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뚝섬나루 중심에는 강북과 강남을 연결하는 영동대교가 놓여있다.
"독도는 독백이라고도 하는데 두무포 상류에 있었다."-<동국여지비고> 산천조에서
조선후기에는 강원도에서 오는 목재가 모이는 곳이다. 나라에서는 관리를 파견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수세소를 설치했다.
뚝섬은 섬이 아니다.뚝섬은 동쪽에서 흘러드는 한강이 둘러 서쪽으로 흐르고
북쪽에서 오는 중랑천과 서울 도심을 궤뚫고 흘러오는 청계천이 흘러 합류되면서
서쪽 성수대교 부근에서 한강과 만나는 중간 지점에 있기 때문에 섬과 같이 되었다.
"동쪽에서 흐르는 한강이 둘러 서쪽으로 흐르고, 북쪽 중랑천이 서쪽에서 흐르는 한강과
합하는 중간에 있으므로 자연히 평야가 형성됐다."-<동국여지승람>에서
한양의 열 가지 명승지를 노래한 ‘경도십영’(京都十詠)에도 봄이면 살곶이벌을
찾는다는 내용의 ‘전교심방’(箭郊尋訪)이 꼽혔다.
영동대교 동쪽 공간에 '뚝섬나루 터'임을 전해주는 '뚝섬나루 터' 표석이 있다.
뚝섬나루 터
이곳은 강남 송파와
청숫골을 잇던 나루터
강원도에서 내려오는 뗏목들이 하역되던 곳이다.
이곳에 하역된 목재는 한양도성에 재목과 땔감으로 공급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나루 주위에 땔감과 재목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점포가 40여호가 넘었다고 전한다.목재를 켜는 제재소가 비교적 많았다.
나루터에는 사람들이 몰려든다.목재와 땔감이 집중되는 나루에는 참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는 먹거리가 풍성하기 마련이다.해장국집이 즐비했다고 전한다
뚝섬나루에는 해장국이 많이 들어섰다.
새벽에 뗏목이 도착하면 뚝섬나루는 사람들이 북적대는 시장통이다.
새벽에 도착한 뗏꾼들과 상인들은 해장국집을 찾아 허기를 메운다.
그때부터 유명한 뚝섬해장국이다.
해장국을 시키면 국말이떡이 3쪽 나온다.
이 국말이떡을 해장국에 담가서 먹었다.해장국 맛도 인기였다.
그 맛 좋은 해장국에 담가서 먹는 국말이떡의 맛은 더욱 좋다.
그래서 지금도 뚝섬일대에서는 국말이떡과 함께 즐기는 해장국이 여전히 인기다.
먹거리가 풍부한 나루터다.
목재소가 많은 뚝섬 마포나루터는 더욱 그랬다.
먼지를 많이 안고 사는 목재소 일꾼 등 나루터 사람들에게는 술과 고기가 필요하였기에
그 나루터에는 삼겹살 집 주물럭고기집 등 고기집도 많았다.마포에는 임금님에게 올렸다는
삼해주가 유명하다.
뚝섬에는 목재와 채소가 많았다.새우젖이 유명한 마포다.
뚝섬 채소장수와 마포 새우젖 장수는 이렇에 구별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뚝섬 채소장수는 뒷덜미가 까맣고 마포 새우젖 장수는 이마가 까맣다."
도성에 물건 팔러가는 뚝섬 채소장수는 아침에 해를 등지고 도성으로 들어간다.
오후에 도성에서 물건을 다 팔고 해를 등지고 뚝섬으로 돌아가야 했다.그래서 뒷덜미가 까맣다,
반대로 마포 새우젓장수는 아침에 해를 안고 도성에 들어간다.물건을 다 팔고 오후에 해를 안고
다시 마포로 돌아가야 했다.그레서 마포 새우젓장수는 이마가 까맣다고 한다.
그렇게 먼 옛날이 아니다.
영동대교가 놓이기 전 뚝섬나루를 운행하던 나룻배다.
1967년 기동차를 타고 뚝섬 종점에서 내렸다.
뚝섬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시설물은 ‘기동차’였다. 1930년 왕십리~뚝섬 간 4.3㎞를 달렸다.
1934년 동대문~왕십리 간 별선을 놓으면서 동대문~뚝섬 구간이 완성됐다. 전성기 총 37대까지
운행된 기동차는 1960년대 후반 폐지될 때까지 뚝섬 주민들의 발이자 채소 수송수단으로 이용됐다.
뚝섬 기동차 종점에서 도착해서 곧장 선착장으로 달려가 나룻배를 탔다.
그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지금의 영동대교 남쪽에 배를 댔고 승객은 거기서 내렸다.
논두렁과 밭뚝을 밟고 또 좁은 시골길을 걸었다.그렇게 걸어서 찾아간 곳이 봉은사였다.
그리고 이웃 선정릉을 찾았다.
그때 문화방송 인기 드라마 <왕비열전>의 주인공 문정왕후이다.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다.그의 남편 중종이 제1계비 장경왕후의 왕릉 곁에 묻힌다.
