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씩 보내시며
말씀/마가복음 6:1-30
요절/마가복음 6:7, 찬송가/271장
예수님이 하신 위대한 일 중의 하나가 제자를 세우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를 세우므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마침내 유대를 넘어서 전 세계로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탄생’이라고 하지 않고 ‘제자양성’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도 12제자를 부르신 다음에 ‘제자양성’을 하셨습니다. 제자의 필수과목인 ‘말씀’에 대해서, 또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제자양성의 마지막 과목이 남았습니다. 그것은 ‘실전’입니다. 제자를 양성하는 이유는 잘 모셔놓고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써먹기 위해서입니다. 이 표현이 좀 거칠기는 하지만, 제자 편에서는 ‘쓰임받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운전도 시작할 때 주행연습이 필요하듯이 제자양성도 실전연습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바로 그 실전연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뒤로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무시 받은 사건과 세례요한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제자양성을 위한 실전파송을 하는 아주 기분 좋은 말씀의 앞뒤에 이런 사건을 배치한 것은 뭔가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양성을 위한 파송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또 이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1장, 예수님, 고향에서 배척받으시다(1-6).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제자들에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향하셨습니다. 나사렛 촌구석에 묻혀 사시던 예수님에게 지금 이 정도도 대단한 성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향입구에 ‘환영-나사렛에서 나신 하나님의 사람 예수’ 라는 플랜카드가 몇 개 걸려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길을 가는 제자들은 그런 기대 가운데 대접을 잘 받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떠했습니까? 안식일이 되어,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듣고 놀랐습니다(2).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상당한 능력과 감동 가운데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메시지 성경에는 “이 사람이 이렇게 훌륭한 사람인지 미처 몰랐다!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지혜로워지고 이런 능력을 갖게 되었을까?” 놀랐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어디를 가나 받는 일관된 반응입니다. 제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엄지 척!’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의 반응은 다른 곳과 전혀 달랐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에 놀라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거나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디서 누군가에게 지혜와 권능을 배워 가지고 와서 행한다면 폄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누구 아들이라고 할 때, 보통은 아버지의 이름을 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서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요? 요셉이 죽었기 때문일까요? 고향 사람인 이들은 예수님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였을 때, 누가 그 말을 믿었겠습니까? 이들은 당연히 마리아가 바람을 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태어난 예수님에 대해 결코 좋은 시각으로 봤을 리가 없습니다. 요셉이 속이 없어서 저런 아이를 자식으로 받아주었다고 여기고 넘어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입니다. 그렇게 30년이 지난 스캔들 아닌 스캔들이 지금 다시 수면위로 올라와 예수님을 비판하는 창끝이 되어 찌르고 있습니다. 또 이들은 예수님을 목수라고 지적합니다. “저 사람, 예전에 우리 집에 와서 문짝 고치든 사람인데, 왠 일이요? 오늘은 말씀을 다 전하네.” 한마디로 목수란 표현은 제대로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자신들처럼 먹고 살기 위해서 노동하던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갑자기 나타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것도 그냥 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들까지 놀라서 감탄할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는 싫었습니다. 메시지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느 새 그분을 깎아 내리고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그는 자기가 누구라고 저러는 것인가?”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대단한 말씀의 능력과 권세를 경험하면서도, 오히려 예수님을 무시하고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예전에 알고 있던 예수님께 대한 편견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반응에 대해서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선지자로 대접받고 있음을 비치셨습니다. 대단한 긍정이십니다. 그래도 무시 받는 것은 힘듭니다. 더구나 잘 아는 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환영할 줄 알았는데, 무시하면 더 힘듭니다. 그런데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욱 그러합니다. 친밀함은 오히려 경멸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아는 것이 원수라는 말도 있습니다. 너무 잘 아는 것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아내나, 또 자녀들이 주일에 은혜받기가 어렵습니다. 후배들이 말씀을 전해도 그러합니다. 더구나 지난 과거를 잘 아는 후배가 전하며 더욱 그러합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5절에,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다고 했습니다. 