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한강수요강좌

조선시대 한강의 역사와 문화 - 수상교통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4.04.13|조회수646 목록 댓글 3

한강역사 수요강좌 - 한강 선유도공원 선유도 이야기홀 강의실 2014년 4월 23일

강사 : 박 경 룡 (문학박사 / 서울역사문화포럼 회장)

 

(1) 한강의 사회문화적 가치

(2) 역사적으로 살펴 본 한강

(3) 수상교통

1) 조운(漕運)제도

2) 조운의 관리와 운영

3) 조운선(漕運船)

 

조선시대 한강의 역사와 문화 - 수상교통

 

(1) 한강의 사회문화적 가치

 

삼천리 금수강산(錦繡江山)이란 표현대로 한반도에는 수많은 강과 산이 어우러져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한강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 자연(自然)으로서의 한강은 우리 생명의 원천이요, 역사로서의 한강은 한민족의 기쁨과 슬픔을 담고 영원히 흐르고 있음이요, 문화로서의 한강은 한민족이 영화로울 수 있는 이상의 은총임에 틀림없다.

 

가노라 삼각산아 / 다시보자 ˙한강수야 /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 세월이 하 수상하니 / 올동말동 하여라.

 

이 시조는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 목숨을 걸고 청나라에 항거한 김상헌(金尙憲)이 볼모로 심양에 잡혀갈 때 눈물로 지은 시조이다. 주지하다시피 여기서의 한강은 단순히 서울의 한강이 아니고 조국의 고국산천을 일컫는 한강이다. 국토의 심장부를 흐르고 있는 한강은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한민족의 영욕(榮辱)과 애환을 함께 나누어 온 강이자, 민족사의 힘찬 숨결을 담고 있는 강이다.

‘나일강이 없는 고대 이집트문명을 생각할 수 없듯이 한강이 없는 한국문명은 생각할 수 없다.’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이라고 하겠지만, 한강을 빼놓고 한국의 역사를 어떻게 거론할 수 있으며, 한강이 없는 수도권은 얼마나 삭막할까. 하루 평균 1,000여만 명에 이르는 한강 다리를 건너거나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한강의 사회문화적 가치를 새삼스럽게 열거해 본다.

 

첫째, 한강은 인체의 혈맥(血脈)과 같다. 한강이 아니었던들 태조 이성계가 어찌 한양을 도읍지로 정했을까? 한강은 수도권의 젖줄이고, 한반도 중앙지대에 위치하여, 논밭에 물을 대주는 관개(灌漑)의 물줄이며, 배가 오가던 물길이다. 그리고 그 유역에 펼쳐진 분지와 평야는 농업․어업 등 산업의 마당이 되어, 남한강계의 충주시․여주․원주시, 북한강계의 춘천시 등이 상류지대에서 그 지역마다의 경제 사회문화를 이끌어 온 도시로 성장하면서, 오늘날까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한강은 고대부터 중부 내륙의 곡물 · 철 ·재목 등이 수송되어 강변 도시와 연결하는 수운(水運) 역할을 하였고, 조선시대에는 한강을 이용하여 각 지방에서 세곡(稅穀)이나 생활필수품을 한양으로 운반하였다. 또한 삼남지방의 농산물과 황해안의 수산물이 조운선(漕運船)에 실리어 한강 하류로부터 서강 · 마포 · 용산에 부려졌고, 강원도 산간지방의 임산물이 뗏목이나 배에 실려 뚝섬 · 노량진 등에 짐을 풀었다.