문정왕후는 정작 죽어서 남편 곁에 갈 수는 없게 됐다.보우국사와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다.
보우국사는 성종의 선릉의 원찰 봉은사 터를 중종의 정릉자리로 내놓는다.
중종은 장경왕후 곁을 떠나 아버지 성종의 선릉 곁으로 옮긴다.바로 선정릉의 정릉이다.
정릉은 왕릉 터로는 적합하지 않았다.물이 많이 나기 때문에 묘자리로는 아주 나쁜 곳이다.
문정왕후는 죽어서 그렇게 소원했던 남편 중중 곁에 묻히지 못한다.
아들 명종의 강릉 곁에 묻힌다.그게 바로 태릉이다.
문정왕후의 친정 오라버니 윤형원과 정난정은 당시 드라마 속의 화제인물이었다.
정난정은 요즈음 말로 최고의 비선실세였다.
뚝섬선착장을 떠난 배는 봉은사 행임을 밝히고 있다.
한강 건너 남쪽 기슭에 봉은사가 있다. 한양도성의 부녀자들이 자주 찾던 봉은사다.
그 부녀자들이 봉은사에 불공을 드리기 위해 뚝섬나루를 많이 이용했다. 그때 그 부녀자들을 위해
개인배가 여러 척이 있었다고 한다.그 개인배는 배삯을 받고 강을 건너주기도 했다고 전한다.
뚝섬나룻배는 젊은이들은 물론 강남북의 주민들에게는 강을 건너게 해주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봉은사 스님이나 신도들도 많이 이용한 뚝섬나룻배다.
1960년대 젊은이들에게는 뚝섬나루는 대단히 인기 만점의 데이트 코스였다.
1972년 당시 뚝섬나루배의 모습을 법정스님은 이렇게 전한다.
"승용차 뿐 아니라 소가 끄는 수레며 분뇨를 실은 트럭이며 그 바퀴 아래 신사와 숙녀들도 함께 태워준다."
서울의 강 경강(京江)에는 3대 백사장이 있었다. 광나루 백사장 뚝섬 백사장 그리고 용산 백사장이다.
지금은 한강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그 백사장은 다 사라졌다.그 백사장 자리에는 한강공원이 조성되었다.
저 강너는 부리도마을이다.1988년 서울올림픽을 치르면서 서울종합운동장이 들어선 곳이다.
그 부리도 마을 옆으로는 탄천(炭川) 숯내가 흐른다.
강원도에서 내려오는 넉넉한 목재로 숯을 굽는다. 숯 때문에 그 내의 이름 숯내다.
그 숯내에는 삼천갑자 동방삭이 전설이 이렇게 전해온다.
아주 먼 옛날 호랭이 담배먹던 시절에 동방삭(東方朔)이란 아이가 살았습니다.총명하고 똑똑하여 인근에 소문이 자자하였습니다.
신분이 비천해서 출세하지 못하고 나이서른을 맞이하게 되었답니다. 그는 홀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짓고 살았었는데 봄이나 여름에
흔히 농사용 물대기 때문에 인근 거주민과 싸움이 났댔는데.. 동방삭의 논과 둑하나를 맞이한 윗논에 장님(소경)점사가 농사를 짓고 있어서 밤새도록 논에 물을 대어놓으면 동방삭은 몰래 새벽녁에 나 가서 논둑에 봇물을 터서 장님이 애써 받아놓은 논물을 몰래 빼가기를 수차례 하였답니다. 장님이 분통이 터져 싸우길 여러번 하다가 눈도 보이지 않는데다가 동방삭을 잡아 패주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던지라. 마침 그가 천문과 지리를 알고있던 관계로 조놈의 새끼 언제뒈지나 하고 사주를 꼽아보고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댔답니다.
