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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 선유봉

한강과 광주 실학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7.06.26|조회수193 목록 댓글 0


겸재 정선이 양수리를 그린 '독백탄'

광주는 조선 후기 실학 발생의 본거지 혹은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이제 광주가 실학의 본고장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을

역사적 지리적 고찰을 통하여 살펴보자. 광주는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백제 초기 도읍지였고 삼국시대에는 신라 한산주(漢山州)의

주도(州都), 고려시대에는 광주군 혹은 광주목의 읍치(邑治)였으며 조선시대 역시 광주목 혹은 광주부로서 수도 한양의

보장지(保障地)이고 군사적 요새지였다. 또한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남북을 연결하는 중심에 있고, 수도 한양으로 통하는 육로와

수로의 중요한 길목이기 때문에 삼국시대 이래 역사적으로 이 지역을 확보하기 위한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수도 한양에 접해 있어 정치적으로 조정의 동향에 대해 빠른 정보를 접할 수 있고, 중국에서 들어오는 선진 문불 접촉도

용이하다는 이점도 지니고 있었다.

광주는 북쪽에 동서로 흐르는 한강을 끼고 있어 수운(水運)의 요지였다. 육로의 수송 수단이 원할하지 못했기 때문에

동서로 오가는 사람들은 물론 지방에서 중앙정부로 운송해야 하는 수많은 세미(稅米) 기타 교역되는 대량의 물자가

이 한강을 수송로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수된 물길을 따라 한걍과 광주가 경계를 이루는 한강의

남변에는 여러 개의 나루터가 있어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과 물자가 모여 장시(場市)를 이루었다.

더욱이 조선 후기에 들어 인구의 도시집중이 급격히 이루어지고 교역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한강 물길을 따라

상공업 또한 급속하게 발달하였다. 당시 광주 관내에는 송파(松坡) 삼전도(三田渡) 광진(廣津) 마점진(麻岾津)

신천진(新川津) 두미진(斗迷津) 미음진(迷音津) 등 여러 곳의 나루터가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숭파는 한반도 동남지방으로부터 한양으로 통하는 한강변 최대의 교통 요지였다.

동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장사꾼과 물자가 모여 5일 장시를 이루다가 규모가 커지면서 상설시장으로 바뀌는 등

이곳은 점점 한강유역의 대표적인 상업 거점으로 성장하였다.현재 전해져 내려오는 송파 산대놀이도 이곳 장사꾼들이

벌인 일종의 호객행위에서 시작된 것이라 한다. 따라서 광주 관내 한강변 나루터는 송파를 중심으로 도매상인 객주(客主)나

보부상(褓負商)의 주요 상업활동 무대가 되었다.

한강을 이용하여 상업활동을 펼치던 상인들이 경강상인(京江商人0이다. 경상상인은 한성부(漢城府)의 통재를 받으면서

한강 물길을 오르내리며 선상(船商)과 운송활동에 종사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한강 일대를 중심으로 하나의 경재권을

이루고 정부관리들과 결탁하여 정부 비축용 곡물 수송을 전담하거나 선상활동을 하여 점차 많은 상업자본을 형성해갔다.

또한 경강상인은 곡물은 물론이고 어물이나 소금을 정부에 독점 조달하기도 하였다. 본시 정부에 조달되는 어물이나 소금은

독점적으로 물품을 공급하던 시전상인의 몫이었으나 조선 후기로 오면서 선상활동에 의한 판매가 자유로워지면서 한강변의

상인들이 값싸게 조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경강상인은 상업자본을 집적하여 도매상인으로 성장해갔고, 그 상업자본은 수공업까지 지배함으로써 수공업 종사자가 점차

상인에 의해 예속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흐름에서 광주의 도자기 수공업도 영향을 받았다. 17~18세기에 들어

분원리(分院里) 등 많은 가마터에 속한 장인들이 상인물주(商人物主)에 예속되어 물건만 만들어주고 공전을 받게 되었다.

