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자연미와 가장 잘 어울리는 궁궐 창덕궁이다.
창덕궁은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흐름을 타고 아담한 건물을 배치했다.
건물 배치가 인위적이지 않고 한국적 아름다움을 아주 한껏 뽑내고 있는 창덕궁과 그 후원이다.
창덕궁은 그 산세를 타고 자연을 거스리지 않고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을 이루고 있다.
백두산에서 힘차게 달려온 맥세(脈勢)이다.
삼각산을 지나 보현봉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드넓은 한양 곳곳이 보이는 곳 그 높은 보현봉이다.
그 맥세는 보현봉에서 힘을 추스린다.그리고 백악에 이르러 왼쪽으로 틀어 내닫는다.
그 산세는 응봉에서 힘을 받아 남쪽으로 달려 종묘 혈(穴)자리로 생기를 집중한다.
그 기세(氣勢) 활기찬 산줄기가 감싸고 있는 자연의 품 속,
그 공간에 창덕궁과 그 후원이 다소곳하게 자리하고 있다.
일찍이 세종도 창덕궁의 자연미를 극찬하였다.
성종실록 성종 15년(1484) 10월 11일자 기사를 인용한다.
"세종께서 일찍이 문종께 이르시기를, ‘경복궁은 비록 장려(壯麗)하나
이 도성(都城)의 바른 명당(明堂)은 바로 창덕궁이다.’ 고 하셨다고 한다."
그로부터 600년 유네스코는 세종의 격찬대로 1997년 창덕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다.
"조선 3대 임금인 태종 5년(1405년)에 경복궁의 이궁(離宮 궁성밖에 마련된 임금의 거처)으로
건립한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건축으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의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며 특히 왕궁의 정원인 후원(後苑)은 한국의 전통적인 정원으로 꼽힌다."
-창덕궁 세계문화유산기념비문에서-
거기에 산과 물 그리고 나무 바위가 있다. 그렇다고 그 산수간의 공간을 정원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때 그 산은 산이고 물은 그저 물이다. 또 나무 역시 나무이고 바위도 그저 바위일 뿐이다.
그 산수간에 정자가 놓이면 상황은 아주 달라진다.
그제서야 산과 물 나무 바위 그 자연은 인간과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정자는 인간과 자연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 것이다.그때 비로소 정원이라고 한다.
이 아름다운 산수간에 조선 최고의 정자들이 뽐내고 있는 곳이다.
이 수려한 정자들이 소복히 몰려 있어 이 공간을 조선 왕들의 정원 창덕궁 후원이라고 한다.
산자락이 동쪽을 향해 'ㄷ'자 모양으로 우묵하게 조성된 곳에 연못을 조성했다.
그 연못은 둘레가 네모꼴을 하고 있다. 전형적인 네모꼴 방지(方地) 형태의 부용지(芙蓉池)다.
그 연못 가운데는 둥근 원형의 섬이 있다. 그곳에 장대석을 쌓고 한 가운데 둥근 섬을 만들었다.
그리고 섬 가운데는 소나무를 심었다.
이 섬과 연못 둘레는 하늘은 둥글고(天圓) 땅은 네모나다(地方)고 여긴 전통의 사상을 상징한다.
이 연못 동쪽에는 두 개의 석물이 있다. 연못에서 물이 빠져 나갈 때 생기는 소음을 줄여주는 장치라고 한다.
부용지 남쪽에 부용정(芙蓉亭)이 있다.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로 꼽히는 부용정이다.
부용정은 아(亞)자 모양을 기본으로 한 정자이다. 창덕궁 후원의 모든 정자가 그러하듯 부용정도 기둥 두 개를
물 속에 잠긴 모습을 하고 있다. 마치 아랫도리를 둥둥 걷고 천렵하는 어동(漁童)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그 정자의 두 기둥이다.
또 사람이 물에 발을 담그고 씻는 모습이 떠 오른다는 이도 있다. 발을 씻는 것을 탁족(濯足)이라고 했다.
