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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사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에 담겨 있는 우리 역사의 진실... 그땅은 우리 역사의 터전

작성자동이|작성시간21.01.23|조회수1,658 목록 댓글 0

안녕하셔요. 이번에는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기록에 대해 좀더 살펴 보겠습니다.

동경요양부는 하북성의 난하 지역으로 추정되며, 여기에는 우리 고대사의 숨겨진 많은 진실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주로 동경요양부의 상대(上代) 기록들을 중심으로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1.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상대(上代) 기록의 해석

東京遼陽府 本 朝鮮之地。周武王釋 箕子囚, 去之朝鮮, 因以封之. 作八條之教, 尚禮義, 富農桑, 外户不閉, 人不為盜. 傳四十餘世, 燕 屬 真番 朝鮮, 始 置吏 築障. 秦 屬 遼東 外徼. 漢初 燕人 滿 王 故空地. 武帝元封三年, 定 朝鮮 為 真番 臨屯 樂浪 玄菟 四郡, 後漢 出入 青幽二州, 遼東 玄菟 二郡 沿革 不常.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본래 조선(朝鮮)의 땅이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감옥에서 풀어주자 (기자는) 조선으로 갔고, (무왕은) 이로 인해 그를 봉해 주었다. (기자는)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만들어 베푸니, (백성들이) 예의를 숭상하고 농사와 누에치기로 부유해져 바깥 문을 닫지 않아도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40여세를 전하여 연(燕)나라가 진번(眞番) 조선(朝鮮)을 복속시키고 처음으로 관리를 두고 요새를 설치하였다. 진(秦)나라 때 요동의 바깥 요새에 속하였다. 한(漢)나라 초기에 연나라 사람 위만(滿)이 옛 공지에서 왕이 되었다. (한)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조선을 평정하여 진번,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도(玄菟) 4군(郡)을 설치하였다. 후한(後漢) 때에 청주(靑州)와 유주(幽州)에 출입하였다. 요동군과 현도군은 연혁이 일정하지 않았다.

漢末 為 公孫度 所據, 傳子 康 孫 淵 自稱 燕王, 建元紹漢, 魏滅之. 晉 陷 髙麗, 後歸 慕容垂, 子寳 以勾麗王安 為 平州牧 居之. 元魏 太武遣 使 至其所居平壤城, 遼 東京 本此. 唐髙宗 平 髙麗 於此 置 安東都䕶府, 後為 渤海大氏所有. 大氏 始保 挹婁之東牟山, 武后萬歳通天中 為 契丹盡忠 所逼, 有 乞乞仲象者 度 遼水 自固, 武后 封為 震國公. 傳子 祚榮 建 都邑 自稱 震王, 併吞 海北, 地方五千里, 兵數十萬. 中宗 賜 所都 曰 輝罕州, 封 渤海郡王. 十有二世 至 彛震, 僭號 改元 擬建 宫闕, 有 五京十五府六十二州, 為 遼東盛國. 輝罕州 即 故 平壤城也, 號 中京顯徳府.

한나라 말기에 공손탁(公孫度)이 점거하여 아들 공손강(公孫康)을 거쳐 손자 공손연(公孫淵)은 스스로 연왕(燕王)을 자칭하고 소원(紹漢)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위(魏)나라가 멸망시켰다. 진(晉)나라가 고려(高麗 ; 고구려)를 함락시켰고, 나중에는 모용수(慕容垂)에게 귀속하였다. 아들 보(寶)는 고구려 왕 안(安 ; 광개토왕)을 평주목(平州牧)에 임명하여 거주케 하였다. 원위(元魏 ; 북위) 태무제(太武帝)가 그들이 거주하는 평양성(平壤城)에 사신을 보냈으니, 요(遼)나라 동경(東京)이 바로 이곳이다.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지만, 나중에 발해(渤海)의 대씨(大氏)가 차지하였다. 대씨는 처음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후(武后 ; 측천무후) 만세통천(萬歲通天) 년간에 거란(契丹) 이진충(李盡忠)이 핍박을 받자 걸걸중상(乞乞仲象)이 요수(遼水)를 건너 스스로 지키니 무후가 진국공(震國公)에 봉하였다. 아들 대조영(大祚榮)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진왕(震王)이라 자칭하였다. 발해 북쪽을 영역을 병합하니 영토가 사방 오천리나 되고, 병사가 수십만이나 되었다. 중종(中宗)이 도읍한 곳에 홀한주(忽汗州)라는 명칭을 내려주고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책봉하였다. 12대 지나 대이진(大彝震) 때에 참람되게 연호를 고치고, 궁궐을 본따서 짓고, 5경(京) 15부(府) 62주(州)를 두었으니 요동에서 가장 번성한 나라가 되었다. 홀한주는 바로 옛 평양성으로, 중경현덕부 (中京顯德府)라고도 한다.

