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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20:1-22:53 "내가 여호인줄 알리라." ubf말씀강해

작성자전헌석|작성시간23.03.12|조회수28 목록 댓글 0

내가 여호와 인줄 알리라

말씀/열왕기상 20:1-22:53

요절/열왕기상 20:28

하나님은 나라도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가있는 자들에게 열왕기서를 통해 주고자 했던 메시지가 있으셨습니다. 일종의 열왕기서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표요, 소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목표는 바로 오늘 말씀의 제목입니다. 내가 여호와인줄을 알리라.” 오늘은 하나님께서 이 목표를 이루고자 얼마나 애를 쓰고 계시는가를 보여줍니다.

 

1. 여호와인줄 알리라(20)

20장은 이스라엘과 아람과의 전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 아람은 작은 규모의 왕국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벤하닷이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그는 아람의 소왕들 32명을 모아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이스라엘의 아합 왕을 협박하였습니다. 너의 금과 은, 그리고 아내들과 자녀들까지 다 내놔라.” 아합으로서는 정말 수치스럽지만 당할 힘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다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벤하닷이 조건을 업 시켜서 내일 신하들을 보내 집을 다 뒤져서 마음에 드는 것은 다 가져오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자기들 마음대로 다 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절할 수밖에 없는 요구 조건을 내세워 결국 사마리아를 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나라의 장로들을 불러서 물었더니 어차피 당할 바에는 벤하닷의 요구를 거절하자고 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벤하닷은 사마리아 성을 잿더미로 만들어 깨어진 조각하나도 남지 않게 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러자 아합 왕도 군인은 갑옷을 입을 때가 아니라 벗을 때에 자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고 대응한 것입니다. 말은 용감하게 했지만 이스라엘은 벤하닷이 이끄는 아람군대를 전혀 당할 힘이 없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벤하닷은 당장에 이스라엘 진영을 치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그의 말대로 사마리아가 잿더미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위기입니다.

 

이때 한 선지자가 아합 왕에게 전한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이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아합이 점점 더 악한 죄를 쌓아온 것을 보아 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벤하닷을 통하여 아합과 악한 이세벨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합은 정말 북이스라엘의 최악의 왕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왕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아합을 도와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첫째로 자기 백성을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는 하나님의 마음 때문입니다(벧후 3:9,10). 하나님께서 아합과 우상 숭배자들을 멸하려 하신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은 벤하닷이 아니라 하사엘을 통해서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비전을 보여 주실 때도 그의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당장에 주시지 않고 사백 년 후에 기업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아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5:16). 하나님은 무조건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고 그 죄악이 목에까지 찾을 때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아람 군대를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겠다고 하시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여호와인줄을 알리라.” 왜 하나님이 아함과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들이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알아주는 것입니다. 이 한 가지 소원을 이루시고자 하나님은 아합이 비록 최악의 왕이지만, 그를 도와주고자 하셨습니다.

 

선지자의 말을 들은 아합은 물에 빠진 자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묻습니다. 누구를 통하여 그렇게 하시리이까?” 그러자 각 지방고관의 청년들을 통해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누가 싸움을 시작하는가 묻는 질문에 왕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각 지방 고관의 청년 232명과 싸움에 나갈 7000명을 모았습니다. 반면 아람의 군대는 십만이 넘었습니다. 이것은 군사학적으로 하면 게임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서 수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람 군대를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면 아람 군대가 아무리 큰 군대이고, 이스라엘 군대는 형편없는 군대라 할지라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기드온 300용사로 메뚜기 떼와 같은 미디안 군대를 격파하도록 하셨습니다(7:7).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한편 벤하닷도 이스라엘이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알고 함께 하는 32명의 왕들과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고 취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청년들이 올 때에도 항복하러 오는 줄로 알고 무시합니다. 그러나 청년들과 따르는 자들이 긴장을 풀고 있던 아람군대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놀란 벤하닷은 말을 타고 달아나고, 아람군대는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아람을 크게 이겼습니다. 전략적으로 보면, 벤하닷의 방심과 교만이 그를 망하게 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아합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대로 했을 때, 적군을 쳐서 무찌르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기적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전혀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돈을 꿀 때와 갚을 때의 마음이 다르듯이 위기를 벗어나자 이들의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싹 바뀐 것입니다.

