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난지도이야기

단종과 금성대군 그리고 역향(逆鄕) 순흥(順興)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8.11.09|조회수629 목록 댓글 0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에게는 비운(悲運)의 날이었다.
1457년(세조3)6월 27일 경상북도 순흥(順興 현 영주시)에 유배된 금성대군 이유(李瑜)에게는 끔찍한 정축지변(丑之變)이 터진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금성대군은 격분하여 뜻을 정하고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했다.
이때 마침 이보흠이 순흥부사로 부임하였다.이보흠은 세종때 문과에 급제한 집현전 박사로서 글 잘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겸손한 성품의 소유자였다.이보흠은 금성대군의 의분심과 충성에 감동되어 단종 복위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다. 
이보흠 순흥부사는 “남아가 글을 배웠다가 이런데 의롭게 쓰게 되니 여한이 없습니다.” 하면서 붓을 들어 “수양대군이 정인지,

신숙주 등 간신배들의 농간에 빠져 골육상잔하는 옳지 못한 일을 하고 마침내 왕위를 찬탈하였으니, 이것은 천인이 공노할 일인지라, 천하에 의리 있는 사람들이여, 다같이 일어나 이 그릇된 일을 바로잡아 단종을 복위케 하자” 고 말했다.
이부사가 돌아간 뒤 금성대군은 이 격문을 문갑 속에 넣고 편안한 마음으로 깊은 잠에 빠졌다. 금성대군이 잠에 빠져있는 동안

대군의 몸종 금련은 순흥부사의 급창과 공모하여 격문을 훔쳐내고 격문을 가진 급창은 그 길로 집에도 들리지 않고 한양으로

도망쳤다. 이튿날 한나절이 지나서야 격문이 없어진 사실을 안 금성대군은 금련을 잡아 문초한 결과 급창과 공모한 것을 알고

한양으로 떠난 급창을 붙잡기 위해 말 잘 타는 기천현감 김효흡을 보내게 되었다.

김효읍은 이부사와 금성대군의 연명으로 된 편지를 받아보고 나서 일각도 지체할 수 없는 급박한 사정임을 알고 즉시 말에

올라 한양을 향하여 급창의 뒤를 쫓아갔다.드디어 장호원 음죽마을 길에서 급창을 붙잡아 격문을 빼앗은 뒤 “허 이놈~,

 네 이것이 무엇인줄알고 훔쳤으며 또 이것을 가지고 어디로 가느냐?” 하고 호통을 치며 격문을 찢으려 할 때 급창이 애걸했다.
“사또, 경상감사 한자리 안하시렵니까? 지금 경상감사 자리가 비어있습니다. 사또 같은 양반이 기천현감이라니 말이 됩니까?
이 격문을 가지고 한양으로 올라가시면 경상감사는 떼놓은 당상입니다요. 사또께서 경상감사가 되시거든 소인도 버리지 마시고

미천한 자리라도 하나주십시오.”김효흡은 출세 욕심에 눈이 멀어 잠시 주저하다가 그 격문을 찢지 못하고 순흥으로 내려갈 생각을

 버린 채 한양으로 향하게 되었다. 격문을 본 세조는 영의정 정인지를 불러 금성대군을 비롯한 반역자들을 잡아들일 것을 명하고

안동부사 한명진으로 하여금 예천, 안동의 군사를 모두 출동시키게 했다.
금성대군과 이부사는 급창의 뒤를 따라간 김효흡이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일이 틀어진 것을 알고 새로 수십장의 격문을 써서

예천을 거쳐 안동까지 붙이게 하고 동지를 규합했으나 격문이 안동까지 붙여지기도 전에 야밤을 이용한 안동의 군사 500여명이

안동부사 한명진의 지휘아래 순흥을 급습하였다.이에 순흥 고을은 순식간에 불더미와 피바다를 이루며 폐부가 되기에 이르렀고

금성대군은 안동으로 호송되어 옥에 갇혔다가 며칠못가서 교살당하고 단종 복위운동도 이 사건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이 난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시신은 묻어 주었고 형체조차 보전 못한 시신은 죽계천에 던져 수장 시켰으며 그 피가 7km 떨어진 곳까지 흘러가 멎었다 해서 지금도 피끝 마을이 있다.