위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에서 벌어진 역사적인 내용들을 시대적 흐름순으로 다시 간략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자가 봉해짐(기자조선) > 연나라 진개의 고조선 공격(진번조선 복속) > 의 동쪽 요새(나라 경계) > 위만이 도읍함(왕검성) > 한무제의 평정(한사군) > 공손탁~공손연(연왕/연국) > 위나라 점령(위나라) > 고구려 점령 > 진이 다시 점령(평주) > (미천왕 낙랑군 정벌 사건) > 모용수에 귀속(후연) > 광개토태왕 정벌(고구려 강역 회복) > 북위 태무제가 고구려(장수왕)에 사신을 보냄(평주 평양성) > (고구려 수, 당과의 전쟁) > 당나라 고종이 평정(안동도호부) > 대조영 도읍(발해) > 요나라 점령(동경요양부)

내용을 보면 우리 고대 역사의 주요 사건과 흐름이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위 기록에서 광개토태왕에게 평주목(平州牧)에 임명 했다든지,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책봉했다 든지의 내용은 아마 주변국을 제후국, 신하국 처럼 낮추기 위한 기록으로 보입니다.)

또한 이 기록에서 주목할 점은 그 동안 잘못 알고 있던 발해, 즉 대조영의 도읍지도 한사군의 지역과 같은 난하 유역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왜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불리웠는지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한 중원과 우리와의 역사적인 대립 지점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 지역을 차지하려고 얼마나 치열 했는지 알수 있습니다.

이 기록은 한사군의 위치와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을 모두 난하(요수)의 위치로 보면 모두 해석이 되는 기록입니다.

이렇게 분명하게 역사적인 흐름과 내용이 있음에도 왜 우리는 이런 엉터리 역사를 배우고 있는 걸까요?

우리 역사의 사건들을 한반도로 모두 국한시킨 동북공정, 식민사학의 역사관을 배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역사기록에 대해 강단사학들 및 그 추종자들은 이 기록은 믿을 수 없다. 역시 요사는 잘못된 기록이 너무 많다... 도대체 요나라의 동경요양부가 한반도 북한 평양까지 였다니 도대체 그 크기가 얼마나 크다는 거냐? 이걸 믿는 사람이 있느냐. 허구다. 환빠라든지 등등의 민족주의 역사학에 대한 비하를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런 역사의 내용을 이해 못하는 이유는 아직도 한사군의 위치, 고조선 평양성, 장수왕의 평양성를 모두 북한의 평양으로 이를 불변의 진리인 마냥 고정하여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식민 사관에 쩌들어 본인들 스스로 얼마나 역사에 대해 무지한 상태임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체 잘못된 역사를 배우고 있는 게 우리 역사의 현실입니다.

그럼 강단사학자들이 믿을 수 없다며 주장하고 있는 요사의 동경요양부 기록에 대해 다른 사서들을 통해 검증해 보겠습니다.

2.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기록의 교차 검증

1) 당 수서 배구전(裴矩傳)

첫번째는 수서와 당서에 실려있는 배구전의 기록입니다. 즉 이것은 수당시기 유명한 재상이던 배구(裴矩)가 수양제 양광에게 올렸던 상소문 가운데 나오는 내용으로 수문제 양견의 아들인 양양(楊諒)의 반란 사건으로 인해 고구려 정벌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중간에 실패로 돌아간 점을 상기시키면서, 지금 고구려 땅(평주)으로 되어 있는 옛 고죽국 땅을 빨리 되찾아 와야 하며 언제까지나 맥족인 고구려 땅으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는 사실을 수양제에게 강조하여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矩因奏狀曰 高麗之地 本孤竹國也 周以之封於箕子 漢世分爲三郡 晉氏亦統遼東 今乃不臣 別爲外域 故先帝疾焉

欲征之久矣 但以楊諒不肖 師出無功 當陛下之時 安得不事 使此冠帶之境 仍爲蠻貊之列乎

배구(裴矩 : 557-627)는 상소를 올려서 말했다. 고구려 땅은 본래 고죽국이었습니다. 주周나라 시대에는 그 지역을

기자에게 봉했고 한漢나라 시대에는 나뉘어 3군으로 되었으며 진晉나라 때에도 역시 요동에 통합되었습니다. 지금

은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따로 외역이 되어 있으니 그러므로 선제先帝(수문제)께서 미워하여 그들을 정벌하고자

한지가 오래된 것입니다. 다만 양양(楊諒)이 불초하여 군사를 출동했으나 공로가 없었습니다. 폐하의 시대에 당하여 어찌 그 일을 마무리 짓지 않으시고 중국이 다스리던 이 지역을 아직도 그대로 만맥(蠻貊 : 고구려)의 대열에 있도록 놓아둘 수가 있겠습니까?

고구려의 옛땅(고죽국) > 기자를 봉한곳(기자 조선) > 한나라 (한사군 설치 )> 진晉이 요동(평주)에 통합

평주를 요동에 속하게 한 기록은 진나라의 역사서인 진서지리지(晉書地理志)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咸寧二(276)年 十月 分遼東 昌黎 玄兎 帶方 樂浪 五郡爲平州 後還合爲幽州

진서지리지(晉書地理志) : 요동, 창려, 현도, 대방, 낙랑 5군으로 나누어 평주(平州)로 삼았으나 나중에 다시 합하여 유주(幽州)로 삼았다

이 지역은 평주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서 요사의 동경요양부 기록과 일치합니다.