고려말과 조선초에는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영남지방의 세곡 운송이 위협을 받자 낙동강을 이용하여 세곡을 운송하고, 새재[鳥嶺]를 넘어서 남한강으로 연결되었다. 이 수로는 17세기 후반에 수송이 더욱 늘어났고, 경상 · 강원 · 충북지방의 세곡은 뱃길로 한강변에 지어놓은 조창(漕倉)에 부려졌다. 한강의 뱃길은 남한강에 청풍의 황강, 충주의 금천, 목계, 원주의 흥원창(興原倉), 여주에 이르고, 북한강으로는 춘천의 우두(牛頭)와 낭천(浪川)의 원암(元巖), 임진강으로는 연천의 징파도(澄波渡)까지 통하였다

또한 한강은 해운(海運)의 중심이었다. 전국 해안의 포구와 한강변의 포구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황해 · 충청 · 전라도의 세곡은 해선(海船)으로 운반한 다음 서울 한강변의 광흥창과 풍저창에 부려졌다.

 

둘째, 한강변은 최적(最適)의 주거지이다. 한강 유역은 낙동강, 대동강과 함께 선사인들이 생활하던 터전이었다. 한강 유역에서는 1 만년 전 구석기인들의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는 외에 암사동에서 경기도 하남시 미사동지역에 걸친 선사시대 주거지는 단일 취락유적으로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유적으로 손꼽히는 곳이며, 이곳에서 많은 신석기 유물이 발굴되었다.

지금부터 1,600년 전 3국시대에는 한강을 서로 점유하기 위하여 250여 년간 공방전을 벌였다. 우선 백제가 위례성에 도읍하여 450년간 한강유역을 장악하였다가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의하여 상실하고 말았다. 나제동맹(羅濟同盟)을 맺은 백제는 77년 만에 한강유역을 되찾았지만 2년 뒤에는 신라에 의하여 빼앗기고 말았다. 그 뒤에도 고구려 · 백제는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하여 혈전을 벌였다. 삼국이 한강 하류지역을 차지하려고 오랫동안 싸움을 벌였던 것은 전략적 요충 지역인 한강을 차지하면 한반도 전역을 지배하기에 용이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왕조도 한강유역을 확보한 다음에야 후삼국을 통일하였고, 개국 이래 한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삼남내륙의 세곡을 확보함으로써 400년 왕조를 지탱하였다. 14세기말 한양을 수도 서울로 삼은 조선왕조는, 이곳의 뛰어난 지정학적(地政學的) 이점을 활용하여 500년 왕조의 번영을 누렸다.

광복 후 서울은 인구 1,100만 명을 포용하는 세계의 대도시로 발전을 거듭하고, 수도권은 2,000여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동안 한국이 이룩한 고속 경제성장을, 세계는 놀라운 이목으로 바라보면서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이전까지도 입을 모아 ‘한강의 기적’이라며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듯 한강은 우리나라 번영의 상징이 되었다.

 

셋째, 한강은 민족문화 형성의 터전이었다. 강남구 원지동 일대에 널렸던 남방식 고인돌과 강화도 부근리에 있는 북방식 고인돌이 일찍이 한강변에서 병존한 사실이라든지, 한강유역에서 남방계 토기와 북방계 토기들이 뒤섞여서 출토한 사실들은, 한강이 남과 북을 양분하는 지리적 위상이면서도, 한강유역에서 남방문화와 북방문화가 서로 융화하면서 우리의 민족문화를 형성, 승화(昇華)시킨 중심무대였음을 일깨워 준다. 한성백제 450 년 동안, 백제문화는 일본열도 문화 형성의 모태(母胎)가 되었으며, 중국대륙의 동진(東晋)과 국교를 맺고, 한동안 산동반도 등 중국 동해안에 식민지도 개척하였다.

한국의 문학은 대부분 한강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역사적 고비가 있을 때마다 한강은 시(詩)로 남겨져 왔고, 한강을 끼고 펼쳐지는 풍광(風光)의 아름다움을 시인들은 노래하였으며, 뱃길이 통했을 때 만남과 헤어짐의 시가 여기서 쏟아져 나왔다.

 

넷째, 수려한 경관(景觀)으로 정서함양과 휴식공간의 기능을 들 수 있다. 수도권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휴식 공간 가운데 하나가 한강이고, 대표적 경관자원이다. 산과 물이 어우러진 한강은 자연경관이 아름다웠으므로 예로부터 시인들이 예찬하는 곳이었다. 조선초에 서울의 경치 좋은 10 곳을 일컬어 ‘경도십영(京都十詠)’이라 하였는데, 그중의 네 곳은 한남동의 제천정 · 양화진 · 마포 · 응봉동의 입석포 등 한강변이었다.

