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원대로
말씀 /마가복음 14:32-72
요절 /마가복음 14:36, 찬송가/431장, 217장
지난주에 우리가 나눈 대로, 베드로는 절대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끝까지 예수님께 충성맹세를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하기보다 자기 고집을 내세우는 베드로도 대단합니다. 어찌 보면 그는 참 힘든 제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를 어떻게든지 그 자리에서 고치고자 하지 않고, 다만 미래의 실패를 예견하고 끝내는 예수님은 더 대단하십니다. 이 대단한 베드로와 예수님의 이야기는 오늘 말씀에서 진실이 밝혀집니다. 과연 누구의 말이 진실이 될까요? 베드로일까요? 예수님일까요? 무엇보다 이 진실게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1장,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2-42)
유월절 만찬이 끝났습니다. 이제 예수님에게 남은 것은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과 제자들은 겟세마네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틀’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에서 많이 있는 올리브 나무에서 나는 열매로 올리브기름을 짰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올 때마다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도 하고 쉬기도 했습니다. 만찬을 하고 배가 부른 제자들은 동산의 선선한 바람 속에서 아주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수제자 그룹인 베드로와 야고와 요한을 데리고 좀 더 동산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당할 십자가의 죽음을 알고 준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유다의 배반도 잘 감당하셨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이 다 흩어질 것을 아시면서도 의연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십자가를 지셔야 할 순간이 다가오자, 예수님의 마음이 바뀌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자 하셨으면서도 이렇게 힘들어 할 수 있는가?” 또 한편에선 “육체의 고통보다 하나님께 버림 받는 고통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둘 다 포함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도, 또 하나님께 버림받으시는 것도 다 예수님에게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메시지 성경은 “두려움과 깊은 근심에 빠지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고통을 그대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하소연을 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서 머물러 깨어 있으라.” 예수님이 그동안 아무리 힘들어도, 제자들에게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셔도, 본래 선지자는 다 그런 것이다. 하며 의연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괴로워 죽을 것 같다고 하십니다. 독립투사들 중에는 사형장에 의연하게 걸어갔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을 때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독사발을 마셨습니다. 그들과 비교하면 예수님이 너무나 약한 모습을 보이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그만큼 십자가의 고통이 더 극심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럼 이 고통을 피하지 되지 않겠습니까? 십자가를 안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선택하신 길이 무엇입니까? 35절을 보십시오.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시기를 구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 땅에 엎드리어 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시기를 구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심정 그대로 땅에 엎드리어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땅에 엎드리셨습니다. 가장 낮고 낮은 자세로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 마치 죄인이 자신을 제발 용서해 달라고 구하듯이 하나님께 구하셨습니다. 그만큼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나 크고, 예수님도 힘드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36절을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부르며 간절히 구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십자가의 잔이 자신에게서 옮겨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고자 하시면 할 수 있다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것이 가능할까요? 하나님이 다른 방법이 있지만 그런데도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직 이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만이 모든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또 하나님의 뜻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고백하고 구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고통에 대한 예수님의 진실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잔을 자신에게서 옮겨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의 기도는 여기까지입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와도 사실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큰 고통을 알지만, 정말 피하고 싶은 잔이지만, 그 잔을 마시고자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셨습니다. 즉 자기 뜻에서 하나님의 뜻으로의 전환이요, 육에서 영으로의 전환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기쁘시게 하기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님의 뜻에 쳐 복종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십자가를 회피하고자 한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감당하고자 몸부림치는 기도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기도의 위대함이 드러납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떤 한 절대적 존재에게 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모든 종교에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이해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답답하고 아쉬울 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엎드려 기도하기도 하고, 누워서 기도하기도 하고, 걸어가면서 기도 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를 찾듯이, 또 위기의 때에 119를 부르듯이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발 좀 저를 도와주세요.” 이 모든 기도의 핵심은 ‘나의 소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 내가 이루고 싶은 소원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기도는 정반대입니다. 나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아니라,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가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마칠 때마다 주기도문 찬양을 부릅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첫 번째 핵심은 ‘주의 뜻이 이루지이다.’입니다.