 

이런 아합 왕에게 선지자는 해가 바뀌면 다시 아람 왕이 올 것이니 힘을 기르라고 하였습니다. 쫓겨 간 아람 왕의 신하들도 왕에게 그들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강하였지만 우리가 평지에서 싸우면 반드시 우리가 강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전투 지휘 체제 개편을 단행했습니다. 즉 전투 지휘 능력이 부족한 왕들 대신에 실제 전투 지휘 능력이 뛰어난 실무급 장관들을 지휘관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군대와 말과 병거를 보충하여 전력을 보강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만 하면 이길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잠언 16:9절은 말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아람왕도 신하들의 조언을 받아들려 다음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해가 바뀌자 다시 군대를 모아 아벡에서 이스라엘과 싸우고자 하였습니다. 그동안 준비한 것이 있기에, 이번에는 이스라엘도 마주 나가서 그들 앞에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은 두 무리의 적은 염소 떼와 같고 아람 사람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적은 염소 떼는 염소새끼를 말합니다. 그것도 두 무리입니다. 전쟁을 준비한다고 했지만, 이스라엘은 전혀 아람의 상대가 안 됩니다. 아람의 군사는 127천명이나 되었습니다. 또 다시 이스라엘의 위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전쟁을 하나마나입니다. 그런데 또 변수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승리를 주고자 작정하신 것입니다. 잠언 19:21절에 보면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계획을 세우고 철저하게 준비를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것은 공부나 직장 생활이나 가정생활 등 우리의 일상 생활 모든 면에 적용 됩니다. 반면에 준비가 좀 부족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됩니다. 승리는 결코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가장 먼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상황에 관계없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아합 왕에게 나아와 고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이 아니라 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붙이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아람 사람들은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이 아니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자존심을 건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교만을 꺾으시고 그들을 심판하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인 줄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알려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서로 진을 대치한 지 7일째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이스라엘이 십만을 죽였습니다. 남은 자가 아벡으로 도망했는데, 갑자기 성벽이 무너져 27000명이 성벽에 깔려 죽었습니다. 벤하닷은 도망하여 성읍에 이르러 골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떻게 전세가 형편 없이 열세인 이스라엘 군대가 하루에 아람 보병 십 만병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천지만물과 인생의 생사화복을 그 뜻대로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만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합은 두 번의 승리의 사건을 통해서 자기가 숭배하는 바알은 헛된 신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회개하고 그 마음을 돌이켜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20:42절에 보면, 하나님은 교만한 아람 왕 벤하닷을 아합을 통해서 멸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합은 벤하닷을 살려주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벤하닷의 신복들은 아합의 약점을 알고 자기들이 굵은 베로 허리에 묶고 테두리를 머리에 이고 이스라엘 왕에게로 나아가 살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면 혹시 벤하닷의 생명을 살려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생각대로, 아합은 그를 내 형제라고 하면 그를 살려 보내주었습니다. 그동안 벤하닷은 아주 강력하게 협박하고 위협하였습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닙니다. 그러면 언제라도 다시 와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회가 왔을 때, 확실히 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살려 보내었습니다. 이것은 아합의 정치적인 선택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를 댄다고 할지라도, 아합은 승리의 날에 이 승리를 주신 하나님이 그에게 없습니다. 자기 생각, 자기 판단만을 앞세워서 나름대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답답하고 힘들 때, 위기의 때에는 하나님의 방향에 따르지만 조금 나아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 잊어버리는 은혜 망각증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도우시며 그에게 하나님을 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을 알려주고자 하실까요? 