숙종 때 지은 택수재(澤水齋)라는 정자가 이곳에 있었다. 정조가 집을 다시 짓고 이름도 부용정이라고 바꿨다.
“주합루 남쪽 연못가에 있다. 연못 안에 채색하고 비단 돛을 단 배가 있어, 정조 임금께서 꽃을 감상하고 고기를 낚던 곳이다.”
<동국여지비고>가 부용지와 부용정을 설명하고 있다.이곳에서 왕이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주연을 베풀고 축하해 주기도 했다.
신하들과 어울려 꽃을 즐기고 시를 읊기도 하였다. 물론 이때 잡은 물고기는 다시 놓아준다.
부용정의 부용(芙蓉)은 연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이름 부용에 걸맞게 평면 구성을 열 십(十) 모양을 하고 있다.
연꽃을 활짝 펼쳐진 모양을 형상화한 부용정이다.
지붕도 처마가 동서남북 사방으로 터진 복잡한 구성을 하고 있다.
겹겹히 이루어진 처마는 한옥의 흔치 않은 예술미를 화려하게 보여주고 있다.
추녀 부분의 석까래 구성이 무슨 구성 작품을 보는 것 같다.
이 정자가 빚어내는 기가 막한 멋이다.마루 주위에 난간을 둘렀다.
문을 들어올리고 닫을 수 았는 분합문(分合門) 구조의 들어열개문이다.
그 분합문 안에는 팔각모양의 불발기창을 두었다. 방안에 사람이 앉은 자세로
밖을 편하게 내다 볼 수 있게 불발기창을 달아 복도와 방으로 구분하였다.
부용정 안마루의 높이는 다르다.
북쪽으로 돌출된 부분이 한 뼘 정도 높다.
그 부분은 돌기둥을 박아 물 속에 박아 주춧돌로 삼았다.
북쪽에 한 단 높은 자리는 임금의 자리임을 알려준다.
정조는 부용정 상량문을 직접 지었다.
정조 19년(1795에 사도세자와 어머니 헤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화성을 다녀온 뒤
너무 기쁘고 즐거워서 부용정에서 규장각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부용지 북쪽에 정조 개혁정치의 산실 규장각이 있던 주합루가 자리한다.
정조는 1776년(정조 즉위) 규장각을 창덕궁 후원에 설치할 것을 명하였다.
규장각은 처음 왕실 도서관으로 출발하였다. 정조는 이후 규장각을 학술과 정책을
연구하는 기관으로 변화시켜 많은 도서를 수집하여 학문 연구의 중심기관으로 삼았다.
또한 개혁을 뒷받침하는 핵심 인물들을 육성하기 위해 초계문신제도를 시행하여 친위세력으로 키웠다.
이곳에서 정약용 서유구 홍석주 김조순 등 당대 최고의 학자와 관료가 배출되었다.
어수문을 지나 만나게 되는 2층의 주합루(宙合樓)을 만난다.
이 건물의 2층에는 주합루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이 현판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2층만의 것이다.
2층의 누각일 경우 2층에는 '누', 1층에는 '각'이 들어가는 현판이 각각 달린다. 2층과 1층의 이름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 건물의 1층의 이름은 바로 규장각(奎章閣)이다.
창덕궁 주합루는 정조 즉위년(1776) 창덕궁 후원에 어제·어필을 보관할 목적으로 건립한 2층 건물이다.
기단은 네벌대의 장대석을 바른층 쌓기하고 맨 위의 갑석에는 쇠시리를 넣어 마무리하였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건물로 기둥은 모두 상하층 통주로 사용하였다.
사방을 외부 기둥에서 1칸씩 물려서 퇴를 두었으며, 내부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하였다.
공포는 궁궐에서 전형적으로 사용되는 이익공으로 주두와 익공살미, 행공이 짜여지고 그 위에 재주두가 놓이며
운공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처마는 부연을 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양성바름으로 마감하였고 용마루 끝에는 취두를, 내림마루에는 용두를,
추녀마루에는 잡상과 용두를 얹어 권위가 높은 건물임을 나타내고 있다.
