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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 선유봉

절두산과 사도세자 그리고 은언군과 흥선대원군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9.02.17|조회수777 목록 댓글 0

 

누에가 머리를 높이 든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잠두봉(蠶頭峰)이라 부르던 곳이다.

잠두봉 아래에는 한강을 통해서 각 지방에서 조세곡 수송선과 어물, 채소 등을 실은 배가 드나들던 양화나루가 있었다.

조선의 문신과 중국의 사신 등은 한강진 제천정에서 연회를 즐긴 뒤 서강까지 뱃놀이 선유(船遊)를 즐겼다. 

이때 놀잇배는 서강에 들어 양화진 잠두봉에 올라 연회를 만끽하고 잠두봉~선유봉~밤섬~잠두봉을 순회하며

시문을 지으면서 풍류를 즐긴 이름난 명승지였다. 그 옛날 한류(韓流 KoreanWave)가 한껏 꽃피운 곳이다.

그 아름다운 잠두봉이 1866년 끔찍한 절두산(切頭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병인박해 때 잘린 천주교 신자들의 머리가

산을 이루고, 그 피가 강물을 붉게 물들였기 때문에 절두(切頭)의 산이 된다. 절두산은 피로 쓰인 한국교회 순교사의 현장이다.

잠두봉 일대 4,120평에 이르는 토지를 1956년에 천주교회측에서 매입하기 시작했다. 피로 물든 곳을 매입하여 성역화한다.

그곳은 마침내 절두산 성지가 된다. 잠두봉의 자연의 아름다움에서도 가슴 시린 아픔이 배어난다.

절두산 한강가 언덕에는 1866년 서양의 세력을 막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흔적 척화비(斥和碑)가 서 있다.

그 앞 구리판은 척화비문과 그 역사를 밝혀주는 설명문을 싣고 있다. 그 설명문을 그대로 아래에 옮겼다.

                                                         척화비(斥和碑)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 서양인을 배척하기 위하여 세운 비(碑).

이 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만대자손에게 경고하노라.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처럼 아름답던 잠두봉이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지게 된 것은 병인박해 때문이었다.

그 해 벽두부터 베르뇌 주교와 선교사들,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을 처형하기 시작한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丙寅洋擾) 직후

이곳 총융진(總戎陣)에 형장을 설치하고 신자들을 체포해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앞서 1866년 9월 26일(음력 8월 18일)에

로즈(Roze)가 이끄는 세 척의 프랑스 함대는 한강 입구를 거쳐 양화나루와 서강(西江)까지 올라갔다가 중국 체푸로 돌아갔으며,

10월에는 다시 일곱 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 갑곶진(甲串津)을 거쳐 강화읍을 점령하였다가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조선군에게 패하여 중국으로 철수하였다.

 두 차례의 병인양요가 프랑스 측의 실패로 끝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되어 1867년과 1868년 초까지 도처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였다. 대원군은 전국에 명하여 천주교도들을 남김없이 색출해 내도록 하였으며,

11월 23일에는 성연순 등을 체포하여 강화도에서 교수형에 처하고, '천주교 신자는 먼저 처형한 뒤에 보고하라'는

선참후계(先斬後啓)의 영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함대가 양화나루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럽혀졌다.'는 구실 아래 '양화나루를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처음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10월 22일에 효수형을 받은 이의송(프란치스코), 김이쁜 부부와 아들 이붕익,

10월 25일에 효수형을 받은 황해도 출신의 회장 박영래(요한) 등이었다. 그리고 이후로는 효수형뿐만 아니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기도 하였으며, 또는 몽둥이로 쳐죽이는 장살로, 얼굴에 한지를 붙이고 물을 뿌려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白紙死,

일명 도모지) 등으로 계속하여 순교자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어떤 순교자는 죽은 뒤에도 얼굴 색이 변하지 않았고, 어느 순교자는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았으며,

또 어떤 순교자가 죽은 뒤에는 한강에서부터 무지개가 떴다.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한 신자는 곧 그들의 뒤를 따라

순교자가 되었으며, 이를 목격한 외교인은 무서운 박해의 위협 속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순교자들의 씨는 복음의 터전이 되었고, 복음에 대한 믿음은 다시 순교자를 탄생시킨 것이다."(한국의 여러 '순교사기')

은언군(恩彦君)과 송마리아(진천 송씨)의 묘비다.

은언군 이인(李裀)의 묘비는 철종 2년에 사면하면서 세운 것이다.

은언군과 그의 부인 송마리아의 합장을 밝히고 있다.

송마리아를 왕가에서만 내리는 '상계군 부인'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은언군 이인(李裀)은 사도세자의 장서자이다.사도세자에는 서자 3명이 있다.

후궁 숙빈(肅嬪) 임씨(林氏) 소생으로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과 은신군(恩信君) 이진(李禛)이 있다.

