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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영상기행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창경궁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20.03.18|조회수1,178 목록 댓글 0



창경궁(昌慶宮)은 창덕궁·덕수궁·경복궁·종묘와 함께 조선시대 5대 궁궐 중 하나이다.

세종은 1418년 즉위하고 나서 상왕인 태종이 편하게 지내도록 궁궐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세종은 새 궁궐을 지을 터를 찾았다. 옛 고려의 이궁 터인 현재의 창경궁 자리가 풍수지리상

명당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 명당길지에 태종을 위한 궁궐을 짓고 태종의 만수무강을 바란다는 뜻에서

수강궁(壽康宮)이라고 불렀다. 그 수강궁이 창경궁의 전신이다.

성종 때  세조의비 정희왕후, 덕종의비 소혜왕후, 예종의비 안순왕후 세 분 대비를 모시기에는 창덕궁이 비좁았다.

성종은 수강궁을 확장하고 보수하여 세 분의 대비를 함께 살도록 했다. 창경궁이라는 이름은 성종이 처음 사용한 것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같은 지형 흐름상에 놓여 있다.

매봉에서 뻗쳐 내려온 그 지형은 창덕궁과 청경궁 영역을 구분 짓는다.

창경궁을 지나는 맥세는 종묘로 이어져 있다.

같은 지형 흐름에 있는 창덕궁은 남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창경궁은 정전 명전전 등 주요 건물이 동향을 하고 있다.

그것은 동쪽으로 경사진 지형에 따른 것으로 해석한다.

일제강점기 창경궁과 종묘 사이에 도로(안국로)를 냈다.

그때 창경궁과 종묘로 연결되는 지형은 나뉘어져서 지형 흐름이 끊겼다.

조선의 궁궐은 세 대문을 거처야 왕을 만나도록 되어 있다.

경복궁은 광화문 홍예문 근정문 세 대문을 지나야 근정전에서 왕을 만난다.

창덕궁도 돈화문 진선문 인정문 이들 세 대문을 통과해서 인정전에서 왕을 볼 수 있다.

창경궁은 그렇지 않았다.

삼문(三門)이 아니라 두 개의 대문(二門)을 둔 창경궁이다.

창경궁은 홍화문 명정문 두 개의 대문을 지나면 바로 명정전이다.

그렇게 두 개의 문을 통과해서도 왕을 만날 수 있게 조성한 창경궁이다.

원래 동소문의 이름으로 사용되던 홍화문이다.

성종 때 창경궁의 정문을 홍화문으로 명명하면서 동소문의 이름은 혜화문으로 바뀐다.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비운의 창경궁이다.

그 공간을 거처간 인물의 슬픔이 진하게 배어나고 있다.

조선왕조 최대의 비극 사도세자의 죽음이다.

아버지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곳이 바로 창경궁이다.

소현세자와 그 가족들이 죽음을 당한 곳도 창경궁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임오군란 때 장호원으로 피신한 며느리 명성왕후의 국장을

선포하고  장례절차를 밟은 곳도 창경궁이다.

일제 때 창경궁의 전각은 헐리고 그 자리에는 동물원이 들어선다.

일제는 순종은 덕수궁으로 거처를 강제로 옮기게 한다.

당시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핑계로 창경궁의 전각을 허물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다.궁의 이름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개명 당한다.

그 일제는 창경원으로 낮추어 조선의 궁궐과 위엄을 짓밟았던 것이다.
아직도 그 창경원의 흔적은 남아있다.

원남동(苑南洞)이 그 아픈 흔적이다. '창경원 남쪽 마을' 원남동이다.

1980년 대 창경궁 제 이름을 찾았다.

이제 원남동도 궁남동이나 다른 이름으로 바꿔야할 때가 아닌가 한다.

사연이 많은 전각이다. 아픔과 슬픔이 진하게 묻어나는 곳이다.

