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이라는 시간 길다고 하면 길다고 할 수 있는 판매 금지 기간을 벗어나서 이덕일 소장의 “우리안의 식민 사관” 개정판이 출간이 되었습니다.
이덕일 김현구 재판 이전에 출간된 책에 비해서 100여 페이지 정도 분량이 늘어났습니다. 이 100여 페이지.. 참 의미 있는 내용이 아닌가 합니다. 이전의 책에서 이덕일 소장은 우리안의 식민사관이라는 연극에서 무대 밖의 관객 즉, 역사가의 입장에서 책을 서술했다면 그 이후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책에 대한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과 유죄 판결을 통해서 관객이 아니라 식민사학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 이 연극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늘어난 100여페이지의 분량은 본인의 체험을 토대로 많은 부분이 쓰여지게 되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로서 중립성과 객관성을 잃지 않고 쓰여진 부분이 눈에 띱니다. 과연 역사가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여러번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책을 읽고 여러 가지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만 전 이부분이 특히 눈에 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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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안의 식민사관 개정판 P 37 ]
더 큰 문제는 고검의 임xx이 서부지검을 제치고 (나를) 직접 기소했다는 점이다. 고검에서 지검의 무혐의 처분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재수사 명령을 내리는 것이 정상경로다. 그러나 고검은 자신을 직접 기소했다. 그것도 필자를 불러 조사하기도 전에 기소부터 먼저 했다. 기소부터 먼저하고 나중에 조사하는 수사기관이 전 세계에 존재하기는 할까? 그런데 임무영의 조사 내용 중에는 “ 박제상이 일본에 인질로 간 것은 사실 아니냐?” 고 윽박지르는 것도 있었다. 대한 민국의 수사 기소권을 독점한 검사가 박제상이 일본에 인질로 간 것이 왜 그렇게 신이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위인들이 아무런 제제를 받지 않고 수사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 이 나라 사법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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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검사가 왜 박제상에 집착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대략 이런게 아닐까요?
1. 김현구 -> 백제가 왕녀를 왜왕에게 바침 -> 김현구 식민사학자.
2. 이덕일 -> 박제상 일본 인질인정 -> 이덕일도 식민사학자..
똑같은 논리로 이덕일도 식민사학자인데 왜 이덕일이 김현구보고 식민사학자라고 해? 너 고소! 이런 시뮬레이션을 머리 속에 그리고 기뻐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만.. 대한민국 검사가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제일 똑똑한 축에 속하는 사람들이고 사시 1차 시험에 국사가 들어가나요? 그런 분이 저런 상상을 혼자 하면서 “ 박제상도 일본 인질이었잖아?” 하면서 얼굴에 해맑은 미소를 지으면서 이번 재판은 이렇게 마무리..이랬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책에도 있는 내용이지만 쟁점은 일본서기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고 인용하는게 맞느냐 이런건데.. 검사씩이나 되는 분이 이런 것 정도는 알고 있으셨겠죠. 저런 설계 하에 박제상을 쟁점으로 삼은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 어쨌든 “ 박제상이 일본 인질이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 신념하에 검사가 이 부분을 주목한 것은 틀림없는 듯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 그알 버전 )
박제상이 일본 인질이었느냐 하는 것은 정말 대답하기 힘든 질문 아닐까 합니다. 4세기에 일본이 있었느냐 박제상은 인질로 일본에 간게 아니라 인질인 미사흔을 구출하기 위해 간거다.라는 테크니칼한 이슈들은 접어두고.. 박제상이 상대한게 정말 고대 일본? 왜? 이런거야 하는 부분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단 박제상 관련 기록을 한 반도에서 찾아보면
삼국사기에는 박제상이 신라 눌지왕 2년인 418년에 고구려에서 인질로간 눌지왕의 동생 복호를 데리고 오고 같은 해에 왜에서 미사흔을 데리고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동일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만 시기는 눌지왕 10년 425년으로 삼국사기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서기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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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신공 섭정기 5년 ]
5년 봄 3월 경묘삭 기유(7일)에 신라왕이 오례사벌(汙禮斯伐),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 부라모지(富羅母智) 등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전에 질(質)이 되었던 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을 데려 오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허지벌한에게 다음과 같이 거짓말하도록 시켰다.
“사자 오례사벌, 모마리질지들이 저에게 ‘우리 왕은 허지벌한이 오래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의 처자를모두 관노로 하였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원컨대 잠시 본국에 돌아가서 사실인지 아닌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황태후가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彥;카즈라키노소츠비코)을 함께 보냈다. 대마(對馬;쓰시마)에 이르러 서해(鉏海;사히노우미)의 항구에서 묵었는데, 그때 신라의 사자 모마리질지들이 몰래 배와 뱃사공을 나누어 미질한기를 태우고 신라로 도망가게 하였다. 그리고 허수아비를 만들어 미질허지의 침상에 놓고, 거짓으로 병에 걸린 척하며 습진언에게 “미질허지가 갑자기 병에 걸려 죽어간다.”고 말하였다. 습진언은 사람을 보내 병자를 보게 하였다.
