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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나눔터

마태복음 5:17-48 "더 나은 의"말씀강해

작성자sol2|작성시간24.03.26|조회수101 목록 댓글 0

더 나은 의

말씀/마태복음 5:17-48

요절/마태복음 5:20

오늘 우리가 예수님이 전하는 천국복음을 들을 때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그랬습니다. 그 중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율법이었습니다. 그들은 1500년을 율법세계에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은 그들이 살아온 율법과 부딪치는 것 같았습니다. 이 장벽을 넘어야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이 제대로 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바로 잡음으로써 천국복음으로 이들을 초청하십니다. 우리도 나름대로 갖고 있는 장벽이 있다면, 말씀을 통해서 장벽을 허물고 예수님이 전하시는 천국복음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의 율법 관을 말씀하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율법은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토라, 즉 모세오경을 말합니다. 선지자는 이사야,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서 전체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를 통해 배운 것과 예수님의 가르침은 뭔가 달랐습니다. 즉 이들이 배워온 가치관과 신앙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이나 선지서를 폐하러 왔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완전하게 한다는 것은 꽉 차도록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완성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무너뜨리거나, 율법을 무시하거나, 율법 외에 전혀 다른 새로운 구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의 율법을 통해 전해진 구원의 메시지를, 부족했던 메시지를 꽉 채워서 완성하신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예를 들어, 율법에 많은 부분이 사실은 제사에 대한 것입니다. 제사는 하나님에 나아가는 일종의 유일한 방법이고, 통로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제사를 드려야 하고, 어떤 제사를 드려야 하고, 어떤 경우에 드려야 하는지를 자세하게 구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제사의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런 제사는 일종에 진정한 구원을 기다리는 하나의 퍼포먼스요, 구원의 그림자를 약속하고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퍼포먼스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셔서 자신이 산 제물이 되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죄를 해결하십니다. 그래서 제사를 완성하시고, 율법이 가르쳤던 모든 구원의 방식을 꽉 채워서 완성하십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선포하십니다. 또한 선지자들이 전해온 메시지도 꽉 채워서 완성하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를 모르고, 예수님이 율법을 무시한다. 전통을 깨버린다고 여기고,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드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하십니다. 우리말도 점이 없느냐 있느냐에 따라, 님이 되기도 하고 남이 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점 하나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그 같이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의 포인트는 말씀을 행하며 가르치는 것에 있습니다. 결국 율법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 해박하게 알고 있느냐? 는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이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지키느냐는 삶의 문제요, 행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20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탈무드에 멍든 바리새인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어떤 유혹도 받지 않고자 눈을 거의 감고 길을 다닙니다. 그러다가 벽에 부딪치고 나무에 부딪쳐서 늘 이마에 멍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멍이 많이 들었느냐?가 바리새인의 경건 성을 나타내는 표시가 되었습니다. 이 정도로 이들의 의는 높고 높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의 의보다 더 나아야만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그럼 우리 중에 오늘 예배에 오다가 부딪쳐서 이마에 멍든 분이 계십니까? 제가 보니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까? 더 나은 의는 무엇을 말할까요? 바리새인들과 같은 행위의 의가 아니라 믿음의 의를 말할까요? 뒤에 예수님의 설명에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더 나은 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내세웠던 어떤 종교의식이나 외적인 행동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근본적인 것입니다.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지만 결코 율법과 전혀 상관없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얻은 의를 갖고 그 은혜의 감동으로 율법이 전하고자 하는 본질을 깨닫고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켜 나아야 할 더 나은 의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6가지 예를 들어 전하십니다. 매번 패턴은 똑같습니다.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는 식으로 재해석해 주십니다. 6가지가 전부가 아닙니다. 이를 통해 천국백성인 우리가 가져야 할 율법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살인에 대한 계명입니다. 살인에 대한 계명은 제 6계명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 계명을 고의로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이 계명을 지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계명의 근본정신은 생명존중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 계명에 대한 더 나은 의는 무엇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하여 라가(골빈놈)이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사실 형제에게 이렇게 욕하고 화를 낼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멀쩡하게 잘 하고 있는데, 골빈 놈이라고 욕하겠습니까? 아무튼 뭔가 형제가 내 속을 뒤집어 놓는 일을 한 것입니다. 화를 낼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럴지라도, 그 형제에 대하여 분노하거나 욕하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라,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아주 강력하게 경고하십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형제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은 상대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격살인입니다. 이렇게 상대를 무시하고 감정을 폭발하면 거기서부터 증폭되고 증폭되어 구타도 하게 되고 살인까지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상대가 설령 욕먹을 짓을 할지라도 끝까지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예물을 제단에 드리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종교행위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 주일예배가 가장 중요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사를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생겨났습니다. 잠시 2000년 전 예수님 당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성전에 예물을 드리러 갔습니다. 당시 성전은 유대에서 예루살렘 성전 하나 밖에 없습니다. 또 제물을 드리는 곳도 한 두 군데입니다. 따라서 성전에 예물을 드리러 가면 금방 드릴 수 있겠습니까? 쭉 줄서서 기다려야 합니다. 하루 종일 기다릴 수 있습니다. 기다리다가 내 차례가 거의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생각이 났습니다. 어제 누구랑 싸운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면 아이! 여태 기다렸는데, 제사를 드리고 가야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말고 제사보다 먼저 형제와 화목하라고 하십니다. 그 다음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기다렸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 관계가 어떻게 되든, 나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나는 하나님을 섬기고, 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면 문제가 없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사보다 먼저 형제와 화목하라고 하십니다. 그 다음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내 신앙이 먼저이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만 하면 that’s ok. 아무 문제가 없다. 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만 좋으면 아무 상관이 없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앙제일주의를 내세울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해, 하나님께 헌신하고 기도하고 믿음으로 살았으니까, 사람들이 뭐라 하든 상관할 바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상처 준 것이 있으면 먼저 해결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신자의 삶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고 하십니다. 고발하는 자와 함께 있다는 것은 내가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이를 해결하지 않고 미루고 있는 것입니다. “고발하든 말든 맘대로 해! , 하나님의 일 하느라 바빠! 나를 고발하는 자를 하나님이 심판하실 거야!”하며 버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지 말고 더 문제가 심각해지기 전에 먼저 해결하라고 하십니다. 결국 더 나은 의는 하나님을 섬기는 만큼 다른 사람도 존중하고 그들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나의 신앙만 내세우기보다 다른 사람도 살피는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더 나은 의입니다.