서쪽 건물 집복헌(集福軒), 복을 모아 소복히 가둬두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 집복헌에서는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태어난다. 사도세자의 손자 순조가 태어난 곳이다.

집복헌 동쪽 옆 집은 영춘헌(迎春軒)이다. 봄을 맞이하는 집,영춘헌이다.

이 영춘헌에서는 사도세저의 아들 정조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영조 11년(1735)에 사도세자가 태어난다.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에서 사도세자가 탄생한 집복헌이다.

집복헌에서는 정조의 아들 순조가 탄생했다. 정조는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를 총애해 집복헌에 자주 출입했다.

그는 집복헌을 자주 찾으면서 바로 이웃한 영춘헌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이용하였다.

집복헌은 후궁의 처소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지붕은 높지 않다. 사대부의 가옥과는 달리 바깥 쪽으로

툇마루 등을 달아 내어 놓지 않았다.

원래 이곳 일대는 후궁들의 처소가 밀집된 곳이다. 집복헌도 후궁들의 처소였다.

사도세자의 생모 선희궁 영빈 이 씨의 처소 집복헌이다. 이 집복헌에서 사도세자는 태어난다.

영빈 이 씨는 왕비가 아니었기에 창덕궁의 중궁전인 대조전에서 해산하지 못하고 집복헌에서 해산한 것이다.

비록 후궁 소생이었지만 마흔이 다 된 나이에 아들을 본 영조는 너무나 기뻐했다. 7년 전에 큰아들 효장세자를 잃고

그 동안 아들을 보지 못하던 영조였다. 늦게 본 외아들이라 영조가 그 아기에게 거는 기대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태어나던 당일 원자에 책봉되었다.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 씨도 이곳에서 살았다. 순조도 할아버지 사도세자처럼 이곳에서 태어난다.

정조는 1800년(정조 24년)6월 28일 유시(오후 5~7시) 영춘헌에서 눈을 감았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조의 승하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날 유시에 상이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는데, 이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북한산)이 울었다.
앞서 양주와 장단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어느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거상도(居喪稻-상복을 입은 벼)이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대상이 났다."
김준혁 교수는 그의 책 <김준혁의 화성이야기>에서 정조의 임종 당시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때 정조의 치료기간 중 단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대비 정순왕후가 찾아왔다.

정조의 병이 과거 영조가 1766년 겪었던 증세와 비슷해 그때 복용했던 성향정기산(星香正氣散)을 '

복용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춘헌에 있던 모든 신하들을 내보내고 혼자 약을 들고 정조의

침전으로 들어갔다. 왕실 법도상 어떠한 경우에도 사관은 반드시 국왕 곁에 있어야 하는데도 정순왕후는

사관마저 전각 밖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잠시 후 정순왕후는 “전하가 승하하셨다”고 통곡하며 영춘헌

밖으로 뛰쳐나왔다. 승지 이만수가 급하게 정조의 침전으로 들어가니 정조는 무엇인가 급하게 소리를 지르는듯 했다.
정조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마지막으로 토한 말은 바로 '수정전(壽靜殿)' 세마디였다.
수정전은 바로 정순왕후의 거처였다. 정조는 혼미한 상태로 누워있는 동안 정순왕후가 자신에게 어떤 조처를

 취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정조는 정순왕후가 들어온 뒤 곧바로 숨을 거두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이다. 그는 병자호란을 속절없이 치른다.

그는 남한산성에서 45일간 농성만 하다 삼전도 모래벌판에서 오랑캐 청에게 '치욕의 항복'을 한다.

삼전도에서 돌아온 창경궁 양화당이다. 그는 이곳에서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을 경영한다.시원치 않았다.

심양으로 끌려간 소현세자를 의심한다. 소현세자는 10년만에 인질에서 풀려난다.

소현세자는 귀국 한 달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세자빈 강비는 왕에게 올리는 전복에 독을 탔다는 혐의로

사약을 받고 세상을 하직한다. '김귀인' '조귀인' 두 이름의 인조의 여인이 이 비극에 직간접으로 간여한다.