능력의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으로 감동도 나누었는데, 그것으로 끝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많이 겪습니다. 내가 받은 복음, 내가 가진 신앙을 나누고 싶은데, 가족이나 친구가 나를 배척합니다. “얘, 요즘 이상해졌어?”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배척당하시는 모습을 왜 제자들에게 그대로 보여주셨을까요? 지금 예수님은 능력이 없어서, 힘이 없어서 이렇게 무시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선지자의 모습이라고 하시며 묵묵히 감당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자기 비움입니다. 겸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앞으로 이 시대의 선지자로서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은 제자들이 겪을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배척을 당하는 것은 힘이 없어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을 받은 제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고향 방문은 제자들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코스, 일종의 정신무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복음 때문에, 가족에게서, 친구들에게서 배척을 당하고 있는 분이 계신다면, 그는 제자양성 코스에 들어왔다고 여기고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또 제자의 삶이란 인정과 영광 받는 것이 아니라, 배척당하고 무시당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물 선교회에 권다니엘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전 세계 오지지역에 가서 우물을 파주고 선교를 하십니다. 그런데 자기 친족 중에 이런 자기를 인정해 주고 후원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가는!, 허구한 날 오지 가서 뭐 한다냐?” 오직 어머니만이 아들이 오지에 가서 고생한다며 안타까운 마음에 후원계좌로 후원해 주신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친족들에게 배척하니 배척을 받고 계십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 당시나 오늘이나 똑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를 잘 알고, 감당하므로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장, 예수님, 제자들을 둘씩 보내시다(7-13)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셨지만, 예수님은 계속해서 모든 촌에 두루 다니며 가르치셨습니다. 인정을 못 받으면 낙심할 수도 있는데, 오히려 예수님은 기죽지 않으시고 이제 본격적으로 제자양성에 마지막 과목인 실전훈련을 하고자 하셨습니다. 7절을 읽겠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을 둘씩 둘씩 짝 지워 보내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혼자 보내면 더 빡세게 훈련이 되지 않을까요? 둘씩이면 6팀밖에 못 보내지만 혼자 보내면 12팀을 보낼 수 있으니 더 좋지 않을까요? 왜 둘씩일까요? 율법에 따라 두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증언에 효력이 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둘씩 전도해야 어려움도 잘 감당할 수 있으니 그랬을까요? 예전에 한 사모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혼자 캠퍼스에 전도를 나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두 번 거절을 당하자, 마음에 낙심이 밀려와, 학교 카페에 가서 커피 사 먹으며, 양들 관상만 보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둘이 가면, 특히 후배랑 같이 전도를 나가면 다릅니다. 돌아오고 싶어도 후배 때문이라도 좀 더 도전하게 되고 끝까지 더 하게 됩니다. 이렇게 둘이 같이 하게 되면 서로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처음부터 제자들을 둘씩 짝 지워 파송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보내시면서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여 귀신에 포인트를 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처음 사역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처음부터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은 메시아가 오셨다는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에 따른 것이었습니다(스3:12). 이 때문에 예수님도 처음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쫓는 것으로 자신이 새로운 시대의 구원자, 메시아이심을 선포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그 사역의 방식대로, 제자들도 둘씩 나가서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쫓는 사역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제자들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또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영적인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어떤 지식과 기독교 교리, 기독교 철학을 단순히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성경의 지식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곧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각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이 능력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 능력으로 나타나는 일은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 그 똘마니들인 더러운 귀신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역을 확장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싸움입니다. 그래서 권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권능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무작정 보내시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마치 조선시대, 암행어사에게 그냥 가서 일하라 하지 않고 마패를 준 것과 같습니다. 이 권능은 복음을 전하는 오늘 우리에게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권능을 주셨음을 믿고 나가면 발휘가 됩니다.