2) 두우의 통전(通典)

두우(杜佑)가 편찬한 통전(通典) 권 180, 안동부(安東部)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安東大都護府 舜分靑州爲營州 置牧 宜遼水之東是也 春秋及戰國 竝屬燕 秦二漢曰遼東郡 東通樂浪 晉因之 兼置平州 後魏時 高麗國都其地 大唐總章元年 李勣平高麗 得城百七十六 分其地爲都督九 州四十二 縣一百 置安東都護府於平壤城 以統之 用其酋渠爲都督刺史縣令

안동대도호부 : 순임금이 청주(靑州)를 분할하여 영주를 만들었고 목牧을 배치하였으니 마땅히 요수遼水의 동쪽이 이곳이다. 춘추시대 및 전국시대에는 아울러 연燕나라에 소속되었고 진秦나라와 전한, 후한시대에는 요동군이라 하였다. 동쪽으로 낙랑과 통하였다. 진晉나라 시기에는 그대로 따랐으며 겸하여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후위後魏시대에 고구려가 그 지역에 도읍하였다. 대당大唐 총장總章(당나라 고종의 연호) 원년(668)에 이적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176개 성을 얻어 그 지역에 도독부 9, 주42, 현 100개로 분할했다.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통치하​고 그 지역의 토박이 지도자들을 도독, 자사, 현령으로 삼았다.

순임금(우(虞)나라) > 연나라(진개의 고조선 정벌) > 진/한나라 (요동군) > 진晉나라(평주 설치) > 고구려 도읍(후위시기, 장수왕 평양성) > 당나라 (안동도호부)

기자에 대한 내용은 없으나 평주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서 요사의 동경요양부 기록과 일치합니다.

3)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

남송 말년의 학자 왕응린(王應麟:1223-1296)은 통감(通鑑)의 지리에 관한 내용을 간추려 주석을 낸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에서 오늘날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에, 晉나라 때는 평주가 설치되었고 북위시대에는 고구려가 거기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당나라 때는 그곳에 안동도호부가 설치된 사실이 보다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晉置平州 後魏時 高麗國都其地 唐置安東都護府

진晉나라 때 평주를 설치했던 지역에 후위 시기에는 고구려가 그곳에 도읍을 정하였고 당나라 때는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었다.

진晉나라(평주 설치) > 고구려 도읍(후위시기, 장수왕 평양성) > 당나라 (안동도호부)

진나라 부터 당나라까지 평주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서 요사의 동경요양부 기록과 일치합니다.

4) 노사(路史)

노사(路史)에 조선성, 낙랑, 고구려는 모두 노룡현에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내용은 노사(路史) 27권 ‘조선’ 조항에서도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箕子後 封遼之樂浪 今平州之盧龍 有朝鮮城 故武德以遼爲箕州八年 而高麗亦其地

기자는 뒤에 요(요수)의 낙랑에 봉하였다. 오늘날의 평주 노룡현 지역으로 여기에 조선성이 있다. 그러므로

무덕 연간에는 요주를 기주로 삼았다. 무덕 8년이다. 그런데 고구려도 또한 그 지역(평주 노룡현)에 있었다

이 자료는 노사(路史)의 저자 나필(羅泌)의 기록으로 송나라 당시의 평주 노룡현, 즉 오늘날의 하북성 진황

도시 노룡현에 기자조선과 한사군의 낙랑군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아울러서 고구려도 역시 그 지역에 위

치하고 있 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 사료들을 통해 요사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의 기록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일관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관된 기록으로 같은 지역의 역사적 사건임에도 분명 같은 기록임에도 강단사학에서는 요사의 동경요양부는 요령성 요양으로 비정하면서도 고조선의 왕검성, 한사군, 장수왕의 평양성을 모두 북한의 평양으로 당나라가 설치한 안동도호부는 대동강 유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강단사학의 학문적인 수준은 한심함의 극치라고 밖에 볼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는 고대로 부터 중국에 속국(屬國)이고 중국의 한족(漢族)이 한반도를 다스렸다고 하는 중국의 동북공정 역사관이 우리 역사 교육에 그대로 반영된 결과입니다.

요사를 부정하는 그런 강단사학자들의 주장대라면 요사 뿐아니라 수서, 당서, 통전, 통감, 노사도 다 거짓이고 믿을 수 없는 역사 기록이라고 해야합니다.

우리 민족의 고대사들을 기본적인 역사 사료들에도 전혀 부합하지도 않는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일반 국민들이 역사를 잘 모른다는 이유로 중국의 동북공정, 일제 식민사학을 추종하고 거짓말로 국민들을 기만하고 속이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스스로 바른 역사를 공부하여, 우리 관점의 참된 민족사로 바로 잡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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