양화당 옆에는 대비들이 거처하던 통명전(通明殿)이다.

창경궁의 내전 환경전과 경춘전이다.
환경전은 성종이 창경궁 창건 때 지어진 건물로 임진왜란 여파로 소실됐다가 광해군 때 중건했다.
인조 초에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또 다시 화재 피해를 입었다가 인조 11년인 1633년에 인경궁 건물을 헐어다 중건했다.
순조 30년인 1830년 있었던 대화재로 또 한번 불에 탄 것을 3년 후에 다시 중건하는 등 사연이 많은 전각이다.
환경전에서는 11대 중종이 승하했다. 승하 직전까지 진료를 맡아던 의녀가 장금이다.
장금은 1515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출산을 맡았고, 1522년 중종 어머니 자순대비, 정현왕후의 병을 치료한 공으로
중종의 치료를 전담하게 됐다. 신료들은 의원이 아닌 일개 의녀를 주치의로 삼은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중종은 의관들보다 의녀 장금을 더욱 신뢰해 마지막까지 자신을 맡겼다.
인조의 며느리 세자빈 강비가 심양 인질 중 부친상을 당해 일시 귀국했다.
그러나 이곳 환경전에 머물다 문상도 못하고 심양으로 돌아간다. 조정은 강비의 문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명성왕후의 빈전이 설치된 곳이다.
명성왕후는 임오군란 때 장호원으로 피신한다.
시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즉각 국장을 선포한다.
환경전에 빈전을 마련하고 국장을 치렀다.
경춘전은 왕비, 왕세자빈, 또는 대비 처소로 쓰인 전각이다. 환경전 서쪽에 자리하고 동향이다.
이 전각에서는 정조와 헌종 두 임금이 태어났다. 인수대비로 알려진 소혜왕후와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 간 인현왕후,
그리고 정조의 어머니면서 한중록을 남긴 혜경궁 홍 씨가 돌아가신 장소다.
특히 한때 왕비 지위에 올랐다가 희빈으로 강등된 장 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짓고 여러 사람들을 불러 모아 왕후를 모해한다. 왕후 거처인 경춘전 주변과 통명전 일대에 온갖 흉물을 파묻어

왕후가 죽기를 저주했다. 결국 1701년 병을 얻은 인현왕후가 경춘전에서 명을 달리한다.

함인정(涵仁亭)이다.

함인(涵仁)이라는 말은 세상의 어짐과 의로움에 흠뻑 빠져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광해군이 건설한 인경궁에 있던 함인당을 옮겨 온 것으로 전해진다.

春水滿四澤 (東) 봄 물은 못마다 가득히 차고
夏雲多奇峰 (南) 여름 구름 묘한 봉우리 많기도 하다
秋月揚明輝 (西) 가을 달은 높이 떠 밝게 비취고
冬嶺秀孤松 (北) 겨울 고개 솔 한 그루 아름답구나

1762년(영조 38년) 윤5월 13일(양력 7월 4일).
조선왕조사의 가장 처참한 비극이 벌어진 역사의 현장 창경궁 문정전(文政殿)이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어가를 따라 휘령전으로 나아갔다. 휘령전은 세상을 떠날 때 절하는 곳이었다.
문정전은 영조의 정성왕후의 혼전(魂殿)인 휘령전(徽寧殿)으로 쓰이던 곳이다.
정성왕후는 사도세자의 법적인 어머니다.
영조가 휘령전의 용상에 앉았다. 세자는 월대아래 판위에서 네 번 절하는 예를 행했다.
영조는 칼끝을 두드리며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하라고 명하였다. 
"네가 자결하면 조선 세자의 이름을 잃지 않을것이니 자결하라"
영조는 전에서 내려와 섬돌 위에 앉아 말했다.
"내가 죽으면 3백년 종사가 망하고 네가 죽으면 3백년 종사는 보존 될것이니 네가 죽는 것이 옳다."
이말에 (사도)세자는 통곡했다.
세자는 말했다.
"전하께서 칼로 찌르신다해도 신은 칼끝에 놀라지 않을것입니다. 지금 죽기를 청합니다."
이어 세자는 허리띠를 풀어 목을 맸고 곧이어 땅에 쓰러졌다. 
모두가 (사도)세자를 구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세손(정조)이 들어왔다.