나의 뜻과 주의 뜻이 같으면 기도하는데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납니다. 그런데 나의 뜻과 주의 뜻이 다릅니다. 좀 다른 정도가 아니라 충돌합니다. 예를 들어 장래 방향이나 결혼 문제에 부딪치며 자기 원대로 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좁고 자기 중심적이고 불안전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뜻은 원대하고 완전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우리에게 유익이 되고 가장 좋고 확실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원대로 하고자 할 때, 영적 비밀을 알 수 없고 또 영적으로 전혀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과 자기 뜻을 부인하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영적세계의 비밀을 깨닫고, 하나님이 쓰실만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하면 어떻게 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주의 뜻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내 뜻, 내 소원, 내 기도제목이 이루어지기를 구하고 또 구합니다. 그것도 간절히 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뜻과 하나님의 뜻이 너무나 다른데,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느냐? 마는냐?의 상황에서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고 구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자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전환이고 결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할 때 밀려오는 모든 두려움과 고통을 향한 분명한 도전이요 싸움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예수님이 이기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위대한 내적승리입니다. 그런데 그 싸움이 한번으로 끝나셨을까요?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시고 돌아오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힘든 마음을 말하면서도 도움을 청했지만 제자들은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 가운데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베드로가 아니라 시몬입니다. 그 이름은 부르심 받기 전에, 나약한 한 인간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우리는 이 말씀을 기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핑계로서 많이 이용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히려 왜 우리가 깨어 기도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도 그렇겠지만 우리의 마음의 소원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을 품고 섬기는 내면도 갖고 싶고, 폼 나는 목자도 되고 싶습니다. 거룩한 사람, 신령한 사람, 기도도 많이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 마음이 넓은 사람, 말씀도 있는 사람으로 인정도 받고 싶습니다. 또 그렇게 살고 싶은 소원도 있습니다. 제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나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넓지도 않고 그렇게 거룩하지도 신령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늘 부족한 자신을 보면서 탄식합니다. “왜 나는 이렇게 사는 것입니까?” 왜 정말 이렇게 삽니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이 약함을 인정하고 깨어 기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이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가 핑계가 아니라, 우리가 깨어 기도해야 할 이유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후에, 다시 또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와서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이 졸린 눈꺼풀이라고 했습니다. 졸리면 손으로 잡아 올려도 금방 내려옵니다. 졸린 제자들은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은 다시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셔서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기 전과 후가 완전히 달라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라도 한번 방향을 잡았다고 그대로 순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순종하고자 마음을 잡기까지 또 그 힘을 얻기까지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또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십자가를 지실 힘을 얻으셨습니다. 기도는 기도한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기도는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힘을 얻기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몇 시간 기도했느냐? 얼마나 기도했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즉 기도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의 질이 중요합니다. 기도의 질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는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세워 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기도하려고 하면 기도가 잘 안 됩니다. 기도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면,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그러니깐 예수님도 세 번 씩이나 기도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도 기도가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기도가 잘 안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신령하고 거룩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가 되기까지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는 힘든 영적 투쟁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 투쟁 없이는 영적 승리도 없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할 때 우리는 마음 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인간적인 생각과 죄의 소욕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영력을 덧입고 어떤 십자가도 능히 질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후에 이 말씀을 깊이 영접하고 깨어 기도함으로 연약함을 이기고 많은 십자가를 지는 능력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이처럼 기도로 영적 투쟁을 하게 되면, 기도의 맛을 알게 되고, 무엇보다 기도를 통해 주의 뜻을 알게 되고, 그 뜻을 이룰 힘도 얻게 됩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많지만 그중에 하나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합니다. 또 기도는 성령의 불을 붙이는 불씨입니다. 우리는 매주 말씀을 공부하기 때문에 불태울 장작은 좀 쌓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좋은 재료인 이 말씀이 불타지 않습니다. 기도해야 불이 붙습니다. 기도해야 말씀이 불탑니다. 기도해야 내가 배운 말씀, 내가 알고 있는 말씀이 실제 내 삶에서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기도로 주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장, 오직 예수님만 남다(43-52)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두 제자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왔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유다와 함께 왔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 ‘랍비여’하며 입을 맞추었습니다. ‘랍비’는 자신의 참 스승에게 진정한 존경심을 담아 부르는 호칭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은 랍비라고 부르며 배신의 키스를 하고 있습니다. 이중적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유다가 왜 자기를 랍비라고 부르며 키스 하고 있는 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 같으면 ‘저리 가라’고 하면서 유다의 뺨이라도 한 대 때릴 것 같은데, 예수님은 그냥 다 받아주십니다. 그러자 유다와 짠 신호대로 체포대가 달려들어 예수님을 잡고자 했습니다. 