 

두 번째는 간음에 대한 계명입니다. 당시 간음은 살인, 우상숭배와 같이 3대 중대 범죄로 여겼습니다. 사람들은 간음을 하지 않으면 이 계명을 지켰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이미 여자를 한 인격이 아니라 내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수단으로만 본 것입니다. 또 그것은 결국 간음을 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오른 눈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고 하십니다. 또 오른 손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고 하십니다. 눈이 뽑히고 손이 잘릴지라도 온 몸에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눈이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얼마나 철저히 죄의 유혹과 싸워야 하는가를 말씀합니다. 또 음욕을 품고 사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를 극단적으로 경고하십니다.

 

오늘날은 타락한 성문화가 홍수처럼 넘쳐납니다. 그러다보니 유혹에 빠져서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게 됩니다. 흔히 호기심 때문에 또 젊어서 그럴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한번 음욕에 마음이 병들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연구에 의하면, 뇌하수체 프로그램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결혼을 해도 나이가 들어도 늘 일그러진 성의식 때문에, 삶 전체가 망가지게 됩니다. 그러니 나를 유혹하는 음란한 것들에 대해서 눈을 뽑아버리고 손을 잘라 버리고자 하는 각오를 갖고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가 내 욕망을 채우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아름답고 고귀한 인격임을 알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에서부터 건강한 성의식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음란이 가득한 이 세대에서 천국복음을 가진 우리가 가져야 할 더 나은 의입니다.