당시 세손의 나이는 만 10살이었다.
세손은 아버지 사도세자처럼 관과 도포를 벗고 세자뒤에 엎드렸다. 
"할바마마 아비를 살려주옵소서"
영조는 말했다.
"누가 세손을 데려왔는가? 빨리 데리고 나가라." 

신시(申時: 오후 3~5시)즈음에 내관이 들어와 말했다.
“소주방의 쌀 담는 궤를 내라 합니다.”
어쩐 말인고! 저들도 어찌할 줄 몰라 하며 궤를 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세손궁이 망극한 일이 있는 줄 알고 대문 안에 들어가 아뢰었다.
 “마마! 아비를 살려주소서!” “나가라!” 대조께서 엄히 말씀하셨다.
 할 수 없이 세손은 왕자 재실로 돌아가 앉아 있었다. 내 그때의 정경이야, 고금천지간에 없었다.

세손이 나가자, 하늘과 땅이 맞붙는 듯, 해와 달이 깜깜한 듯하니, 내가 어찌 잠시나마 세상에 머물 마음이 있었겠는가.
칼을 들어 목숨을 끊으려 하자 옆에 있던 사람이 빼앗아 뜻대로 못하였다.
다시 죽고자 하였지만 촌철이 없어 못하였다. 숭문당을 지나 휘령전으로 나아가는 건복문 밑으로 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다만 대조께서 칼을 두드리는 소리와 소조가 말씀하시는 소리만 들렸다.
 “아버님! 아버님! 잘못하였습니다. 이제는 아버님께서 하라 시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이리 마소서.”
내 간장은 마디마디 끊어지고 눈앞이 캄캄하니 가슴을 두드린들 어찌하겠는가.
당신의 용맹스러운 힘과 건장한 기운으로 아버님께서 “궤에 들어가라!”하신들 아무쪼록 들어가시지 말 것이지 어찌 들어가셨는가.
처음에는 뛰어나오려 하다가 이기지 못하여 그 지경에 이르니, 하늘이 어찌 이렇게 하셨는지. 만고에 없는 설움뿐이다.
내가 문 밑에서 목 놓아 슬피 울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소조는 벌써 폐위되었으니 처자인 내가 어찌 편안히 대궐에 있겠는가.」

-『한중록』 한중만록 3권-
결국,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히게 되었다.

자결을 명한 끝에 내린 뒤주 속으로 들어가라는 어명에 한 가닥 희망이 있었다.

'설마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겠는가?' 죽음은 면하게 되었다는 기대는 걸었다.


명정전 남쪽 궐내이다.

집복헌에서 태어난 사도세자가 어릴 때 머물던 저승전(儲承殿)이 있던 곳이다.

"나신 지 백일 만에 탄생하신 집복헌(창경궁 내)을 떠나 보모에게만 맡기시어,

오래 비어 있던 저승전(창경궁 내)이란 큰 전각으로 옮기게 하셨다."

영조는 아들을 조기에 교육시키고자 생후 100일 밖에 되지 않은 아기를 생모의 품에서 떼어내

동궁(東宮)인 저승전(儲承殿)으로 옮겼다. 본격적으로 교육시키기 위한 특별조치였다.

게다가 사도세자의 시중을 드는 궁녀들은 영빈 이 씨가 무수리 출신이라 시샘하고 무시했다.

