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학자 이색(李穡)의 ‘송안시어시서(送安侍御詩序)’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순흥 안씨는 세세로 죽계(竹溪) 위에 살았다. 죽계의 근원은 태백산에 있다.산이 크고 물이 멀리 흐르듯,
안씨의 흥성함도 끝이 없을 것이다.”
죽계는 지금도 순흥면 안에 있는 맑은 계곡. 소백산에 둘러싸인 데다 죽계를 품고 있어 예로부터 순흥은
산 좋고 물 맑은 고장으로 사대부들의 칭송을 받았다.
“영천(榮川·지금의 영주를 말하는 듯하다) 서북쪽 순흥부(順興府)에 죽계라는 계곡이 있는데,
죽계는 소백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다. 이곳은 들이 넓고 산은 낮으며 물과 들이 맑고 깨끗하다.
…참으로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이다.” -이중환의 <택리지> 죽계 편에서
조선 초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서거정도 순흥을 병풍처럼 감싸안고 있는 소백산을 두고
“소백산이 태백산에 이어져, 서리서리 백리(百里)나 구름 속에 꽂혔네.분명히 동남계(東南界)를 모두 구획하였으니,
하늘땅이 이루어져 귀신은 인색을 끼쳤네”라고 노래했다.
바가 내려도 맞지 않고 20리를 갈 수 있다던 순흥(順興).
처마 밑으로 비를 피해 그렇게 멀리 갈 수 있었다니 과장 섞인 이 말로 당시의 번성함을 짐작한다.
그러나 단종 복위를 꾀하던금성대군의 거사가 무위로 그치며 순흥은 핏빛으로 물들었고 그 핏물이
죽계천을 따라 10여 리를 흘렀다.피끝마을은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다.
어린 시절 어른들이 흔히 놀리곤 하던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의 진원지인 작은 다리,청다리(지금의 제월교)가 있다.
죽계 상류에 있던 소수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은 종이나 이곳 마을 처녀와 눈이 맞아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처녀와 미리 짜고
청다리 밑에 버리라 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다리 근처를 지나다 우연히 아이를 발견한 것처럼 해서 “불쌍한 아이를 주웠다”며
본가에서 기르게 했다는 것이다.
정축지변 때 확인사살까지 당한 상황에서 운좋게 생명을 부지한 어린애들을 관군들이 데려다 키우고
이들이 성장하여 '나를 낳아 준 생부는 어디있소'라고 하면서 부모를 그리워하면 차마 칼 맞아 죽었다고 할 수 없어
'너는 머나먼 순흥땅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라고 둘러댔다.이 때부터 이 청다리가 '다리 밑에서 주어 왔다'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 청다리는 다리(橋)와 사람의 다리(脚)가 발음이 같아 여성의 다리를 무로 비유하여
무청자(菁)를 써서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청다리라 하였다.
금성대군 신단 옆에는 순흥의 흥망과 정권의 성쇠를 지켜본 한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다.
역모의 죄로 흥주도호부가 폐부가 될 것을 예견하여 문종 1년(1451년)에 고사한 이 나무는 인조 21년(1643년)에 되살아났으며,
그 기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숙종 8년(1682년)에 순흥부로 환복되었다. 이 신기한 은행나무 압각수(鴨脚樹)는 지금도
금성단을 바라보며 묵묵히 서 있다.
금성대군이 단종을 만나기 위해 오고갔던 고치령(古峙嶺) 고갯길이다.
영주에서 가장 알리고 싶은 관광지가 '죽령 옛길'이라면, 가장 숨기고 싶은 곳이 고치령(古峙嶺)이다.
고치령을 논하면서 금성대군과 단종복위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는, 바로 복위운동의 중심에 순흥이 있었고,
그 순흥의 군관민이 금성대군의 밀사가 되어 단종이 있던 영월 청령포까지 오가던 길이 바로 고치령이기 때문이다.
고치령이 단순히 보부상들이 물류를 위해 넘던 고개를 넘어 '단종애사'의 슬픔을 간직한 한(恨)많은 길이기 때문이다.
태백산과 소백산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곳이 바로 고치령이다.영주사람들은 북쪽 영월에서 죽은 단종을 '태백산 신령이 되었다'라고 믿고 남쪽 순흥으로 유배되었다가 안동에서 죽은 금성대군을 소백산 신령이 되었다'라고 믿는다. 그들 조카와 삼촌 사이에는 죽어서야 만날 수 있었던, 육신은 넘을 수 없었던 고개 고치령이 있다.사람들은 소백과 태백 사이의 양백지간(兩白之間)에 산신각을 짓고
금성대군과 단종이 영혼이 되어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다. 아담한 산신각에는 태백산 신령인 단종과 소백산 신령인 금성대군이 함께 모셔져 있다.요즘도 영주인들은 정월 열 나흗날이면 어김없이 산신제를 지내니 그들의 넋을 달래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