곧 속은 것을 알고 신라의 사신 3인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불태워 죽였다. 이에 신라로 가서 도비진(蹈鞴津)에 진을 치고, 초라성(草羅城)을 함락하고 돌아왔다. 이때의 포로들은 지금의 상원(桑原;쿠하하라), 좌미(佐糜;사비), 고궁(高宮;타카미야), 인해(忍海;오시누미) 등 4읍(四邑) 한인(漢人)들의 시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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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일본서기 신공 섭정 5년은 액면상의 연대가 201년입니다. 일본서기는 원래 실제 연대를 2주갑 인상설 등을 통해서 가짜 연대를 삽입하는 책입니다만, 박제상의 실제 생몰 연대는 363~419년?입니다. 이것과 맞추려면 3주갑을 인상해서 381년 으로 맞추어야 할까요? 왜 일본쪽 기록과 한반도 기록은 박제상의 사망이라고 하는 사건을 많은 비중을 들여서 기록한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연대는 틀린 걸까요? 일본서기의 조작이 당연한걸까요?
그런데 일본서기의 연대 조작은 대부분 특정한 목적들이 있는데 박제상 사건의 경우는 연대를 굳이 조작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의문들이 듭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 박제상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왜왕이 아니라 가즈라키 소츠비코 葛城襲津彥라는 인물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신공황후가 이 가즈라키 소츠비코라는 인물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신공황후는 일본서기가 창작한 존재하지 않는 가공 인물이고 실제 상황은 왜왕이 박제상을 죽인 것이 아니라 이 가쓰라기 소쯔히코 葛城襲津彥가 죽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칠지도에 적힌 백제의 왜 후왕이기도 하고 북사에서 열도 신라의 왕으로도 표현되는 인물이 일본서기에서는 다께우찌 스쿠네武内宿禰로 표현이 됩니다. 가쓰라기 소쯔히코는 이 다께우찌스쿠네의 아들로 신찬성씨록 즉 고대 일본의 족보집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한반도 사서에서 박제상을 죽인 것은 왜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가쓰라기 소쯔히코가 열도에 있던 사람이므로 왜왕이란 표현이 잘못된 것은 아닐겁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열도의 백제 세력이라고 한다면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지요.
그렇게 놓고 보면 어째서 하나의 사건이 381년 ( 3주갑 인상 가정) , 415년 , 419년 이렇게 들쑥 날쑥한지에 대해서 이런 가설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381년 당시 열도의 상황은 이랬습니다. 369년 칠지도에 적힌대로 왜의 백제 후왕이 되었던 사람이 열도 신라인들과 연합하여 본국 백제에 반기를 듭니다. 열도에 새로운 권력이 창출되던 시기입니다.
그리고 385년 근구수왕 사망 이후에 백제는 침류왕 진사왕 등이 난립하는 분열기를 겪습니다. 415년 419년은 이런 시기입니다. 413년 장수왕의 등극으로 인한 가야계열 왜씨 왕조가 시작되었다가 425년에 이 가야계열 왜씨 왕조들은 독자적으로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즉 시기는 다르지만 이 시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열도에서 한번은 백제 세력에 의해 또 한번은 가야 세력에 의해 새로운 권력이 탄생하던 시기라고 하는 것이지요. 현재 저는 이 사건이 단순한 인질구출 작전? 이라는 시각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 아마도 박제상이 속해있던 영해박씨 세력은 단순한 귀족 가문이 아니라 고대의 백제 신라 가야가 복잡하게 얽힌 열도에서 누가 승리자가 되는가에 대한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던 독자적 세력이었을 겁니다.
여기서 박제상으로 상징되는 영해박씨 세력은 한반도 신라의 편을 들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가설의 단계이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제상을 죽인 왜왕이란 결국 그것이 백제 세력이냐 가야세력이냐 하는 의문은 남아있지만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왜 고유의 세력 이런 것이 아니라 한반도 도래계 세력이란 것 말입니다.
이제 처음에 이야기 했던 이덕일 소장의 "우리안의 식민사관 개정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이야기 해보죠. 박제상이라는 재료를 통해서 법의 잣대를 가지고 역사를 통제한다는 시도가 어떻게 느껴지시나요. “ 박제상이 일본 인질로 간건 사실이잖아?” 하면서 물어보는 그런 것 말입니다. 참 무모하지요?
사실 국가 권력을 통해서 역사를 통제하려고 하는 시도는 역사에서 흔히 있었던 사건입니다. 한무제는 사마천에게 궁형이란 치욕적인 압박을 가했지만 결국 자기 마음대로 역사를 서술하지 못했고 연산군이 자행했던 사화들도 그 발단은 사초문제로부터 출발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최후는 잘 알고 계실겁니다.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했나요. 역사 서술을 법적인 강제력으로 막으려고 했던 시도 역시 이제는 또 하나의 역사가 되어 “ 우리안의 식민사관” 개정판의 일부분이 되어 기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역사가란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이 책을 읽습니다.
책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