이런 저런 눈치로 영빈 이 씨도 저승전을 찾는 발걸음이 뜸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도세자가 네다섯 살이 되면서 영조와 영빈 이 씨는 아예 저승전에 발길을 끊다시피 하고 말았다.

그때는 이미 부모와 생이별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선의왕후 어 씨는 경종의 왕비이다. 선의왕후를 모시던 궁녀들이 사도세자의 교육을 독점했다.

그들은 경종은 억울하게 죽었고 거기에는 영조와 관련되었다는 점을 사도세자에게 무단히 알렸다고 한다.

저승전에서의 '교육'이 사도세자의 비극의 씨앗이 된다.
경종과 어씨를 모셨던 궁녀들이 어린 사도세자를 모신 것이 사도세자 비극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갑신정변 때 고종을 따라 북관묘로 가던 홍영식과 박영교 등이 함춘원에서 출동한 청나라 군인에게

죽임을 당한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일제가 전각을 헐어내고 이 일대에 동물원을 만든다.

뒤주 안에서 죽어가는 사도세자의 처절한 모습을 지켜본 유일한 생명체 회화나무이다.

선인문 앞 회화나무는 줄기가 휘고 비틀린 모양을 하고 있다. 줄기 밑 안쪽은 썩어 없어졌다.

바깥 부분의 세 개의 줄기만 남아 마치 세 그루의 나무가 엉켜 있는 모습이다.

영조는 직접 뒤주에 못을 치고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채운 후 동아줄로 동여 맨다. 그 뒤주 위에는 풀섶 등으로 덮었다고 한다 영조는 뒤주를 문정전에서 선인문 앞으로 옮겼다.

“뜨거운 햇볕 아래 놓인 뒤주 속에서 사도세자는

괴롭고 힘들어 마구 비명을 질렀다고 해요.
문정전 앞뜰 가까이에 있는 300년 된 회화나무와

선인문 안쪽 금천(궁궐 앞으로 낸 물길) 옆으로
400년 된 회화나무 두 그루는 바로 사도세자의 비명을

듣고 자란 나무입니다.”

'설마 아들 사도세자를 부왕이 뒤주에서 죽게 하겠는가?'

결국 부왕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서 죽게한다.

선인문 앞의 400년된 회화 나무이다.

사도세자의 아픔을 기억하는 듯이 뒤틀린 모습을

하고 있다.
뜨거운 햇볕 아래 놓인 뒤주 속에서 사도세자는

괴롭고 힘들어 마구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을 듣고 자란 회화나무다.

영조는 화를 내며 큰 뒤주를 갖다 놓고는 사도세자를 그 안에 가두었다.

한여름 가장 무더운 복더위 때 밀폐된 뒤주 속에서 8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사도세자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서 8일 만에 2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창경궁 동남쪽 선인문(宣仁門)이다. 선인문은 동궁 시민당의 정문이다.

담장 길을 걸어 선인문 앞을 지난다. 내시와 신료들이 분주히 드나들던 궁궐 동쪽의 주출입문이다.
창경궁에 살던 사도세자를 가둘 대형 뒤주가 영조 임금의 특명에 따라 운반되어 들어가던 문이다.

창경궁 동남쪽 선인문 담장길이다.

뒤주에 들어가기 이틀 전 사도세자는 가뭄 끝에 찾아든 폭우를 뚫고

아버지를 죽이겠다며 선인문을 나선다. 그는 궁궐 담장 아래 수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밤거리를 헤매다 돌아왔다고 한다.

<한중록>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전전날 밤

칼을 찬 채 하수구를 통해 영조가 머물던 경희궁까지 다녀오면서

영조를 ‘아무렇게나 하고 싶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임금을 죽이려 한 것이다. 왕조시대, 살려둘 수 없는 죄다.

선희궁(영빈 이씨)은 경희궁으로 남편 영조를 찾았다.