일찍이 한강 하류에는 낙천정 · 천일정 · 제천정 · 압구정 · 효사정 · 용양봉저정 · 망원정 등 수십개의 정자가 세워졌고, 여름철이면 피서를 위한 물놀이와 뱃놀이가 벌어졌으며, 낚시꾼과 어부들은 풍부한 물고기를 낚아 올렸다.

선조들이 대대로 살아온 한강유역의 기름진 땅 ― 우리 세대는 이 긴긴 물길, 이 기름진 옥토를, 대자연과 더불어 살아 숨 쉬게 하여야 한다. 한강은 한민족의 정신사를 살찌게 하고, 수도권 시민의 생활을 품에 안아주는 강인만큼, 한강을 보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우리들의 의무로 되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조선시대의 한강은 한양 남쪽을 수어할 수 있는 천연의 요새였으므로 한강진 · 노량진 · 양화진 · 송파진에 각각 군사를 주둔시켜 외적 침입이나 범죄인들의 출입에 대비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신립(申砬)장군이 충주에서 패배하자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한양을 포기하고 의주로 피신하였다. 천혜의 한강 저항선을 포기한 조선군은 패배를 거듭하며, 압록강까지 밀려났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열을 수습한 조선군은 한강변을 공략하여 왜군의 보급로와 돌아갈 길을 끊고,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권율(權慄)장군의 행주대첩이다.

조선말에 한강은 서양열강과 부딪치는 첫 접촉점이었다. 고종 초의 천주교 박해로 고종 3년(1866) 프랑스 군함이 한강을 거슬러 오다가 강화도를 침범한 병인양요가 일어나고, 1871년에는 미국에 의하여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그 뒤 운요호사건으로 마침내 1876년 개항을 한 조선에는 개화의 물결이 밀려 들어왔다. 1890년경부터는 일본인과 중국인이 용산·마포 일대에 거주하면서 양곡상·목재상 등을 운영하였고, 1888년에는 한강에 증기선이 취항하였다.

1900년에는 서울에 전차와 철도가 놓였으며, 한강에 철교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한강변에 몰려든 이러한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끝내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로 되면서, 한강은 다시금 비운의 역사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한강은 우리 역사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면에서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한강은 21세기를 맞아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한강으로 변화해야 할 것이다. 2천만 명에 달하는 수도권 시민들의 상수원으로서의 한강, 민족의 삶의 꽃을 피우고 문화의 뿌리를 내리는 젖줄 같은 한강으로서 그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한강유역의 전통적 문화유적의 보존과 함께 주민의 생활수준과 소득 향상에 기여하는 강이 되어야 한다.

 

(2) 역사적으로 살펴 본 한강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강은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양수리에서 합류하여 서울을 거쳐 황해로 들어가는 514Km의 큰 강이다. 한강의 길이는 한반도에서 네 번째로 길지만 유역은 압록강에 이어 두 번째로 넓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한강을 낀 한양이야말로 풍수지리설상 명당이자 민족 통합의 요충지로 판단하여 도읍하게 되었다. 17세기에 이르러 서울의 인구증가로 인해 경강변의 상업이 활발해진데다가 이 시기에 대동법의 확대, 시행으로 미곡, 베 등의 상품이 반입되는 외에 농업, 수공업의 상품 생산이 증가됨으로써 서울의 상업도시화는 촉진되었다.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은 서강에 몰려있는 선박을 보고 ‘서강조박(西江漕泊)’이라고 노래하였는데 이를 소개하면

 

사방에서 배들이 서강으로 몰려들어 우뚝 솟은 큰 배에서 1 만 섬의 곡식을 풀어 놓네. 보라 저 많은 창고에 붉게 썩는 쌀을, 정치 잘하는 일은 백성들이 먹을 양식이 넉넉한데 있느니.