또 후궁 경빈(景嬪) 박씨(朴氏) 소생으로는 은전군(恩全君) 이찬(李襸)이 있다.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은 정조의 이복 아우로 왕 보다 두 살 어리다.은언군이 바로 철종대왕의 조부이다.

은언군이 상계군 풍계군 전계군 3 형제를 두었다. 전계군은 회평군 영평군과 서자 이원범을 두었다.

이원범이 바로 덕완군으로 봉되며 보위에 오른 철종이다.

1786年 정조10년 홍국영(洪國榮)이 누이 홍씨를  정조 후궁으로 올린다.

원빈 홍씨의 양자로 갔던 은언군의 장자 상계군 담이 이미 죽은 홍국영 일당의 모반죄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어

끝내 자결한다. 욕심 많은 은언군이 아들을 죽였다느니 홍국영 잔당이 죽였다느니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이 때 3 사에서 은언군도 사사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정조의 특별한 배려로 목숨을 부지 하여 강화도로 홀로 이주 하였다.
1797년 정조 21년 44세에 강화도를 탈출 했으나 다시 붙잡혀 재안치 되었다.
은언군 이인은 그를 보살펴주던 정조가 1800년 죽음으로 모든 상황이 돌변하게 된다. 
11살의 어린 순조가 왕이 된다. 모든 권력은 정조의 정치적 최대 라이벌이었던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 씨에게 돌아간다.
정조의 친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앞장 섰던 그녀는 곧 정적제거에 나서게 되고, 여기에 빌미를 제공한 것이 천주교였다.
그녀의 정적들 중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 신앙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조선에 들어와 있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인해,

은언군의 처 송 씨가 한때 주 신부를 그녀가 거처하던 궁 안으로 피신시킨 사실과 고부간이 주 신부 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실이

드러나 사약을 받게 된다. 철종의 할아버지 은언군이었다. 이 묘비의 사연은 이렇게 기록한다.

“〔…〕신유박해가 일어나 송 마리아(은언군의 부인)와 신 마리아(은언군의 며느리)는 외국 종교를 신봉했다는 죄목으로 사약을

받았고, 그 화가 강화도에 귀양 중이 던 은언군에게까지 미쳤다.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는 왕족의 첫 순교자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들의 묘소는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사라져 버렸고 터만 찾을 수 있었으며, 은언군의 묘비는 철종 2년에 사면하여 세운

것으로, 은언군과 그의 부인 송 마리아의 합장을 밝혔다. 은언군의 7대 후손인 이우용의 기증으로 1989년 9월에 진관외동의 산에서

절두산 순교성지로 안치되었다.”

대왕대비가 사학(邪學)에 연루된 은언군 이인의 처와 며느리를 사사하다

“〔…〕강화부에 안치한 죄인 인(裀)의 처 송성(宋姓) 등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모두 사학(천주교)에 빠져서 외인(外人)의

흉한 무리들과 왕래하여 서로 만났으며, 나라에서 법으로 엄하게 금하는 일도 감히 두려워하지 않고 방자하게 자신의 집안에

숨겨 주었으니, 그가 저지른 죄를 논하면 하루도 천지 사이에 용납할 수가 없다. 이에 아울러 사사한다.”<순조실록>

은언군과 부인 송마리아가 희생된 것은 신유박해 때다.

1800년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온화한 정책을 써왔던 정조가 죽었다. 뒤를 이어 11살의 어린 순조가 왕이 된다.

모든 권력을 장악한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곧 천주교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를 시작한다. 박해의 진짜 이유는 정적의 숙청이었다.

그가 원한을 지니고 있던 정적(남인)들 중에는 천주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는 새 법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다섯 집 중 한 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적발되면 모두처벌하는 법)을 만들어 전국의

천주교인을 빠짐없이 고발하게 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역적으로 다스려 뿌리째 뽑도록 하라는 엄명을 전국에 내렸다.
서울을 비롯하여 경기·충청·전라도에 이르기까지 약 1년 간 계속된 이 사건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천주교 신자가 약00명,

유배된 자는 약 400명에 달하였고, 살아남은 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산간벽지로 몸을 피하였다.

이때 순교한 사람들 중에는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 이승훈(李承薰)과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외국인(중국)신부 주문모(周文謨),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회장 강완숙(姜完淑), 다산 정약용의 형 정약종(丁若鍾), 유학자 녹암 권철신(權哲身) 황사영백서사건’의 황사영(黃嗣永)등도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은 나라의 원수로 단정되었고, 아울러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국가에서 행하는 합법적인 법률행위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도 천주교회는 기해박해(1839), 병인박해(1866) 등 크고 작은 박해를 끊임없이 받으면서도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으로 그들의 신앙을 굳게 지켜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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