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작구 상도 4동 산 65-42에 있는 조선조 3대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과
부인인 수성부부인(隨城府夫人) 광산김씨(光山金氏)의 묘와 이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인 양녕대군이제묘역
(讓寧大君 李禔 墓域) 지덕사(至德祠) 전경이다.
양녕대군 묘역의 정문 양명문(讓名門)이다. 양명(讓名)이란 이름은 조선조 22대왕인 정조대왕이 하사한
어제지덕사(御製至德祠)중 사양(辭讓)하는 덕(德)이 가장 지고(至高)의 덕이라는 내용에서 따온 것이다.
지덕사(至德祠)다. 지덕(至德)이란 말은 공자가 논어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에게 내린 찬사 중에서 최고의 찬사였다.
양녕대군 이제가 동생 충녕군 이도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을 두고 후세의 뜻있는 선비들은 그의 큰 덕(至德)이 중국
전국시대 주(周)나라의 태백(泰伯)에 못지 않다하여 '동방의 태백'이라 칭송하였다.
양녕대군과 부인 수성부부인광산김씨 안장된 묘역이다. 양녕대군이 돌아가시자 국사봉(國思峰)아래 곤좌(坤坐)에 안장된다.
양녕대군의 유언(遺言)에 따라 대군의 묘역은 작은 비석 하나 세우지 않은채 오다가 20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처음으로 묘비를
세웠다. 이 비석마져 1910년 경술국치 전야에 까닭없이 부러져 1915년에 다시 작은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85년이 지난 2001년에
1차로 봉분을 높이고 잔디를 입히고 목책을 둘렀으며 2004년에 성역화 사업으로 담장을 높이 쌓고 정문인 양명문(讓名門)과
재실인 도광재(韜光齋)를 새로 지었으며 묘비도 대군의 위상에 걸맞게 다시 세우고 망주석도 세웠다.
커다란 봉분과 문인석 등이 양녕대군의 위엄을 느끼게 한다.
그의 묘소는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여 전체 묘역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양녕은 세자 자리도 제왕의 지위도 포기하면서 풍류를 즐기며 6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태종 이방원의 장남. 이름은 제, 자는 후백.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 세종의 맏형.
그는 1404년 세자로 책봉됐으나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여 1418년 폐위되어 양녕대군으로 봉해지고
아우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됐다. 이때부터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 풍류객들과 사귀며 일생을 마쳤고
세종과 우애가 지극했다….’ 한마디로 품행이 방정하지 못했던 인간이다. 그의 세간의 인물평이다.
1996년 11월 24일부터 1998년 5월 31일까지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양녕의 역을 맡았던
배우 이민우는 양녕대군에 대한 세간에 평과는 다르다며 그를 변호했던 말이 떠오른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양녕이 여자와 술만 무조건 밝혔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시대가 뒷받침을 못해준,
그래서 쓸쓸히 생을 접어야 했던 사람입니다. ‘양녕(讓寧)’ 이라는 군호도 ‘자연 속에서 편안히 살려고 한 사람’
이라는 뜻이래요. 연기를 하면서 시대의 큰 그릇이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너무 큰 인물인 것같아 연기에
부담을 느낄 정도입니다.”
주산에서 달려오는 맥세의 흐름이 아주 힘차다. 불끈 솟아 오른 잉(孕)도 제법 실한 게 명당임을 말해 준다.
사초지 강(岡)은 조선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묘제다. 양녕대군 이제의 묘도 제법 실한 사초지 강(岡)을 자랑하고있다.
도광재(韜光齋)는 양녕대군의 재실이다.
도광(韜光)이라는 말은 재능이나 학식을 감추어 남에게 드러나지 않게 함을 의미하는 글이다.
양녕대군이 세자자리를 동생 세종에게 물려주기 위해 뛰어난 재능을 감추고
술과 사냥 등을 즐기며 스스로 세자 자리를 사양한 지극한 덕을 의미한다.
지덕사(至德祠)는 양녕대군과 부인 광산김씨 내외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다.
사당 안에는 양녕대군과 부인 광산 김씨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양녕대군의 친필인 숭례문 현판의 탁본과
정조가 지은 지덕사기, 허목이 지은 지덕사기 등이 있다.
이곳에는 중앙에 본 사당과 좌측의 서고, 제기고, 우측에 4대 봉사손 신위가 봉안된 3동의 건물로,
본당 내에는 양녕대군의 친필로 전해지는 후적벽부 팔곡병 목각판, 숭례문 현판 탁본과 정조(1776∼1800)가
친히 지은 금자 현액의 지덕사기와 숙종조 명재상 허목의 지덕사기, 봉사손 지광의 정서 지덕사적 등
귀중한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지덕사 편액은 정조 13년(서기 1789)에 하사 되었고 글씨는 왕명을 받은 지중추부사 윤동섬이 쓴 것이다.
양녕대군이 쓴 숭례문(崇禮門)의 현판 글씨다.
이 글씨는 지금 남대문에 걸려있는 “숭례문(崇禮門)” 현판을 글자체와 글자크기를 그대로 오석(烏石)에 옮겨 새긴 것이다.
이 현판의 글씨는 양녕대군이 쓰신 것으로 우리나라 서예사(書藝史)에 빼어난 명필로 회자(膾炙)되고 있다.