열왕기상을 통해 본대로, 이스라엘의 고질적인 문제는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전혀 무시하고 안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 불신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조금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우상도 같이 섬기는 것입니다. 현재 아합과 이스라엘은 하나님도 섬기고, 비를 주관하는 바알 신도 섬기고 있었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 거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여호와 편에 분명히 세우고자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아람 왕과의 중과부적의 싸움에서 2번이나 대승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바알이 참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아람 왕은 하나님은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고 까불었습니다. 하지만 평지에서도 이스라엘이 완전 승리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산의 신일 뿐 아니라 골짜기의 신이기도 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신이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인도에 가면 삼륜오토바이를 개조해서 만든 릭샤라는 것이 있습니다. 서민택시입니다. 그런데 그 릭샤를 모는 운전수 앞에 꼭 신들의 그림을 여러 장 붙여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상이나 마리아 상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반가운 마음에, 기독교인가 하고 물어보면, 아니라고 합니다. 왜 그런데 예수 상이나 마리아 상을 두냐고 물으면 많은 수록 좋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에게 신이라고 하는 것은 필요에 따라 신을 수 있는 신발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으면 불안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만을 믿자니 그것도 불안합니다. 또 허전합니다. 그래서 자기 필요에 따라서 이런 저런 온갖 우상들을 섬깁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자기 욕심이고, 자기 편리주의를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광대무변하신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교회 밖으로 나가 현실에 맞닥 뜨리 게 되면, 달라집니다.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입학의 신이 필요합니다. 입학 시즌이 되면 기독교 신자들 중에 점쟁이들을 찾아 가는 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취업의 신이 필요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연애의 신이 필요하고, 물질적인 성공을 위해서는 성공의 신이 필요하고, 자녀를 낳기 위해서는 출산의 신이 필요하고,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병 고치는 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과 입시의 신, 하나님과 취업의 신, 하나님과 연애의 신, 하나님과 성공의 신, 하나님과 출산의 신, 하나님과 병 고치는 신 사이에서 머뭇머뭇 거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붙들어야 할 것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 어떤 다른 것은 없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 중의 하나가 호세아입니다. 그는 망해가는 나라를 향해서, 그 백성을 향해서 외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6:3) 그는 나라가 망해 가니 개혁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 해결책이 있는데, 힘써 여호와를 알자는 것입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는 것은 온 마음을 받쳐, 집중하고 전심전력하여 여호와를 아는 일에 힘을 쏟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밤이 지나면 어김없이 새벽이 오듯이 하나님은 정확하게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비록 나라가 망하고 모든 것이 무너질지도, 여호와 하나님은 결실을 맺게 하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를 살아나게 하시고 결실을 맺게 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7:3). 하나님을 아는 것이 내 삶의 가장 소중한 지혜요, 영생입니다. 내 인생의 결실을 원한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삶의 다양한 문제들을 통해서라도 여호와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고 목표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힘써 알기를 기도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목표가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합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이나 날렸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행동했습니다. 이런 그에게 선지자의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친구를 통해 자신을 치게 하는 퍼포먼스를 통해서 아합 왕에게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그가 왕께 아뢰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그러자 왕이 근심하고 답답한 가운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제까지 잘한 것이 없지만, 하나님은 위기의 때마다 그를 도우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그가 알았다면 그는 이제라도 하나님께 엎드려 은혜를 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아합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2. 나봇의 포도원(21)