 

셋째는 이혼에 대한 것입니다. 31절을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근거로 이혼증서를 써주면 얼마든지 이혼을 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심지어 그 당시에는 두 세 사람의 사인만 있으면 그냥 이혼이었습니다. 두 세 사람에게, “나 아내라 이혼하려고 하는데 사인좀 해죠.” “그래 ok. ok.” 하고 사인을 받으면 이혼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한 것은 사실 사회적 약자인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마지막 안전장치였습니다. 또 음욕에 이어서 이혼을 말씀하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오늘날 이혼의문제가 사실 음욕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그로 간음하게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를 보면, 이혼하려는 사람들의 상대를 향한 기본적인 컨셉이 있습니다. ‘아내를 버리면’. 아내를 버린다는 것은 간 큰 남자 시리즈에도 감히 나올 수 없는 요즘 엄청난 표현입니다. 버린다는 것은 물건에나 쓰는 표현입니다. 쓰다가 쓰다가 이제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여기고 새 것으로 바꿀 때, 버립니다. 재활용 딱지를 사서 붙이며 가구도 버리고 쇼파도 버립니다. 그러면서 더 좋은 것으로 새로 삽니다. 그런데 아내에 대해서 그렇게 여기는 것입니다. 아내를 보니까 이제 더 이상 쓸모가 없습니다. 버리고 바뀌어야 겠다. 그래서 이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세계적인 부부치료 전문가는 불행한 결혼생활보다 이혼이 자녀에게 더 큰 상처라고 하였습니다. 부부문제가 왜 생길까요? 자기는 이렇게 저렇게 하는데, 아내가 전혀 이런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갈등의 원인은 결국 이기심입니다. 사실 상대가 자기를 꼭 인정해 주고 알아주어야 하나요? 바쁘면 인정해주고 알아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상대보다 자기를 더 생각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아내는 나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내가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이를 테면 내가 가꾸어야 할 꽃입니다. 그래서 나의 아내는 아름답게 피어나도록 향기가 나도록 내가 사랑하고 섬겨야 할 사람입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는데 같이 산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결혼하면서부터 갈등이 시작됩니다. 그럼 어떻게 갈등을 봉합하고 잘 살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꾸어야 할 꽃으로 영접하고 가꾸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부족한 것은 내가 채워주고, 내가 물을 주고 가꾸면 됩니다. 그것이 결혼에 있어서 우리가 가져야 할 더 나은 의입니다.

 

넷째, 맹세에 대한 것입니다. 당시는 맹세도 많이 하고 이를 지키는 것을 의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하늘로도 말고 땅으로도 말고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여기서 맹세는 서원과 다릅니다. 서원은 하나님 앞에서 일종의 신앙적인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맹세는 자기주장을 관철시키고자 큰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맹세는 자기 과시오, 자기 신뢰입니다. 사람은 머리카락 하나 자기 마음대로 희고 검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큰 소리치는 것은 거짓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고 하십니다.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고 하십니다. 메시지 성경에는 자기 뜻을 관철하려고 말을 조작하다가는 잘못된 길로 빠진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고자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등 무리해서 맹세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진실된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더 나은 의입니다.

 

다섯째는 복수에 대한 것입니다. 38절을 보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은 복수의 법칙으로 많이 인용됩니다. 그런데 본래 이 말씀은 상대의 눈을 상하게 하면 내 눈도 상할 것을 알고 함부로 하지 말라는 말씀이요, 또 상대가 내 눈을 상하게 했을지라도 그 이상은 하지 말라는 이를테면 복수를 제한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상대가 내 오른쪽 뺨을 쳤다는 것은 손등으로 친 것으로 더 큰 모욕을 준 것입니다. 그러면 참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말고 나머지 왼뺨도 대라고 하십니다. 정말 왼뺨을 내밀라는 말씀일까요? 이것은 내게 모욕을 주고 상처를 주는 상대에게 맞서 싸우지 말고 그 아픔과 모욕을 참고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또 상대가 나를 고소해서 내 속옷을 빼앗고자 합니다. 정말 치사하는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과 끝까지 맞서 싸우고자 하지 말고 아예 겉옷까지도 내 주라고 하십니다. 또 누가 너더러 오리를 가고자 하면 십리를 같이 가주라고 하십니다. 오버해서 섬겨 주라는 것입니다.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러다가는 내 것은 다 털리고 나는 망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경우를 참 많이 당합니다. 운전하다보면, 자기가 무리하게 끼어들어 놓고 오히려 욕을 합니다. 원룸을 운영하다보면, 자기가 잘못해 놓고 아니라고 딱 잡아떼거나, 오히려 큰 소리를 칩니다. 그리고 에타나 디시인사이드에 비난 글을 올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합니다. 정말 화가 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참고 양보하고 내주다보면 나는 늘 무시만 당하고 살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악한 사람에게 맞서려고 하다가 오히려 더 상처와 손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무식하고 힘이 없어서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천국의 백성인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세상의 삶의 방식은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사는 것입니다. 조금도 자기 것을 손해 보지 않고 악착같이 자기 것을 챙기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축복을 경험한 우리의 삶은 이런 세상의 방식과 달라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대로 악착같이 사는 사람들과 맞서기 보다는 참고, 양보하고 내 것을 내주며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12:21). 무엇보다 이것은 예수님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방식을 따라가야 합니다.