숭례문은 한양도성의 4대문 중 사실상 정문(正門)이다.
양녕대군이 이 문의 현판을 썼다는 것은 당시에 이미 대군의 글씨가 명필로 널리 알려졌음을 말해준다.
필체의 강하고 굳셈은 문무에 두루 능하였던 대군의 웅위(雄偉)한 인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임진왜란때 유실된다.
광해군때 청파동 배다리 밑 도랑에서 밤마다 서광이 비치는 것을 이상히 여겨 파보니 현판이 거기 묻혀 있었다고 한다.
이 시비는 양녕대군의 16대손인 이승만 전대통령의 후손에게 주는 교훈의 시다.
이 짧은 시에는 민족 사랑과 조상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인륜과 사회정의에 대한 깊은 관심과 철학이 담겨 있다.
만가지로 나뉘어져도 뿌리는 한가지(萬枝同根)
여러갈래로 나뉘어도 근원은 하나일세(百派一源)
조상을 받들고 종묘를 높히어서(尊祖崇宗)
친척간은 사랑하고 가족간에 화목하여(愛親睦族)
노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며(敬老慈幼)
나쁜것을 물리치고 바른것을 보호하여(斥邪護正)
한결같이 이뜻을 따라(意循此)
길이 길이 변함없게(永無或替)
양녕대군이 쓴 초서체(草書體) 후적벽부(後赤壁賦)다.
이 글씨는 양녕대군이 중국의 문호 소동파의 명작인 후적벽부(後赤壁賦)를 초서체로 쓴 작품이다.
이 양녕대군의 친필은 원래 목판(木板)에 새겨진 것으로 사당인 지덕사에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게 돌에 원형을 그대로 옮겨 새긴 것이다. 예부터 초서는 서예의 꽃이라 할 만큼
제대로 쓰는 사람이 흔치 않았다. 이 작품은 초서체 작품의 진수를 보여주는 걸작중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양녕대군 이제는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이 작품은 그의 시적(詩的)재능을 확인할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 중의 하나다.
아우인 충녕대군 이도에게 왕위를 사양하고 묘향산의 어느 암자에 묵었을 때, 스님의 간절한 청으로 썼다는 양녕대군의 시(詩)다.
고상하고 청아한 시어(詩語)와 함축미는 양녕의 뛰어난 시적 재능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한국역대 명시전서’ ‘동국시전’ 등에
소개되어 있다.
산허리에 걸린 노을은 아침 짓는 연기인가(山霞朝作飯)
넝쿨에 걸린 달은 밤 밝히는 등불이네(蘿月夜爲燈)
나 홀로 고적한 암자에서 자고나니(獨宿孤菴下)
탑 하나만 저만치 홀로 서있네(猶存塔一層)
양녕대군 이제의 묘역이 위치한 남쪽 산을 국사봉(國思峰) 또는 국사봉(國師峰)이라고 한다.
국사봉은 관악산의 지봉인 삼성산의 한 지맥이 북쪽으로 뻗어 솟아 오른봉우리로 봉천동과 상도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쪽으로는 국립묘지의 진산인 화장산의 지맥과 이어진다. 지덕사가 위치한 남쪽산을 국사봉이라 한다.
국사봉(國思峰),이 봉우리에 올라 나라를 생각했다는 곳이다.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 이야기다.
동생인 세종에게 왕의 자리를 양보한 양녕대군이 국사봉에 올라 나라와 동생을 생각했다고 전한다.
양녕대군은 왕세자로서 스스로 실덕을 저질러 폐세자가 되어 왕의 자리를 동생에게 물려준 뒤 대궐에서 쫓겨난다.
그렇지만 그는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하여 이 산에 올라 멀리 경복궁을 바라보며 나라와 세종의 일을 걱정했다고 한다.
국사봉(國師峰)이라고도 한다.
조선왕조 건국 당시 태조 이성계를 측근에서 보필한 무학대사와 관련해 국사봉(國師峰)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조선 시대에는 현재 상도3동 성대시장 부근에서 사자암이 있는 국사봉 북서쪽 비탈까지 이어지는 골짜기에 들어선
마을을 ‘성도화리’(成桃花里)라 일렀다.
옛날에 국사봉 북서쪽 기슭 아래 신씨 성을 가진 부잣집이 있었다.
어느 날 그 집에서 상을 당해서 좋은 묏자리를 찾아 땅을 팠는데 그곳에서 복숭아꽃이 나왔다.
그때부터 복숭아꽃이 나온 자리 인근을 아울러 성도화리라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성도화리에서 성도리, 성대리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복사꽃 때문에 성도화리라는 이름을 얻은 마을, 지금은 상도3동이다.
사자암은 국사봉 기슭에 있는 사찰로 1398년에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사자암 창건에 얽힌 이야기는 두 개다.
국사봉이 북쪽을 향해 달려가는 호랑이의 형국이다.무학대사가 풍수지리상으로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어서 그 기운을 누르기 위해 사자암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하나다. 다른 하나는 만리현(지금의 만리동)이 남쪽으로
달아나려는 호랑이의 형국을 하고있다. 무학대사가 국운에 좋은 호랑이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국사봉에
사자암을 지었다는 이야기다. 무학대사를 국사(國師)로 보고 그 산봉우리를 국사봉(國師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