그리고 그는 울면서 남편 영조에게 고하였다.
"세자의 병이 점점 깊어 바라는 것이 없사오니 소인이 이 말씀은 어미로써 차마 못할 일이지만
성궁(聖躬 영조)을 보호하고 세손(정조)을 건져 종사을 평안히 하는 일이 옳으니 대처분을 내리소서."

남편에게 생모로서 아들은 대처분 죽여달라고 고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들 사도세자는 뒤주에서 죽었다.

그 어머니 선희궁 영빈 이씨는 아들 사도세자 3년상이 끝나는 달

창경궁에 왔다가 경희궁으로 올라가 바로 죽는다. 사인은 자살로 추정한다.

<한중록>에는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이 되어 등창이 나서 돌아가셨다고 기록되고 있다.

왕조실록에도 병으로 죽었다고 빍히고 있다.

창경궁 명정전은 왕궁의 정전으로서는 유일하게 동향하고 있다.

이는 풍수지리상 동향하면 배산임수의 명당 조건을 갖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논란 끝에 선택한 결과였다.

즉 남향하면 동서로 경사진 언덕에 비스듬히 앉게 되어 정전 일곽의 반듯한 배치를 이루기 어려운데 비해 동향함으로서

창덕궁과 접한 야트막한 야산을 등지고 춘당지에서 시작해 옥천교 밑으로 흐르는 물을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풍수지리 원칙에 따라 명정전을 동향으로 배치했다는 것이다.

명정전에서는 즉위식 이외에 왕비‧세자 책봉, 외국 사신 영접, 각종 하례의식 등 국가 공식 행사가 거행됐다.
인종의 즉위 하례가 명정전에서 열렸고 인조 때 급작스레 세상을 떠난 소현세자를 대신해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과
효종 때 뒷날 현종이 되는 세자 책봉의례가 열렸다. 또한 정조는 문무 관리들의 인사 행정인 도목정을 명정전에서 거행하기도 했다.
국상이 났을 때 명정전은 망곡을 행했던 장소로 종종 이용되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고종 연간이던 1882년 임오군란 때에는 난리로 인해 실종된 왕비 명성왕후의 국상을 선포하고
그 망곡처로써 명정전을 사용하도록 했다는 기록도 있다

명정문은 창경궁의 법전인 명정전의 정문이다.
명정전 앞 조정에서는 임금 즉위식을 비롯해 신하들로부터 인사를 받는 조참 의식 등
중요 행사와 더불어 중죄인이 있을 때 국문하는 친국 장소로 활용됐다.
1544년 11대 중종이 승하하자 그로부터 닷새가 지난 뒤에 12대 인종이 창경궁에서
조선조 임금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즉위식을 가졌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새 임금 인종은 부왕 중종의 승하에 너무도 애통해 한 나머지
어좌에 앉길 주저한 채 오랫동안 몸을 숙여 크게 통곡하며 서 있다가 승지의 간곡한 권유로
억지로 어좌에 올랐으나 불안한 자세 속에 어좌에 앉아 눈물을 비 오듯 흘려 이 광경을 접한
모든 이들이 덩달아 오열, 단 한 명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운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효심은 실로 대단했다.

아버지의 사당을 수은묘에서 경모궁으로 승격시킨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거처하던 창경궁 쪽과 서로 통할 수 있도록 경모궁의 서쪽 편에 문 두 개를 만들었다.

각각의 이름은 일첨문(日瞻門)과 월근문(月覲門)이다.

첨(瞻)은 볼 첨이니 매일 바라보겠다는 뜻이고, 근(覲)은 뵐 근이니 매달 찾아뵙겠다는 뜻이다.

매달 초하루 정조는 이 월근문을 통해 궁궐을 나가 궁궐 후원 함춘원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 경묘궁을 찾았다.

서울시 종로구 연건동에 위치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구내에 있는 함춘원지(含春苑址)이다.

사적 제23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안에 사도세자의 옛 사당인 경모궁이 있었기 때문에

경모궁지(景慕宮址)라고도 불린다.
'봄을 품고 있는 정원'이라는 함춘원이다.