단종의 복위를 위한 거사가 실행으로 옮겨지기 몇일 전 정축지변이 발생한 것이다.

그 발단은 참으로 어이없다.한 여인으로부터 발생했다.금성대군을 사모한 시녀 김련의 짓이다. 
이 여인은 금성대군을 사모하였다. 그 사모하는 마음을 대군에게 수차례 표현하였으나 대군는 거사를 앞두고 냉철히 거부하고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그는 대군이 잠든사이 몰래  단종 복위  거사 격문을 빼내 자신을 사모한 관노에게 격문을 전해주고  밀고하는 바람에 거사가 들통이 나게 되고 참혹한 정축지변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금성대군의 순흥사건은 대군의 죽음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유배지인 순흥을 220여 년간 사라지게하였다.

순흥도호부가 폐부(廢府)된 것이다.순흥의 단종모복 운동은 관민귀천을 총망라한 규합된 저항세력으로 신 ․ 구세력 간의 마지막

대결로서 그 역사와 사회 사상사적 의의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 순흥거사는 왕자와 부사․선비와 호족․관리와 상민 그리고 노비들까지 귀천이 함께 참여한 지방의 범 저항세력은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영주 금성대군 신단

영주 금성대군 신단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금성대군(錦城大君) 등 단종복위운동을 하다 처형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후기에 조성한 신단(神壇)이다.사적 제491호. 유적지에는 금성대군의 신단과 순의비(殉義碑)가 있으며 금성대군과 함께

처형당한 이보흠과 지역 선비들을 추모하기 위한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지방 유림들이 제사를 지낸다.
『순흥읍지』에 따르면 금성대군신단을 처음 조성한 사람은 홍천군현감 이대근으로 비밀리에 단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1691년(숙종 17)에 사육신이 복직되자 1693년(숙종 19) 부사 정중창이 금성대군이 유배되었던 자리에 처음으로 단(壇)을

쌓았다고 한다. 이후 1719년(숙종 45)에 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상소하여 3개의 단으로 고쳤고, 1742년(영조 18)에는

경상감사 심성희(沈聖希)가 단소(壇所)를 정비하였다. 1980년에는 신단 앞에 제청(祭廳)과 주사(廚舍)를 건립하였다.

금성대군(1426-1457)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단종의 숙부이다.

1456년(세조 2)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추진하다 순흥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및 지역 사족(士族)들과 더불어 단종 복위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사전 밀고로 발각되어 거사를 도모했던 사람들과 함께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숙종연간에 금성대군과 함께 순절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단(壇)을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성대군신단은 2개의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사주문을 들어서면 제청과 주사가 마주하고 있고 일각문으로 들어가면

토석담장 안에 신단이 조성되어 있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조성하였으며 기단 앞 3곳에 계단을 설치했다. 기단 위에는 품(品)자 형으로 돌로 만든 3개의 단이 조성되어 있다. 금성대군의 신단은 중앙 뒤쪽에 있는 단으로 서쪽에는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 높이 140㎝, 폭 55㎝, 두께 24㎝)가 있다. 금성대군 신단 앞에 있는 동쪽 단은 이보흠을 모신 단이며, 서쪽 단은 함께 순절한
선비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단이다. 금성대군신단은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된 유적으로 18세기 국왕에 대한 의리가 강조되고,

탕평정치가 활성화되는 역사적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당시 인신(人神)을 위해 설치한 제단의 사례는 극히 드물고 제단도

잘 보존되어 있는 등 조선 후기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 유적으로 평가된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