을 인도해

달라고 계속 요구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1886년 6월 “조선 정부에 불쾌감을 일으키고,

치안을 방해하며 외교상의 평화를 지장하게 한다”라는 이유로

 김옥균에게 국외 추방령을 내렸다.

그러나 언론에서 크게 비판하자 그 해 8월 결국 오가사하라 섬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후 그는 홋카이도로 이송되었다가 병이 나는 바람에 1890년 4월 도쿄에 돌아와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고 10월에야 석방되어 4년 2개월의 긴 유배 생활을 끝맺었다.

 김옥균은 도쿄에서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조선 정부는 계속 자객을 파견하여 그를 없애려 하였다.

김옥균은 1851년 지금의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서

김병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이 안동이고,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 또는 고우(古愚)이다. 3세 무렵 그의 가족은 지금의 천안시 광정면 원대리로 이사했다.

 그의 아버지는 훈장 노릇을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7세 때 재종숙인 김병기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11세(1861년)에 양부인 김병기가 강릉부사가 되어 강릉으로 가게 되자

양부를 따라 강릉으로 가서 16세 때까지 율곡 이이의 사당이 있는 서당에서 율곡 학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공부하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김옥균은 학문뿐 아니라 문장과 시, 글씨, 그림, 음악 등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소질을 발휘하였다.

갑신정변의 동지였던 박영효는 “김옥균의 장처(長處)는 교유(交遊)라고 할 수 있소. 교유가 참 능하오.

 글 잘하고, 말 잘하고, 시 잘 쓰고, 글씨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오”라고 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다재다능했는지를 알 수 있다.

김옥균의 주위에는 일찍부터 당시의 명문 귀족 출신 수재들이 모여들었다. 그중 철종의 사위인 금릉위 박영효와 당시 영의정이던 홍순목의 둘째 아들인 홍영식, 고종의 외척이며 여흥 민씨 가문의 총아인 민영익 그리고 서광범, 서재필 등이

김옥균이 교류하던 양반 출신 청년 지식인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김옥균은 1870년대부터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배우게 되었고, 이들이 훗날 갑신정변의 주역이 되었다.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고종 21) 金玉均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조선 후기 이래로 조선시대의 사회는 안으로는

봉건체제의 낡은 틀을 깨뜨리고 자본주의의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정치적·경제적·

사회적 변화가 일고 있었다.밖으로는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 위협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중인 출신의 지식인과

양반 관료들 사이에서는 조선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깨닫고 세계역사의 발전방향에 따라서 사회를 이끌려는 개화사상이 형성되었다. 이 사상에 따라 내외정치를

개혁하려고 결집된 정치세력이 개화파이다.
김옥균·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서재필(徐載弼) 등의

양반 출신 청년지식인은, 19세기 중엽 박규수(朴珪壽)·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 호는 大致) 등의 사상과 그들로부터 받은 서구사회에 관한 문명서적을 통해서

실학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정세의 흐름 및 자본주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조선사회의 개혁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개항 이후 이들은 민씨정권의 개화정책에 참여하면서 점차 김옥균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개화사상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하려는 하나의 정치세력

즉, 개화파를 형성하였다. 그런데 개화파 안에서는 개혁의 궁극적 방향을 같이하면서도 실현방법에서 입장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김홍집(金弘集)·어윤중(魚允中)·김윤식(金允植) 등의 온건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위해 여러 개혁정책을 실현하되, 민씨정권과 타협 아래 청나라에 대한 사대외교를 종전대로 계속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방법으로 수행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급진개화파는 청나라에 대한 사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우선과제로 삼고

민씨정권도 타협의 대상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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