21장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아합과 이세벨의 이야기입니다. 왕궁 옆에 나봇이 조상 때부터 물려받아 가꾸는 포도밭이 있었습니다. 아합은 나봇에게 채소밭을 삼고자 하니 자기에게 팔라고 했습니다. 속마음은 멋진 포도원이 탐난 것입니다. 그런데 나봇은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포도원이라 팔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땅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땅을 하나님께서 각 지파에게 분배하셨고, 그 분배받은 땅을 대대로 물려받으면서 가꾸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은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관리자이므로, 임의로 사고 팔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합 왕에게 팔 수 없다고 말한 나봇에게는 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합도 할 수 없이 물러섰습니다. 그러나 낙심한 아합을 본 이세벨은 나봇이 사는 지역의 장로들과 귀족들을 선동하여 불량자 두 사람을 내세웠습니다. 그들을 통해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거짓증언을 하게 해서 사람들이 나봇을 돌로 쳐 죽이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인을 잃은 포도원을 이세벨은 아합이 차지하도록 했습니다. 이세벨은 십계명 중에서 살인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한꺼번에 어겼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합은 이 모든 것을 몰랐을까요?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도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았지만 결국 자기 욕심을 채우고자 같은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는 심각한 위기에서 두 번씩이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했지만, 그에게 전혀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명도 없고, 하나님의 정의도 없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자기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탐욕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합과 이세벨을 엘리야를 보내셔서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그가 행한 죄악들을 다 말씀하시며 그 집안을 다 쓸어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세벨에 대해서도 개들이 먹고 아합에 속한 자들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아합은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로 누우며 풀이 죽어 다녔습니다(27). 전혀 뜻밖의 모습을 아합이 보이고 있습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심판의 경고에 마음이 깨진 것입니다. 아합에게 현타가 온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아합의 달라진 모습은 아무리 독하고 악한 자라도 변화의 때가 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자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하나님은 심판의 경고 앞에서 마음이 낮아진 아합을 보시고 심판을 보류하셨습니다. 심판을 보류하신다는 것은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반면 그의 아들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는 심판을 받아야 하나요? 하나님은 악을 직접 행한 아합도 회개하고 돌이키자 심판을 보류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합의 아들도 제대로 하나님 앞에 살면 그 심판은 또 보류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잘못을 바로잡아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아합이든, 그 아들이든 누구든지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3. 자기를 의지한 자들의 결말(22)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이 3년이 지났습니다. 유다의 여호사밧 왕에게 이스라엘 왕은 아람이 차지하고 있던 길르앗 라못을 쳐서 되찾자고 하였습니다. ‘길르앗 라못은 길르앗 지역의 주요 요새입니다. 벤하닷은 자신들이 정복했던 땅을 다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살아 돌아간 다음에 입을 싹 닦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은 여호사밧을 끌여 들여 이곳을 되찾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자 여호사밧은 이스라엘의 왕에게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대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많은 유다의 왕은 좀 다릅니다. 이스라엘 왕이 선지자 400명에게 묻자, 이들은 올라가서 싸우면,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들은 바알의 선지자들이거나 아스다롯의 선지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사밧은 이들의 대답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선지자를 찾았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왕은 미가야 선지자를 통해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그는 자신에 대해 좋은 예언을 하지 않고 나쁜 것만 예언하기 때문에 자신이 그를 미워한다고 하였습니다. 그에게 여호와의 선지자인 미가야는 한 마디로 재수 없는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합이 듣기 좋은 말만 좋아하는 어리석은 자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여호와밧은 그를 불러 오라고 했습니다. 또 그 사이에 예언을 하는데, 다들 하나 같이 여호와의 말씀이 시드기야가 만든 철로 아람 사람을 진멸시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들은 여호사밧을 설득하기 위해 여호와의 이름까지 팔며 거짓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온 미가야도 올라가 치면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겨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합은 그의 태도에서 그의 말이 진실이 아닌 것을 눈치 채고 그를 추궁했습니다. 그러자 미가야는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 갈 것이라고 진짜 예언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전쟁에서 아합이 죽을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자 아합은 역시 그는 결코 좋은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저 사람을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미가야는 한술 더 떠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넣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아합 왕을 죽이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까지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시드기야가 와서 미가야의 빰을 치며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네게 말씀하셨느냐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미가야를 잡아 옥에 가두고, 자신이 평안히 돌아 올 때까지 죽지 않을 만큼의 떡과 물만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미기야는 끝까지 지지 않고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게 될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끝까지 아합 왕이 당할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그래도 아합 왕은 듣지 않고 여호사밧과 함께 길르앗 라못을 치고자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아합 왕은 미가야의 예언이 찝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사밧에게 자신은 변장을 하고 싸울테니 여호사밧에게 왕복을 입고 싸우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사병들이 입는 군복으로 갈아입고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자기만 살겠다고 꾀를 쓴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아합은 잔머리의 대가입니다. 아합은 그럴지라도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선지자의 예언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전쟁에 참전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도 그냥 전쟁에 참전하고 있습니다. 아합에 비하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그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자 아람 왕은 지휘관들에게 오직 이스라엘 왕을 목표로 삼으라고 하였습니다. 병거의 지휘관들은 왕복을 입고 있는 여호사밧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알고 공격하였습니다. 이에 놀란 여호사밧은 소리를 지르자, 지휘관들은 그가 이스라엘 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쫓기를 그쳤습니다. 여호사밧은 산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혀 이스라엘 왕 아합의 갑옷 솔기를 맞혔습니다. 화살이 갑옷 가슴막이 이음새 사이를 뚫고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은 치명상입니다. 우연치고는 대단한 우연이지만, 이것은 그를 향한 심판의 화살이 날아온 것입니다. 그가 꾀를 써서 사람은 속였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치명상을 입은 아합은 전쟁터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치열한 싸움 때문에 119가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피를 많이 흘린 아합 왕은 그대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가 흘린 피가 묻은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었는데,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았습니다. 이렇게 허망하게 아합의 시대가 끝이 났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날마다 인도해 가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도하고 계신 것 같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표의 첫 번째는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 인줄 알리라.” 내 삶의 이모 저모를 통해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가 나를 도우시는 이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두려워하게 됩니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자 힘쓰게 됩니다. 그리하여 내 삶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 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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