경사진 높은 지형에 배치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한 주합루 건물의 배치 또한 돋보인다.
조선시대 독특한 전통조경기법의 하나인 취병(翠屛 푸른 병풍)이다.
주합루 전면에 푸른 병풍 취병을 재현시켰다.취병은 식물을 소재로 한 산(生)울타리와 울타리의 복합형태이다.
내부가 보이는 것을 막아주는 가림막 역할과 공간을 분할하는 담의 기능을 하면서 그 공간을 깊고 아늑하게 만들어
생기가 나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연못가에 물고기가 새겨져 있다.
연못가의 벽에 물고기를 새겨 넣은 물고기는 거꾸로 보인다.
물에 반사된 물고기를 보면 올바르게 보인다. 불편하게 거꾸로 된 상태를 보지는 말라는 뜻이다.
편하게 물위에 시선을 두고 반사된 물고기를 보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 물고기는 영화당에서 과거를 치르는 선비를 상징한다.
이는 이무기도 아니고 용도 더욱 아니다.그냥 물고기 일뿐이다. 과거를 치르는 선비처럼.
부용지 동쪽 영화당(映花堂)은 동향이다.
'映花堂' 그 현판 글씨는 영조의 어필이다.
왕이 신하들과 함께 들려 연회를 즐기도 한 곳이다.
또 군사훈련을 참관하거나 직접 활을 쏘기도 했다.
선비들이 최종 과거시험을 치르던 과장(科場)으로 유명한 영화당이다.
영화당 앞마당은 춘당대(春塘臺)라고 불렀다.
춘향전의 주인공 이 몽룡이 장원급제할 때 춘당대에서 시험을 치른다.
그때 과거의 문제(科題)가 그 유명한 춘당색고색금동(春塘色古今同)이다.
부용지 물이 동쪽으로 흘러 북쪽 골자기에서 흘러드는 물과 만나 큰 연못을 이룬다.
그 연못이 창경궁 안에 있는 춘당지(春塘池)이다.
숙종18년(1692년)에 조성한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愛蓮亭)이다.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고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아니하며
지조가 굳고 맑고 깨끗하여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에 이러한 연꽃을 사랑하여
새 정자의 이름을 애련정이라 지었다."-숙종의애련정기(愛蓮亭記)에서-
난간마루와 바닥마루 사이에는 풍혈판을 짜 넣은 형식이고 난간 쪽마루는 계자각을 받혀져 있다.
처마는 겹처마에 지붕 꼭대기에는 절병통이 얹혀져 있고 목재에는 단청을 입혀 놓았다.
애련정에 들어가 앉으면 난간위로 기둥에 장식한 낙양각이 드리워진다.
마치 그림 틀의 액자 같아서 정자 안에 앉아서 내다보는 경치가 한 폭의 그림 같다.
이 낙양각을 통해 후원의 아름다운 경치를 빌려다 보는 차경법(借景法)의 상징이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고 자연의 풍광이 아름다운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차경법이다.
철따라 변하는 기막힌 경관을 여기 애련정에서 즐길 수 있다.
연못에 물을 담기 위하여 입수시키는 부분의 석조는 아주 단조로우나
재기(才氣)가 넘친다. 6월이면 하얀 연꽃이 장관을 이룬다.
장마철 굵은 비가 연꽃잎에 '뚝뚝'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보면
'자연이 인간을 위로한다.'는 말을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다.
정자가 소박하게 모여있는 연못이다.
동서로 형성된 두 개의 작은 산 능선 사이로 계곡이 있다.
이 계곡을 따라 두 연못과 네 채의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동쪽의 큰 연못을 반도지(半島池)로, 서쪽의 작은 연못을 반월지(半月池)로 불리운다.
그 연못의 모습이 한반도를 닮았다고 해서 반도지라고 한다.