 

라고 하였다.

조선말까지 서강에는 국가의 곡식을 쌓아두는 광흥창이 있었는데 조선초에 곡식이 붉게 변질되도록 보관할 정도라고 하였으니 그 당시 식량 비축이 충분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나루터에는 전국에서 올라오는 세곡·소작료·생필품 등이 쌓였다. 이처럼 한강변에 물자의 출납이 활발해지자 많은 상인들이 몰려들었고, 운수업과 상업 등에서 자본이 모아졌다. 특히, 18세기 후반에는 경강상인(京江商人)이란 민간상인층이 크게 늘어나 용산·마포·서강·동작·서빙고·송파·뚝섬 등지를 중심 무대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난전(亂廛)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시전(市廛)의 상인들과 대항하다가 ‘신해통공(辛亥通共)’ 이후에는 서울의 상권을 장악하였다.

이들 경강상인들은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하여 상품을 매점하고 가격을 조장하였으므로, 한양에서는 수시로 쌀값이 크게 올라 소란이 일어나곤 하였다. 이들은 미곡 이외에도 한강 상류로부터 운반된 땔감과 재목 등을 공급하였고, 30여 개의 얼음창고[氷庫]를 갖고 있으면서 얼음을 공급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한강변의 상업이 번성함에 따라 강변 곳곳에 상업도시가 발달하게 되었는데, 용산·서강·마포항의 규모가 가장 컸다.

 

동빙고·서빙고는 얼음을 파는 업종이 성행하였으며, 두모포(豆毛浦:옥수동)·뚝섬은 목재와 땔감의 집산지였다. 강남 쪽에서는 송파가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미곡·목재·토산품 등의 집산지로서 유명하였다.

나룻배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관선(官船)과 개인이 운영하는 사선(私船)이 있어서 여행자들을 건네주었다. 나루터에는 종9품의 도승(渡丞)이 배치되어 있어서 관리하였다. 한강에 다리가 놓이면서 나루터는 그 구실을 못하게 되어 뚝섬 · 두모포 · 노량진 등의 이름만 남아있다.

그러나 한강은 치수(治水)정책을 게을리 하면 생명과 재산을 송두리 채 빼앗아가는 홍수를 몰고 오곤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25년 을축년 대홍수이다. 이 당시 모두 752mm의 강우량을 나타내어 한강대교의 수위가 12.26m에 이르렀으므로 뚝섬 · 여의도 등의 섬은 완전히 물에 잠기고, 용산 · 원효로 · 마포 등의 수해는 막심하였다.

 

(3) 수상교통

 

1) 조운(漕運)제도

조선왕조는 국가재정을 위하여 각 지역의 군현에서 조세로 징수한 미곡이나 포목 등을 선박으로 운송하기 위해 조운제도를 시행하였다. 조운이란 현물로 거두어들인 각 지방의 조세를 선박으로 서울까지 운반하던 제도인데 대체로 조운이 세곡 등 공공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운송인데 비하여 수운은 공적(公的)인 수요 외에도 사적(私的)인 수요 충족을 포함한 운송을 일컫는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육상교통은 도로망이 갖춰지지 않고, 운송수단의 제약 등의 요인으로 크게 발전하지 못하고, 수운과 해운에 의존해 왔다. 또한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에서 지방 물자를 중앙에 조달하는 일이 불가피했으므로 조운의 비중은 그만큼 컸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지방의 세곡을 수송하기 위하여 강변에는 수운창(水運倉), 해변에는 해운창(海運倉)을 설치하여 세곡을 모으고, 선박을 항상 대기 시켜 매년 일정 기간을 정하여 중앙의 경창(京倉)에 수송하였다. 또한, 조운에는 출발지점·기항·도착지점이 각각 있어 이 세 지점을 연결하는 선이 조운 항로이며, 출발지와 도착지에 있는 창고가 조창(漕倉) 또는 수참(水站)이다.