원래 함춘원은 창경궁의 부속 후원이었다. 창경궁을 만든 성종이 조성한 후원이다.

지세가 허약한 창경궁의 동쪽을 비보하기 위해서 동쪽언덕에 나무를 심고 담장을 둘러

잡인의 출입을 금했던 것이 함춘원의 시작이었다.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은 함춘원을 대규모로 확장했다.

주변의 민가들을 철거한 뒤 기이한 화초들을 심어 별세계를 꾸며놓고 담 밖에 군사들을 배치해

일반인의 통행을 금하여 그 안에서 방탕한 생활을 즐기기도 하였다.함춘원은 그 후로도 역대 왕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임진왜란 때 상당 부분이 파괴된 후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방치되었다.

 그 이후 인조 임금 때에는 함춘원의 절반을 임금의 가마와 외양간, 마구간 및 목장을 관리하던 관청인

사복시(司僕寺)에 할당해 이후 방마장(放馬場)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영조는 1764년(영조 40년) 봄

경복궁 서쪽 순화방에 원래 사도세자의 사당인 사도묘(思悼廟)를 지었다.

같은 해 여름, 그 사당을 창경궁 홍화문 밖 함춘원지로 옮겨서 수은묘(垂恩廟)라 하였다.

이때 사당의 위치는 아마도 함춘원지의 방마장(放馬場)을 제외한 나머지 땅에다 지었던 것 같다.

김정호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수도 한양의 지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에 함춘원과 경모궁이

담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수은묘는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 대에 이르러

경모궁이라는 이름으로 격상되었다.

임금의 주거처인 동궐(창덕궁과 창경궁)에서 먼 거리에 떨어져 있던 사도세자의 원래 사당 위치를

창경궁에서 빤히 바라다보이는 함춘원지에 옮겨 놓은 것이 다름 아닌 영조라는 사실이다.
정신병을 앓은 데다가 종묘사직을 위해 부득이하게 희생될 수 밖에 없었던 아들 사도세자를

생각하는 영조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이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뒤 곧바로 죽은 세자를 애도하면서 생각한다는 뜻의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이유를 종사(종묘와 사직)를 위해서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순조 당시의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그린 <국보 제249호 동궐도(東闕圖)>에는

창경궁의 가장 우측 아래쪽에 벽이 없이 기다란 형태의 마구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그 부분이 사복시의 궁궐 내 출장소 격인 내사복시(內司僕寺)임을 알려주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함춘원의 유적은 <함춘문> 뿐이다.

 그 뒤로 보이는 돌로 만든 단은 후대 정조 때 설치한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의 유적이다.

 세 분 대비를 향한 성종의 효심으로 출발한 창경궁이다.

성종 13년 당시 생존하고 있던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 어머니인 덕종비 소혜왕후 한씨,

양모(養母)인 예종의 비 안순왕후 한씨를 위하여 수강궁 터에 창경궁을 건조(建造)한 것이다.

명정전, 문정전, 환경전, 경춘전, 인양전, 통명전, 양화당, 여휘당, 충성각 등이 들어섰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서로 독립된 궁궐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합쳐서 하나의 궁궐로 사용되었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 씨를 편안히 모시고자 창경궁에 자경궁을 지었다.
홍화문 맞은편 함춘원 자리에 사도세자 사당인 경모궁을 지어 두 건물이 마주보도록 했다.

창경궁에서 가장 높은 곳, 함춘원이 잘 보이는 곳에 들어선 자경궁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당 가까운 창경궁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재위 후반부를 보낸 셈이다. 

정조의 효심(孝心)이 묻어난다. 그래서 창경궁을 ‘효의 궁궐’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성종이 왕실 어른들을 위해 처음 짓고 정조가 어머니를 모시고 재위 후반부를 보낸 창경궁이다.
그래서 더욱 창경궁에서 애잔함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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