” 야 이 미꾸라지같고 백여우같은 새뀌야. 니가 아무리 날뛰어도 내가 꼽아보니 니놈은 올해 서른을 못넘기고 뒈질팔자다” 동방삭이 헤헤 거리며 장님놀리다 그 말을 들으니 걱정도 되고 해서 집에 들어가 어머니에게 들은말을 늘어놓으니 어머니는 천지가 뒤집어지는 듯 혼비백산하여 아들을 꾸짖고 앞세워 그 장님을 찾아갔드랍니다. 천지간에 믿을것이라곤 이 동방삭 아들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불쌍한 년이오니 부디 불쌍히 여기시고 헤아려주셔서 살길을 알려주십시요 하고 굴복 사죄를 하기를 여러번 거듭하고 하도 간절히 매달리는지라. 장님 점사가 생각하기를 에구 내가 괜한말로 내처지만 더 곤란해졌구나 라고 생각하다가 그 어머니의 간청에 못이겨 말해주기를.. 모월모일 동방삭 나이 서른 생일날 저녁 오시(밤 1시 ~ 3시)사이에 마을 앞산 재마루에 떡시루 정성스레 해놓고 술상 잘 차려놓고 노자돈 세사람분 준비해놓고 기다리시면 저승사자 셋이 재너머에서 오다가 목말라 술을 마시고 떡을 집어먹으면 숨어있다가 뛰어나가 살려달라고 손이 발이되도록 빌어보시요. 혹시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겠소이다.. 노모는 백배사례하고 그말대로 모월 모일 오시에 모든 준비를 다 해놓고 재마루 숲속에서 숨어 기다리는데.. 검은옷 입고 검은 갓쓴 세사람이 나타났더랍니다. 그중에 한사람이 “어 저기좀 보게 누가 한상 잘차려 놓았구먼?” “그런데 술도있네 그려..아무도 없는데 목도 마른데 한잔씩 하고갈까?” 그중에 한사람이 말하길 “여보게 남이 차려놓은것 함부로 손대면 안되지. 세상엔 공짜가 없는 법인데… 그냥 갑세.” 그중에 한사람이 말하길 ” 누가 제사지내고 그냥 냅두고 간것 같으니 먹어도 괜찮은듯 싶으니 한잔씩해도 별일없을것 같은데” 그러세.. 어여와 한잔하자고 ..” 잡아 끌어당기자 세사람은 한잔씩 걸치고 떡도 집어먹고 찬찬히 보니 주머니 세개가 있는데 엽전이 담겨 있기에 “어 여기에 누가 노잣돈도 넣어 놨구먼 허허” 각자 하나씩 품에 집어넣었 답니다. 수풀에 숨어 이 광경을 보던 동방삭의 노친네가 재빨리 뛰어나가 아이고 아이고 우리아들 잡으러오신 사자님들 부디 이 년을 데리고 가시고 우리아들 살려주시요 붙잡고 간절히 사정하자 그중에 한 사자가 말하길.. “거보게 세상엔 공짜가 없는데.. 헐.. 공연히 어려운 일에 간여하게 됐구만.. 동방삭의 모친이 울며불며 하도 간절하게 매달리자 사자중의 한 이가 “침먹은 지네요. 꿀먹은 벙어리라. 아무튼 다시 가보세” 라고 일행을 이끌고 다시 저승부로 돌아 갔드랍니다. 그들이 옥황상제 저승부로 가보니 염라대왕이 저승명부를 펴놓고 잠이 들었댔는데 마침 그날 잡아올 동방삭의 명부가 보였는데.. 동방삭(東方朔) 삼십갑자<三十甲子> 이라고 쓰여져 있는곳에 그중의 한 사자가 몰래 다가가 붓으로 삐침하나를 더 그었답니다. 그리곤 어흠어흠 하고 기침을 하자 저승사자가 잠에서 깨어나자 저승사자들이 이구동성 말하기를 “큰일날뻔 했습니다. 가보니 “동방삭이는 제 명을 다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돌아왔습니다.” 저승사자가 잠이 덜깬 눈으로 보니 동방삭의 명부에 <三千甲子> 라고 씌여 있었답니다.
” 이크 큰일날뻔 했구만 . 제명도 살지도 않은놈을 잡아올뻔 했구만..자네들 수고했네 가서 쉬게.” 그로부터 동방삭이는 삼천갑자를 살기 시작했는데.. 온 천지의 일을 주관하는 옥황상제가 천지의 혼란을 일으키는 그를 잡으려 해도 온갖 도술로 변신을하고 어려졌다 늙었다를 반복하기에 도무지 잡을수가 없었댑니다. 하늘나라가 혼란에 빠져 옥황상제가 고민중에 있는데..그중에 한 신하가 “제가 내려가서 해결하겠습니다” 하고 지상에 내려와서 온천지의 사람들이 배를타고 지나다니는 강가 나루터에서 숯[炭] 을 씻었답니다. 수백년을 숯을 씻고 있자 지나가던 사람들 모두가 그모습이 기이하기에 한마디씩 묻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는데…. 수백년 후 그곳을 지나가던 동방삭이 이 광경을 보고 하도 이상하여 “왜 숯을 물에 씻고 있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사자가 대답하기를 “검은 숯을 희게 하려고 씻고 있다“고 하니, 동방삭이 크게 웃으며 “내가 지금까지 삼천갑자를 살았건만, 당신같이 숯을 씻어 하얗게 만들려는 우둔한 자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사자는 이 사람이 동방삭임을 알고 그를 사로잡아 옥황상제에게 데리고 갔는데, 이 때부터 이 하천을 탄천, 우리말로는 숯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성남에서 잠실운동장 옆으로 흘러나오는 탄천의 유래가 꽤나 재미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그 풍습이 없어졌기도 하지만 아직도 보이는곳도 간혹 있는데.. 흔히 망자(亡者)의 장례에 앞서 술상에 노자돈과 신발(옛날엔 짚신)을 세켤레씩 놓았는데.. 그 이유는 망자를 위한 노자가 아니고 망자를 잡으러온 저승사자를 달래기 위한 풍습이올시다. 그 풍습은 이 동방삭의 고사에서 유래되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