 

또 실제로 조금만 양보하고 참으면 되는데, 그 순간만 넘어가면 됩니다. 30초룰 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아예 10초만 참아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성질을 냈다가 더 큰 싸움이 납니다. 악착같이 손해 보지 않고자 하다가 오히려 더 큰 손실을 봅니다. 운전할 때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자 하다가 오히려 더 큰 사고가 납니다. 층간 소음도 조금만 참으면 그냥 지난 갈 일을 끝까지 따지다가 서로 다투고 살인까지 납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다운 천국의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려면 정말 탄탄한 내적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전부라는 분명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더 나은 의입니다.

 

여섯째, 원수 사랑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였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없지만,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그들은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으로 확대해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웃사랑보다는 원수에 대한 미움을 외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상대하지 말라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가 망하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이나 선인이나 동일하게 햇빛을 비취고 비를 내리십니다. 하나님은 이슬람 국가라고 해서 비가 안 오고 태양을 거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살 길을 열어주시는 모든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가장 많은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나는 본래 선한 사람도 의로운 사람도 아닙니다. 하나님도 알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게도 건강을 주시고, 사랑의 햇볕을 쪼이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 하나님의 사랑의 혜택을 받았지만, 보편적인 사랑의 은혜를 받았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 사랑합니다. 내가 볼 때, 사랑스러운 사람만 사랑합니다. 하다못해, 나에게 커피 한 잔이라도 사 준 사람만 사랑합니다. 그런데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예수님은 무슨 상을 받겠느냐고 하십니다. 우리끼리만 인사하면 남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들만의 리그에서는 잘 합니다. 그러나 한 다리만 건너면 싸늘합니다. 세리도 이 정도는 합니다.

 

우리의 수준이 어느 정도 되어야 합니까? 48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우리는 하나님처럼 결코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여기서 온전하라는 의미는 부족하지만, 성숙한 자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즉 나의 부족함을 알고, 성숙함을 채워가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다 못 채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채우고자 하는 삶의 방향 가운데 살라는 것입니다. “나는 안해, 나는 못해. 나는 그렇게 안 살거야.” 아예 포기하고, 그런 삶을 살고자 하는 방향을 안 잡는 것이 아니라, 그런 방향을 잡고 그런 방향 가운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더 나은 의를 가진 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자의 삶을 살라는 것이요,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가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렇게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늘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천국백성의 삶입니다. 손해보고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더 많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삶입니다. 무엇보다 이것은 더 나은 의를 가진 자의 삶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지난 시간 모든 복의 출발은 가난한 심령에서 출발한다고 배웠습니다. 더 나은 의를 가진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천국백성의 복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심령이 가난한 자의 상태여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얻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이 있으면, 손해도 볼 수 있고, 참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신데, 좀 양보 못하겠습니까? 지금 조금 손해 보는 것, 조금 내 자존심 상하는 것, 내어 줄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고 있다면, “네 가지세요. 네 그렇게 하세요.”하며 양보할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율법의 본질을 지킬 수 있는 온전한 자로 살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요, 또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더 나은 의를 간직한 자들이 되어 제대로 쓰임 받고, 제대로 천국의 복을 누리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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