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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섬

조선시대 게스트하우스 전관원(箭串院)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9.07.26|조회수547 목록 댓글 0


서울 성동구 행당동 66-3번지 행당중학교 정문 앞에 있는 전관원(箭串院) 터의 표석이다.

한양 도성 밖 살곶이다리 근처에 으레 나그네들이 묵어 가던 게스트하우스 전관원(箭串院)이다.

『동국여지승람』권3에 "전관원이 살곶이다리 서북쪽에 있다."(箭串院 箭串橋西北)라고 한 자리는

살곶이다리 서북쪽 중랑천 북쪽 언덕께였다. 이곳 전관원은 서대문 밖의 홍제원, 동대문 밖의 보제원,

남대문 밖의 이태원과 함께 도성 교외 사대원의 하나였다.

조선시대 공용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기관으로 원(院)이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다.

원은 중앙의 공문서 전달과 관용물의 우송 등을 담당하는 역과 같은 장소에 설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역원(驛院)이라고 불렀다.역원은 고려시대부터 설치 운영되었다. 고려 때는 승려가 원을 지키고

운영을 맡았다. 이 원에서는 해가 저물면 길손이 묵어 가게 하고 또 병이 나면 약을 베플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원우가 폐지되기도 하고 관리가 철저하지도 못해서 공용여행자의 숙식을 각 관, 역 혹은 민간에서

담당하는 일이 많았다.또 임진왜란 이후 파발제도의 실시와 함께 파발의 매 참마다 참점이 설치되었다.

이 참점은 후에 흔히 주점 주막으로 불리는 거리집으로 발전되었다.

1425년 11월 20일 호조에서 계하기를 "우리 나라의 큰 길가에 있는 역원(驛院)은 길 다니는 나그네를 접대하기 위한 것으로서

본래부터 마땅히 수리 보완하여야 할 것인데 지금 각 고을의 수령들이 그 일에 마음을 쓰지 아니하여 원주(院主)를 두지 않아

빈 집이 되어 퇴락하게 만들거나 혹은 허다한 노역(勞役)을 시켜서 원주로 하여금 편안히 살 수 없게 만들며 혹은 대소(大小)

사신(使臣)들이 길을 인도하고 횃불을 들게 하는 등의 일로 부당하게 침범하고 포학하게 하여 이들로 하여금 도망쳐

흩어지게 하니 길 가는 나그네는 유숙할 곳이 없게 되었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하옵건대 지금부터는 각 고을의 관원으로 하여금 승려이거나 양민(良民)이거나를 물론하고 선량한 자로 원주(院主)를 삼아

잡역(雜役)과 길 인도 및 횃불 들기 등의 일을 면제하여 역원의 수리 보완과 행인(行人)을 편안히 접대하는 일에 전심하게 하고,

감사가 순행(巡行)할 때에 수령이 이 일에 대하여 마음을 쓰고 아니 쓰는가를 감찰하여 수령의 출척(黜陟)에 빙고(憑考)하게 하시고, 성밑 10리에 있는 원관(院館)은 한성부가 고찰하여 수리하고, 흥인문(興仁門) 밖의 보제원(普濟院)은 홍제원(弘濟院)의 예에 따라

밭 2결(結) 50부(負)를 주게 하소서."하였다.
1437년 2월 16일 세종이 한성부에 전지하기를 "지금 개춘(開春)한 뒤를 당하여 보제원(普濟院)과 이태원(利泰院)의

진제장에 유이하며 얻어먹는 자가 날마다 증가하고 있다. 굶주린 백성들이 많이 모이면 병에 전염되어 요사(夭死)할까

두려우니 홍제원(弘濟院)에 또 진제장 하나를 더 설치하고, 고찰하는 관리의 지대(支待)에 대한 여러 가지 일은 한결같이

보제원과 이태원의 두 진제장의 예에 의하여 시행하라."하였다.
1457년 5월 7일 세조가 호조(戶曹)에 전지(傳旨)하기를 "의창(義倉)을 설치한 것은 본디 가난하고 궁핍(窮乏)한 사람을

진휼(賑恤)하려고 한 것인데 지금 듣건대 한성에 거주하는 부유(富裕)하고 세력이 강한 사람이 혹은 집행하는 관리에게 몰래

청하여 진대(賑貸)할 즈음에 부유하고 세력이 강한 사람이 먼저 많이 얻어서 주육(酒肉)을 사먹는 밑천으로 삼기도 하고,

심한 사람은 이를 사용하여 재산을 늘리기도 하는데 가난하고 궁핍(窮乏)한 사람은 아침 저녁으로 먹여 주기를 기다리다가

의탁(依託)할 곳이 없게 되어 마침내 굶주리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고 하니 의창(義倉)을 설치한 본뜻에 어긋남이 있다.

지금부터는 감히 이와 같이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행하는 관리와 관원을 모두 제서 유위율(制書有違律)로써 논죄(論罪)할 것이다.
지난 해에 실농(失農)하여 한성과 외방(外方)에서 곡식이 귀해서 굶주린 백성은 빌어먹는 사람이 많아졌다. 외방(外方)에는 이미

여러 고을로 하여금 진제장(賑濟場)을 벌여 두게 하였으니 한성에서는 마땅히 동서 활인원(東西活人院)에 나누어 보내어 진휼(賑恤)하여야 할 것이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가난한 백성이 병든 사람과 더불어 뒤섞여 거처하기를 싫어해서 이로 인하여 뿔뿔이 도망하여 흩어지는 일이니 보제원(普濟院)·홍제원(弘濟院)·이태원(梨泰院) 등 세 곳에 별도로 진제장(賑濟場)을 두고 사람을 임명하여 감독

관장(管掌)하게 하고, 또 5부(五部)의 관리로 하여금 날마다 윤번(輪番)으로 왕래하면서 검속(檢束)하고 핵실(覈實)하여 어긴

사람은 과죄(科罪)하게 하라."하였다.
1805년 6월 21일 창경궁(昌慶宮)의 효안전(孝安殿)으로 반우(返虞)하였다. 이 날 평명(平明)에 순조가 흥인문(興仁門) 밖

보제원(普濟院) 지영소(祗迎所)의 악차(幄次)로 나아갔는데 우주(虞主)를 실은 연(輦)이 이르자 순조가 최복(衰服)으로 갈아입고

부복(俯伏)하고 곡(哭)하는 것을 의주(儀註)대로 하고 나서 다시 악차로 들어왔다. 임금의 얼굴에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고 스스로

목이 메어 우는 것을 이겨내지 못하였다. 우주를 실은 연이 나아가기 위해 떠날 때에 즉시 악차에서 나오지 않았으므로

원임 대신(原任 大臣) 이병모(李秉模) 등이 교대로 악차에서 나올 것을 청하니 순조가 이어 최복을 입고 배종(陪從)하였다.

우주(虞主)를 효안전(孝安殿)에 봉안(奉安)하고서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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