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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화석정(花石亭)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8.09.13|조회수553 목록 댓글 0

 

파주 화석정(花石亭)은 임진강가에 세워져 있는 정자이다.경기도 시도유형문화재 제61호 이다.

화석정은 임진나루 바로 위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에 세워졌고 강 건너로 장단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가 제자들과 함께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세종 25년(1443년) 율곡의 5대조인 이명신(李明晨)이 정자를 건립하였다성종 8년(1478년) 이이의 증조부 이의석이

중수하고 이숙함이 '화석정(花石亭)' 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 화석정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다.80여 년 간 터만 남아 있다가 현종 14년(1673년)에 후손들이 복원하였다.
6.25전쟁 때 다시 소실 되어버리고 말았으며, 1966년 파주의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다시 복원한 것으로

건축양식은 팔작지붕에 초익공 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랐다고 한다.

화석정이 불타 없어진 기가 막힌 사연이 전설처럼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율곡 이이는 '10만양병설'로 조선 정부에 왜란의 경고를 보냈다.이 경고를 무시하던 선조는 왜란에 대책도 없어 허겁지겁

북으로 피난길을 떠난다. 4월 그믐밤 선조가 이곳 임진강 나루터에 이르렀을 때 폭풍우까지 몰아쳐 한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원래 겁이 많던 선조는 패닉 상태에 빠져 신하들을 닦달하였다.이 때 선조를 호종하던 이항복이 어려움이 닥쳤을 때 열어보라며

율곡이 남겼던 봉서(封書)를 생각해낸다. 개봉한 봉서에 쓰인 글은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질렀다.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화석정의 불 덕분에 선조는 무사히 강을 건넜다는 것이다.

"새벽에 서울을 떠나다 & 저녁에 임진강 나루에 닿아 배에 오르다
새벽에 상(上,임금)이 인정전에 나오니 백관들과 인마(人馬)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

상과 동궁은 말을 타고 중전 등은 뚜껑있는 교자를 탔었는데 홍제원(洪濟院)에 이르러 비가 심해지자 숙의(淑儀) 이하는 교자를

버리고 말을 탔다. 궁인(宮人)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걸어서 따라갔으며 종친과 호종하는 문무관은 그 수가 1백 명도 되지 않았다.

점심을 벽제관(碧蹄館)에서 먹는데 왕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으나 동궁은 반찬도 없었다. 병조 판서 김응남이 흙탕물 속을

분주히 뛰어다녔으나 여전히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고, 경기 관찰사 권징은 무릎을 끼고 앉아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녁에 임진나루에 닿아 배에 올랐다. 상이 시신(侍臣)들을 보고 엎드려 통곡하니 좌우가 눈물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밤은 칠흙같이 어두운데 한 개의 등촉(燈燭)도 없었다. 밤이 깊은 후에 겨우 동파(東坡)까지 닿았다. 상(上)이 배를 가라앉히고 나루를

끊고 가까운 곳의 인가(人家)도 철거시키도록 명했다. 이는 적병이 그것을 뗏목으로 이용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백관들은 굶주리고 지쳐 촌가(村家)에 흩어져 잤는데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이 반이 넘었다."

-<선조실록> 선조 26권, 25년(1592년) 4월 30일(기미)-

 

이와는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그 당시 임금을 모시고 가던 서애 유 성룡이 쓴 <징비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돈의문을 지나 사현(沙峴)에 다다르니 동녘 하늘이 겨우 밝아오고 있었다. 머리를 돌려 성중을 바라보니 남대문 안 큰 창고에 불이 일어나서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뻗쳤다. 이때 왜적은 아직 서울에 침입하지 않았을 때이니 불은 난민들의 소행일 것이다. 사현을 넘어 석교(石橋)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경기 감사 권징이 달려왔다. 벽제역에 도착하니

빗줄기가 커져서 일행의 옷이 모두 젖었다. 이에 임금은 할 수 없이 역에 들러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을 떠나니 이때부터 전송 나왔던 중관(衆官)이 성으로 되돌아가는 자가 많았다. 시종과 대간까지도 뒤떨어지고 오지 않는 자가 많아졌다.

혜음령(惠陰嶺)을 지나자 비는 점점 세차게 퍼부었다. 궁인들은 약한 말 뒤에서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따라가고 있었다.
마산역(馬山驛)을 지날 때 밭에서 일하던 한 사람이 이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나랏님이 우리를 버리고 가니 이제

누구를 믿고 산단 말이냐”라고 하였다. 임진강에 이르도록 비는 멎지 않았다. 이때 임금은 배 안에서 수상 유성룡과

나졸을 불러 보셨다. 강을 건너니 이미 황혼이 지나 길을 찾기가 몹시 힘들었다.임진강 남쪽 기슭에 승청(丞廳)이 있었다. 적이 나무를 베어다가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너올까 두려워서 재목에 불을 놓았더니 불빛이 강북을 비춰 길을 찾는데 도움을 주었다. 초경이 되어서 동파역(東坡驛)에 이르렀다.

그리고 또 선조 수정실록 등 여러 기록에도 똑같은 기사들이 적혀 있다. 불을 태운 것은 화석정이 아니고 나룻가에 있던 옛 승청이었던 것이다. 지형 상으로도 동파(東坡)로 건너가는 임진강 나루터와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과는 서로 떨어져 있어 상관없는 곳이다.

 

정자 옆 강가에 그가 8살 때 지었다고 하는 시비(詩碑)가 있다.그 시를 아래에 옮긴다.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어드니
林亭秋已晩
시인의 샘솟는 시상(詩想)은 끝이 없도다
騷客意無窮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遠水連天碧
서리 맞은 단풍은 해를 향해 더욱 붉도다
霜楓向日紅
산은 외로운 보름달을 토해놓고(산 위로 둥그런 달은 떠오르고)
山吐孤輪月
강은 만 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다
江含萬里風
변방의 기러기여 어디로 날아가는가?
塞鴻何處去
울고 가는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聲斷暮雲中
  이게 정말 8살 짜리가 지은 시일까요? 율곡이 과거에 9번이나 장원급제한(九度壯元) 천재였다.
천재 소년이기에 이런 시를 지을 수 있었지 않았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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