이들의 상업할동에서 자생적인 초기 자본주의의 싹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특히 도자기생산에 필수적으로

소요드는 백토나 땔감 등은 인근 상류ㅠ지역에서 배로 나르고 제품 또한 배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

광주 도요산업은 한강 수운이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광주 관내의 한강 포구에는 개개주나 거상이 늘어가고

상업활동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부상 또한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한강은 상업활동 무대로서 역할도 컸지만 여객수송에도 큰 몫을 하였다. 도성에서 내륙으로 이동하는 원거리 여행에

한강의 배가 유용하였다. 한강 상류로 갈수록 산악지대가 많고 육로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에 오히려 배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였던 것이다. 서울 등 다른 지방과 광주지방에 실학자들이 드나들 때, 천주교 서적이 광주지방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읽힐 때, 주로 활용된 운송수단도 배였다는 사실을 감안해본다면 당시 한강 수운의 발달과 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조선 후기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 그리고 물자의 수공과 여객 운송에 광주를 끼고 흐르는 한강이 큰 역할을 하였다.

장시가 들어서 다양한 정보교환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는 한편 지식인들이  농본억말(農本抑末) 사상에서

벗어난 상공업 진흥의 실학사상을 깨닫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한강을 중심으로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동안, 광주 관내 내륙의 산업은 어떠하였던 것인가?

한강변을 중심으로 상공업의 발달과 광작을 통한 상업적 농업으로의 이행은 농본국가인 조선의 농업에 역기능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농민들이 농업에서 이탈하는 등 농민층의 분화가 빠르게 이루어지면서 농민의 도시집중이 가속되어 도시 영세민의

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상업의 발달과 화페정책의 신장이 농민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강유역의 상업활동이 아무리 활발하게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광주의 인구는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였다. 17~18세기 광주 관할 지역은 현재 안산시 일대의 해안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농민들 역시 다른 지역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논의 비율은 경작지의 30% 남짓하였으나 인구밀도가 높아 1인당 경지면적이 경기도의 평균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이는 곧 조선 후기 광주 관내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겠다.

당시 광주 관내에 살고 있던 지식인들이 역시 이러한 상황을 목격하였고, 신분은 양반 사대부이지만 자신들도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처지에서 농촌문제를 들어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과 개혁의 소리를 높이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농촌경제의 개선을 주장하는 실학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토지제도의 개선을 비롯하여 각종 제도 개선을

통하여 농민의 경재적 지위 향상을 주장하였다. 이른바 경세치용을 내세운 학자들로, 유형원(柳馨遠) 정상기(鄭尙驥) 이익

안정복 정약용 등이다. 이들의 당색은 물론 대부분 남인에 속하였다.

한편 서학(西學)에 관심을 둔 지식인들이 실학의 발달에 크게 공헌하였는데, 이들의 거주지와 활동지역이 한강유역이었다는

점 또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 성호학파가 근기지방에서 왕성한 학문활동을 할 때, 성호학파의 젊은 지식인들로 잘

알려진 권철신(權哲身) 권일신(權日身) 이기양(李基讓) 정약전(丁若銓) 정약용 이벽 등이 주어사(走魚寺)와 천진암(天眞庵)에

모여 강학을 하고 학문을 토론할 때도 주로 한강의 수로교통이 큰 역할을 하였다. 이들 역시 모두 남인에 속한다.

이들은 전통적인 주자학풍에 얽매이지 않고 서구의 과학기술은 물론이고 기독교 사상에도 큰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 점차

신자의 길을 걷기도 하였다. 이들이 신봉하였던 천주교의 평등사상이 조선 양반사회의 모순과 신분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며 근대화를 이끄는 데 큰 몫을 하였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광주가 성호학파와 직접 인연이 있는 곳인 데다 북학파의 학문적 고향이라 말할 수 있는 남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과

한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이웃하면서 서울의 동남쪽 관문이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더불어 양명학에 바탕을 둔 실학의

고장 강화에서 강화학파가 왕성하였던 곳도 한강 하구였다.

말하자면 한강은 한국 실학 형성의 대동맥으로서 광주를 관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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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州市史 2권 288쪽에서 291쪽의 글을 옮겨온 것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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