그때 곁에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달려드는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의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자칫하면 제자들과 체포대가 한판 붙을 판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에게는 얼마든지 이들을 제압할 힘과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대항도 하지 않으시고 순순히 잡혀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말씀을 이루는데 있으셨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놀라서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셨습니다. 이때 한 청년은 벗은 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따라오다가 잡히자 홑이불을 버리고 그대로 도망하였습니다. 그렇게 큰 소리 치던 베드로, 충성맹세에 동참했던 제자들도 다 달아났습니다. 이들은 다 실패했습니다. 이들의 실패는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데서 오는 실패입니다. 또 뜻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위해서 준비하지 않은 자들의 실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땅에 엎드려 간구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고자 홀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결단과 준비가 내게 필요합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홀로 남을지라도 주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3장, “내가 그니라.”(53-72)
사람들은 예수님을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사람들과 함께 불을 쬐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끌려온 예수님에 대한 종교재판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공회는 해가 지고 난 다음에는 모여서 회를 하거나, 어떤 결정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보면, 해가 뜨고 난 다음에 공식적으로 결정한 것이 나옵니다. 그리고 유월절과 명절 전날에도 모일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재판을 하려면 성전의 성소에서 하도록 했는데, 지금 여기는 가야바의 사택입니다. 아무리 대법원장이라도, 자기 집에서 재판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나부터 열까지 다 불법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 이들은 거짓증인들도 동원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두명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동원한 거짓증인들의 거짓된 증언조자 서로 일치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일어나 예수님께서 “내가 이 성전을 헐고 다른 성전을 사흘동안에 짓겠다.”고 했다고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틀린 말이었습니다. 요2:19절에 보면,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헐겠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그 의미도 전혀 다릅니다. 그러니 그 증언도 서로 일치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털면 곤란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리 털어도 먼저 하나 날 것이 없었습니다. 답답했던지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왜 아무 대답이 없는가? 물어도 예수님은 침묵하고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죄를 만들려고 해도 만들 죄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면 풀려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이 비수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네가 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찬송받을 이’는 하나님을 부르는 유대인의 호칭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인가를 물은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살고자 하셨다면 계속 침묵하시면 됩니다.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중세시대에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천동설을 신봉하는 그 시대에 계속 지동설을 주장했다가는 단두대에 처형될 판이었습니다. 이때 갈릴레이는 살기 위해서 자신의 주장을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재판장을 나오면서 한마디 합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오는 어차피 진실을 말해봤자 믿지 않을 것이고, 또 진실을 말해 개죽음 당하느니, 살길을 찾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하시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62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밝힌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묻지도 않는 것 까지 추가해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인자는 다니엘서에 등장한 대로 이 땅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아 있습니다. 이것은 곧 권능자, 하나님을 대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비록 십자가에 죽을지라도 자신은 다시 부활하여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는 예언까지 들려주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기를 작정하시고 바로 그들이 원하는 죄목을 아주 잘 포장까지 해서 그들에게 던져준 것입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제사장들과 공회의원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대제사장은 옷까지 찢으며 더 이상 증인이 필요없다며 예수님의 신성모독을 선언했습니다. 신성모독은 사형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사형이라고 정죄하고 불법재판을 끝냈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미쳐 말했습니다.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인들까지 예수님을 손바닥으로 쳤습니다. 예수님은 신성모독죄를 범한 일급 사형수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살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살 수 있으셨습니다. 더구나 이 모든 과정이 불법입니다. 그런데도 침묵하시고 이 모든 불법과 모독을 다 당하시며 사형선고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신다는 것을 알지도 그래도 화가 납니다. 갑자기 ‘바보 같으신 예수님’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53:12절에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 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고 한 말씀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자신을 범죄자 중 하나로 취급받으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바보 같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예수님과 달리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나중에는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내가 예수를 아는 사람이면 성을 갈아”라고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닭이 두 번째 울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까지 버리겠다고 한 베드로였습니다. 이것은 정말 그의 진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실 때, 칼이라도 휘두르며 예수님을 보호해 드리고자 했던 의리의 사나이였습니다. 또 그는 멀찍이 체포당하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정말 사랑했고 따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이제 통곡하고 있습니다.
그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깨어서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었고 실패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통곡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처럼 실패한 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깨닫고 우는 자는 희망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준비하고 있지 않다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깨어서 기도하신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얼마든지 살 길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십자가의 잔을 마시는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예수님을 통해 자기 뜻만을 이루고자 했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고민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깨어서 준비하며 하나님의 뜻을 고민하며 이루어 가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