 

세종 때 경기감사 유사눌(柳思訥)은 조운의 편리함에 대해서 선박을 이용하는 것은 육지에서 운수하는 것보다 갑절이나 편리한 것은, 노력은 적게 들고 성과를 거두는 것이 많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지리적 조건과 교통기관이 발달하지 못한 조선 초에 하천을 이용한 운송의 편리함을 강조한 것이다.

조선왕조는 건국 후에 왜구의 침입 등으로 파괴된 창고를 보수하고, 증설하여 조운활동을 빠른 시일 내에 정상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리고 조창을 관리하기 위해 해운판관(海運判官)·수참판관(水站判官) 등을 두어 각 조창에서의 조세 수납과 반출을 감독, 관리하게 하고, 그 아래 서기(書記) 이하 몇 명을 두어 창고 행정을 맡겼다. 그리고 3년~5 년 또는 10 년마다 각각 이를 감독하는 감독관이 재고 조사를 하여 그 부정 여부를 검사하였고, 보관한 세곡의 보존처리가 잘 되는 지를 조사하였다.

조선시대의 한강은 경기도와 경상도·강원도·충청도의 조세로 징수한 미곡·포목 등을 용산 강변의 강창(江倉)으로, 한강 하류로부터는 북으로 황해도, 남으로 충청도·전라도의 조운선이 모여들어 서강(西江) 연안의 강창에 모아졌다.

한강은 전국의 세곡 뿐 만 아니라 서울 지주층(地主層)이 각 지방에서 거두어들인 소작료(小作料)도 대부분 한강을 이용하여 운반하는 외에 수도권 사람들의 생활필수품인 미곡·땔나무·어염·수공업 제품·광물 등도 이 강을 통하여 공급되었다.

한강은 수운 교통이 편리한 반면에 육상교통에 있어서는 큰 장애물이었다. 한성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뻗어 있는 간선도로는 9 개였는데, 그 중 6 개의 도로가 한강을 건너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 시대에는 강변 곳곳에 나루터인 진(津) · 도(渡)를 설치하여 건널 수 있게 하였으며, 국왕이 강을 건널 때에는 배다리[舟橋]를 가설하기도 하였다.

조운제도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조선 초부터 국가 관리 하에 대규모의 조선(造船)작업이 이루어졌다. 조선 초 태종 때 많은 조운선이 건조되었으나 잇따른 해난사고로 피해가 극심하여 세종 때는 관선(官船) 대신에 사선(私船)을 이용하여 조운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해난(海難)사고는 완전히 극복될 수 없었다.

따라서 세조 때는 관선으로 조운하도록 하였고, 아울러 각 조창에서 갖추어야 할 조운선 수를 법으로 정하는 한편, 수리 연한과 조운선 관리규정을 정하여 비로소 조운제도가 정립되었다.

조운을 실제 담당해야 할 선원은 사공(沙工)과 격군(格軍)으로 구별하여, 사공은 선장, 격군은 선원에 해당되고, 특히 수운에 속한 선원은 수부(水夫)라고 하였다. 이들은 대를 이어 종사하는 직종으로, 본래 신분은 양민이나 누구나 기피하는 천민이 종사하는 계층이었다.

 

조선 초 관선 중심의 조운체제는 15세기 말의 사회적·경제적 변화와 함께 점차 동요하게 되었다. 즉, 부역 대신 베[布]를 바치는 제도의 성행으로 인한 문란은 힘든 선원들이 조운 역(役)을 기피현상을 가져왔고, 또 기술자 관리제도가 무너지면서 선박 건조가 어렵게 되었다.

또한 상업활동과 연안어업의 꾸준한 성장 속에서 사선(私船) 소유자를 중심으로 사선활동이 활발하자 국가에서는 조운의 운영을 점차 사선에 의존하게 되었다. 특히, 사선은 관선에 비해 기능이 우수하였고, 또 정부의 입장에서는 선원의 확보, 조운선을 짓는 문제에 대해 간섭할 필요가 없어 유리하였다.