그런데 권능은 주시지만, 다른 것은 다 두고 가도록 하십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유명 여행 유튜버인 곽튜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뭐냐는 질문에, 핸드폰과 신용카드라고 했습니다. 즉 두둑한 여행 경비만 있으면 핸드폰으로 비행기 예약부터 시작해서 여행 갈 나라에 호텔까지 다 예약이 된다고, 꼭 이 두 가지만 챙기시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행하려면 먼저 여행 경비가 두둑해야 안심이 됩니다. 그리고 캐리어에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옷입니다. 신발도 보통 두 개는 챙깁니다. 이 정도는 준비해야 여행이 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챙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돈 다 가지지 말고, 심지어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뭔 소리입니까? 그냥 막대가 하나 들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행이 아니라 급하게 떠나는 모습입니다.
왜 이렇게 하라고 하셨을까요? 돈도 옷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가도록 하셨다고 많이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이를 흉내 내어 모 선교 단체는 매년 여름에 ‘거지 전도단’를 꾸려 전국으로 보냅니다. 아무 것도 주지 않고 도시나 농촌에 몇 명씩 떨구어 놓고 알아서 살아남아서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나름 믿음도 체험하겠지만, 정말 고생들을 많이 합니다. 또 시골 교회에서는 이런 거지 전도 단이 와서 재워 달라, 먹을 것을 달라고 해서, 힘들다고 합니다.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치는 것입니다. 아무튼 마치 해병대 생존 훈련 비슷한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할까요? 그런데 그것이 꼭 맞고 필요하다면 해야겠지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방향주신 모습은 오직 믿음으로 가도록 한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이들의 모습은 사실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습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급하게 떠날 때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제자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출12:11). 또 이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신 복장은 새 출애굽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출애굽의 복장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복장은 하나의 유니폼으로 이들의 역할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들은 곧 새 출애굽의 인도자들로서, 예수님을 통해 시작되는 새 구원의 전파자들입니다. 제자들은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새 시대의 증인들입니다. 이 시대 오늘 우리의 역할도 예수님을 통한 새 출애굽의 전파자들이요, 새 시대의 증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패션만이 아니라, 삶의 모습까지 방향을 주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전도지에 가서 어떤 집에 머물렀는데, 음식은 너무 안 맞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고생스럽습니다. 그런데 옆집은 모든 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럼 옮기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떠나기까지 거기에 있으라고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반찬이 별로 없다고 이리 저리 옮겨 다니고 그러면 보기에 좋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떠나버리면 그 집은 힘들 것입니다. 이 때문에 끝까지 남아서 불편함을 감당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전도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습도 하나의 중요한 전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이 곧 메시지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음을 전해서 받아들이면 좋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린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이방지역을 여행하고 돌아올 때 하는 것입니다. 상종을 않겠다는 제스처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방지역이 아니라, 유대지역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하라고 하면 유대지역은 그 의미를 알기 때문에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을 향해서 분명히 경고하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너희들은 이방인과 똑같이 불결한 자요,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된 자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가 유대인이라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방인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예수 복음을 통한 새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보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곧 이방인과 같습니다. 또한 이것은 결과에 대한 책임이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있지 않고 복음을 듣는 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복음을 전하다보면, 그 결과에 따라 마음이 춤을 춥니다. 잘되면 당연히 좋지만, 잘 안되고 계속 거절당하면 마음이 위축됩니다. 나는 전도체질이 아닌가봐 하는 낙심이 들어옵니다. 그러나 그 책임이 전도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는 자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결과에 매이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결과에 매이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전도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몇 가지 방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둘씩 나가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나가서 ‘회개하라’고 전파했다고 했습니다. 가장 먼저 전한 메시지는 회개입니다.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나오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신 방법이기도 합니다(막1:16). 그런데 회개한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키는 것인데, 사람이 자기가 잘못이 있다. 내가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잘못을 지적하면서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끝까지 자기를 변호하고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아담 때부터 해왔던 인간의 질긴 본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출발은 회개입니다. 회개가 없으면 복음이 없습니다. 회개가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습니다. 회개해야 내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죄가 떠나고 더러운 귀신도 떠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회개하라고 전파했습니다. 또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습니다. 이들의 첫 번째 실전 훈련은 대 성공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작은 예수의 몫을 훌륭히 해 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한 걸음, 한 걸음 예수님의 소망에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3장, 세례요한의 죽음(14-29)
먼저 제자들의 전도여행으로 인한 영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제자들이 전도여행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으니, 제자들의 이름이 드러나야 할 것 같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조나단 에드워드의 부흥운동, 찰스 피니의 부흥운동, 요한 웨슬레의 부흥운동이란 명칭을 듣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의 부흥운동, 요한의 부흥운동이라며, 제자들의 이름이 드러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이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제대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전도가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전도는 단지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귀신이 쫓겨나고 병을 고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전도는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예수님 중심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세워지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의 고백에서 예수가 드러나는 것이 건강한 전도입니다. 그런데 이를 들은 헤롯 왕은 자신이 죽인 세례요한이 살아났다. 그래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났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헤롯이 어떻게 세례요한을 목 베어 죽였는가를 말합니다.