"반도지는 자세히 보니 한반도 모양이라고 신기해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바로 그 방향이다. 반도지는 지도상의 북쪽 함경도 평안도 부분이 남쪽으로, 경상도 전라도 부분이
북쪽으로 향하여 누워 있다. 만약 우리나라 사람이 연못을 팠다면 이렇게 했을리가 없다."
-홍순민의 <우리 궁궐의 이야기>에서-
연경당 북쪽 문을 나서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만나는 정자이다.
처음 만나는 길쭉한 맞배지붕의 폄우사(砭愚榭)이다.
그리고 육각모양의 존덕정(尊德亭)이다.
정조와 그의 손자 효명세자의 흔적이 많은 평우사와 존덕정이다.
정자 폄우사 존덕정과 바로 이웃하고 있는 폄우사이다.
폄우사는 정자이면서도 누마루와 온돌방을 갖추어 겨울이나 여름에도
모두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펌우사는 정면 3간의 맞배지붕의 작은 건물로
방과 마루가 조성되어 있다.
폄우사는'어리석음을 일깨우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효명 세자가 할아버지인 정조를 생각하며 책을 읽었던 곳으로 전한다.
존덕정과 폄우사 사이에 돌조각이 놓여있다.
효명세자가 자주 들려 군왕의 도를 익힌 곳이다.
군왕은 최고의 양반이다. 양반은 발걸음부터 달랐다.
여덟 팔(八) 자 모양의 걸음을 익혀야 했다.
그 양반 발걸음을 익히도록 설치한 징검다리 돌조각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정자 존덕정이다.
존덕정은 1644년(인조 22년)에 지어진다.
처음에는 건물이 육각모양을 해서인지 육면정으로 부르다가 존덕정으로 바뀌었다.
존덕정은 본 건물을 세우고 그 처마에 잇대어 지붕을 따로 만들어 지붕이 두개로 되어있다.
바깥지붕을 받치는 기둥은 하나를 세울자리에 가는 기둥 세개를 세워서 이채롭다.
안 기둥은 한개의 큰 기둥으로 되어있고 바깥기둥은 가는 세 기둥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육각형 모양을 한 지붕에 겹으로 된 지붕이 특이하다.
내부 천정은 육각형과 사각형 구조재 위에 우물천정을 설치했다.
그 가운데 6각형 반자판에 청룡과 황룡이 구름속을 날고 있다.
북쪽 창방 위에 달린 나무판이 눈에 든다. 한자 글씨가 빽빽하게 새겨졌다.
그 글의 제목은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로 되어 있다.
"뭇 개울들이 달을 받아 빛을 받아 빛나고 있지만 하늘에 있는 달은 오직 하나 뿐이다.
내가 그 달이요, 너희들은 개울이다. 그러니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태극 음양 오행의
이치에 합당한 일이다."
그 글을 요약한 내용이다. 이 글을 지은 왕은 정조이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정조의 또다른 호이다.
관람정은 평면과 기와 지붕이 부채를 편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정자는 여섯 개의 초석 위에 원주를 세웠고 그 가운데 두 기둥이
반도지에 담그고 있다. 선비들이 연못에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을 즐기는 모양이다.
관람정은 그 부채꼴의 이색적인 면모를 하고 있다. 또 관람정 현판은 나무잎 모양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잠시 잡는다..
반도지 남쪽 가장 높은 언덕에 있는 승재정(勝在亭)이다.
‘승재(勝在)’의 ‘승’자는 아름답고 빼어난 경치나 고적을 가리킨다.
따라서 승재정은 빼어난 경치가 있는 정자라는 의미이다.
승재정은 문을 달아 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날이 추울 때는 방에 들어가 바람을 피할 수 있게 하고, 여름이면 창호를 들어 올려
들쇠에 매달 수 잇도록 하여 방안에서 시원함을 느낄 수 있도록 꾸몄다.
네모난 형태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단출한 정자지만, 기단 부분에 주춧돌을 놓고
누의 형태로 건물을 들어 올려 한껏 높아 보인다.
정자로 오르는 계단 앞에는 괴석을 놓아 자연의 풍취를 더욱 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