이런 가운데 조운제도를 계속 추진하려고 부족한 조운선은 병선(兵船)으로 충당하기도 하고, 해난사고를 줄이기 위하여 세곡을 다른 곳으로 바치게 하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조선 전기의 관선 중심 조운체제는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 그 기능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되었다. 특히 17세기 대동법의 실시로 조운 물량이 증가되자 기존의 조운시설로는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즉, 지토선(地土船)·경강사선(京江私船)·주교선(舟橋船)·훈국선(訓局船) 등을 이용하여 운반하는 방법이었다.

그 뒤 조세를 화폐로 내는 제도가 일반화되면서 세곡 운송이 불필요하게 되어 조운제도는 서서히 폐지되었다.

2) 조운의 관리와 운영

한강은 세곡을 경창(京倉)에 바치기 위한 조운로(漕運路)이기도 하였지만 북한강 상류지역으로 소금의 운송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예로 세조 6년(1461)에 경기․강원의 빈민을 구제할 소금을 병선으로 조운케 한 적도 있으며, 세조 8년(1463)에도 영서(嶺西)지방의 소금이 귀하자 관선으로 소금을 북한강 상류지역으로 운송되었다.

조선 초부터 한강을 운항하는 조운선의 침몰을 막고, 수로 관리를 위해 태조 4년(1395) 용산강에서 충주의 금천(金遷)에 이르는 한강연안에 수참 7 개소를 설치하였다. 한강 하류는 우수참(右水站), 한강 상류는 좌수참(左水站)이 담당하였는데, 각 수참은 조운선의 안전을 위해 안내와 경호를 맡아 관할구역 내의 모래가 쌓임으로써 수심이 얕아져 물길이 막히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뱃길은 보통 폭 10~15m, 깊이 약 3m 정도로 팠다.

배가 다닐 수 있는 한강의 물길은 남·북한강의 본류와 지류를 합쳐 330km로 알려져 있다. 북한강은 소양강창(昭陽江倉)에서 조운선이 출발하여 춘천, 가평을 거쳐 양수리에 이르고, 남한강은 충주의 가흥창에서 조운선이 떠나면 적암(赤岩)을 지나 남한강과 합류되는 원주의 섬강(蟾江)하구에 이르러 흥원창의 조운선과 합류하고, 여주의 여강(驪江)→ 천녕(川寧)의 이포(梨浦)→ 양근(楊根)의 대탄(大灘)→ 사포(蛇浦)를 경유하여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하여 두미진(斗迷津)→ 미음진(渼音津)→ 광나루→ 송파→ 동재기→ 노량진→ 용산의 경창에 이르렀다.

 

3) 조운선(漕運船)

조선초 세종 때에 한강에서 운행하는 세곡선(稅穀船)에 실을 수 있는 곡식의 양을 알아보면 가장 큰 배는 250 석을, 중간 배는 200 석을, 작은 배는 130 석을 실을 수 있었다.

특히 해운으로 세곡을 운반하다가 배가 깨어지고 사람이 익사하였으므로 태종 3년(1403) 6월, 의정부에서 모여 경상도의 조세를 육로로 운반할 것인지, 수로로 운반할 것인지의 가부를 의논한 결과 육로로 운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경상도지역의 조세를 육로를 이용하여 새재[鳥嶺]의 험준한 고개를 넘어 충주까지 운송하게 하여 태종 11년(1411) 남한강변 금천(金遷)에 창고를 지어 보관하였다가 충주부터 수운을 이용하여 서울 경창으로 운송하도록 하였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박선애 | 작성시간 14.04.14 알찬내용잘봐습니다
  • 작성자김민영 | 작성시간 14.04.17 좋은 자료 감사 합니다.
    그런데 귀찮으시겠지만 참고 할 수 있도록 자료 출처도 밝혀 주셨으면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조영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4.17 이 글은 23일 강사 박경룡박사의 강의안으로 미리 회원들이 볼 수 있도록 올려놓은 것입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