헤롯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세례요한이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자 헤롯은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헤로디아는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기회만 보고 있었습니다.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딸 살로메가 헤롯의 생일날에 춤을 쳐서 헤롯의 마음을 녹인 것입니다. 헤롯이 뭐든지 주겠다고 큰 소리를 치자, 살로메는 어머니 헤로디아의 코치를 받아서 세례요한의 목을 요구했습니다. 헤롯은 큰 소리를 친 것이 있기 때문에, 요한을 목 베어 그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살로메에게 주었습니다. 그렇게 요한은 세상에서 떠났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했습니다. 한 시대를 깨웠던 세례요한으로서는 참으로 허망한 죽음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 계속 이어집니다. 30절에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전도여행 보고대회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는 이야기와 돌아와서 전도보고를 하는 이야기 사이에 세례요한의 죽음이야기가 끼어 있습니다.
일명 샌드위치 모양입니다. 샌드위치는 그 속에 들어있는 것에 따라 맛이 달라집니다. 이 중간을 잘 해석해야 합니다. 왜 이를 끼워두었을까요?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시고 또 의로운 세례요한이 허망하게 죽은 이야기는 장차 예수님이나 제자들이 당할 일을 예고합니다. 그들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또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니 각오하라는 메시지로 들립니다. 그런데 고향에서 배척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요한도 그렇게 죽지만, 그것으로 다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과정일 뿐, 그것은 마지막 페이지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여는 페이지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돌아와 전도보고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의 죽음은 그 시대가 얼마나 절망의 시대, 어두운 시대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들, 제자들을 통해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즉 한사람, 요한은 죽었지만, 12 요한이 일어나 하나님의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조선에 옵니다. 그런데 그는 대동강변에 내리자마자 조선의 관리에게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것으로 그의 선교는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으면서 남긴 그 성경을 전해 받은 박영식은 그것으로 자기 집 벽에 발랐다가 후에 이를 읽고 최치량이 변화되어 자기 집을 교회로 내놓습니다. 이것이 평양장대현 교회의 시작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 땅에 와서 그 누구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죽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뿌려진 선교의 씨가 후에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례요한은 억울하게 목 베임을 당해 죽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전도여행을 나간 12제자들을 통해 새롭게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복음 때문에 당하는 배척, 심지어 어둠과 절망의 시대에서의 고통은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경제가 어렵습니다. 물가는 오르고 금리도 인상되어 여러 가지로 힘듭니다. 그런데 힘들고 어려운 것은 경제만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그 어느 때보다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어렵고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고향에서 배척받으시고, 당시 최고의 복음의 동역자로 할 수 있는 세례요한은 목 베임을 당해 죽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만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제 막 제자가 된 12제자, 푼내기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새로운 복음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세례요한이 죽음을 당하는 어두운 시대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며 새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힘들 때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 가장 어둡고 답답할 때, 밝은 날이 올 것을 믿는 사람,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새 일을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금 이 상황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앞으로를 내다보고 준비할 수 있는 비전을 우리 마음에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금 힘들고 어려운데 뭘 할 수 있겠어? 믿음 중심 지키는 것만으로도 큰 일 하는 것이야? 라고 할 것이 아닙니다. 이 다음을 준비하고, 이 다음을 기도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이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해 새 일을 이루시고, 새 역사를 시작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확장되는 새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