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이의 머릿돌
말씀/누가복음 20:1-18
요절/누가복음 20:17, 찬송가/416장, 163장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 계속 충돌하십니다. 그런데 이때마다 우리가 갖는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난 3년 반 동안 그렇게 놀라운 일을 보이셨는데 왜 이런 상황이 반복되고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들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꽤 오랫동안 말씀도 듣고 일테면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에 대해서 반발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왜 이러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은 이 의문에 대한 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을 건강하게 이끄는 중요한 한 가지 요소가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1장,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1-8)
1절. 하루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늘 하던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를 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 이를테면 당시 유대교의 실세인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와서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2) 이는 한마디로 ‘당신이 뭔데 여기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거냐?’는 것입니다. 무슨 자격증이라도 있느냐는 것입니다. 당시 율법을 가르치려면 제사장이나 서기관이 되던가? 아니면 랍비학교에서 공부해서 자격을 인정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인정하는 교육을 받으신 적이 없습니다. 어떤 랍비에게 배운 제자출신도 아닙니다. 더구나 출신지도 그들이 무시하는 갈릴리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때문에 지금 예루살렘에 돌풍이 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의 찬송 가운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장터가 된 성전을 다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짭짤했던 이들의 밥상을 차버린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이제는 성전에서 대놓고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자신들의 밥그릇을 예수님께 다 빼앗길 것만 같았습니다. 불안감에 빠진 이들은 예수님의 약점을 파고들며 공격했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실세들인 이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위축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기 전에 한 가지 묻겠다고 하셨습니다. 4절.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질문에 질문으로 대하는 것은 당시 유대의 서기관들이나 헬라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흔하게 사용되던 논쟁기법입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물으면 우리 같으면 ‘너희들은 무슨 권위로 나한데 이러는데’ 하는 것이 일반적인 대응입니다. 아니면 이들의 질문을 싹 무시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조금 뜬금없이 ‘요한의 세례’를 들고 나오셨습니다. 서로 연결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여기에 숨은 중요한 키워드가 있습니다. 그것은 ‘권위’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 이들이 예수님께 문제 삼는 것은 ‘권위’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들고 나오심으로 이 권위의 문제를 보다 큰 틀에서 따져보자고 논쟁의 테이블에 올려놓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반격에 혼란에 빠졌습니다. 5,6절.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이들이 혼란에 빠진 이유는 권위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닥칠 후폭풍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는 것은 그가 베푼 세례를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은 것을 말합니다. 또 그들이 요한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게 되면 요한이 증거 한 예수님의 영적 권위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이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종교지도자인데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은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그렇다고 요한의 세례가 사람으로부터라고 하면 요한을 선지자의 권위를 가진 자로 알고 있는 백성들에게 분노를 사서, 돌로 맞아 죽을 수 있습니다.
결국 이들이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7절.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이들은 예수님께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알지 못해서 알지 못한다고 대답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면 자신들의 문제가 드러나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몰라서 문제가 아니라 알지만 인정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돌이키는 것이 싫어서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 묻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점에 가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7가지 방법’이라는 책도 있습니다. 물론 정말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물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싫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그런데 이것은 단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8절. 예수님은 이들에게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대답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모르겠다는 그들에게 나도 모르겠다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들의 잘못을 감추고자 권위를 인정하지 않다보니, 더 이상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울 기회가 사라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고치고 바로 잡을 기회도 놓쳤습니다. 진정한 용기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럴 용기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문제를 비유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지적하시며 경고하십니다.
2장, 포도원 농부의 비유(9-16)
9절.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를 주었습니다. 주인이 땅을 빌려 준 것이 아니라, 포도원을 만들어서 빌려 주었습니다. 포도원을 만들기 위해 땅도 일구고, 묘목을 심고, 지지대를 세워주고 울타리도 만들었습니다. 또 포도를 수확해서 포도주를 만들 수 있는 틀까지 만들었습니다. 주인은 이렇게 포도원을 만드니라 많은 수고를 하고 투자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애써서 만든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었습니다. 농부들은 이 포도원을 만드는데 수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이런 농부들에게 자신이 애써 만든 포도원을 맡긴 것입니다. 세를 주었다고 했으니 이를테면 임대계약서를 쓰고 농부들에게 맡겼습니다. 당시 농부들은 날품팔이를 하며 겨우 살아가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비참하였습니다. 주인은 이런 그들을 불쌍히 여겨 포도원을 맡겨 주셨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임한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농부들은 이제 주인이 만든 포도원을 잘 가꾸어서 계약을 이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더구나 주인이 바로 옆에 있어서 늘 잔소리 하면 피곤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아예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맡기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러니 더욱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들은 주인에게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농부는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좀 더 넓은 의미로 농부는 인간, 포도원은 세상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정복하고 다스리며 많은 열매를 맺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하며 열매 맺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임한 놀라운 은혜요 축복이었습니다. 사람이 일할 수 있는 터전이 있다는 것과 일생동안 감당할 수 있는 사명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0절.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때가 이르매’라고 했습니다. 포도나무는 묘목을 심은 지 4년 정도는 지나야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커피숍이나 식당을 오픈하게 되면 가장 힘든 것이 임대료라고 합니다. 그 임대료는 건물을 임대하는 순간부터 그것도 장사가 잘 되든 안 되든 꼬박꼬박 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주인은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기고 바로 세를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포도를 수확해서 소출을 얻을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 주었습니다. 그것도 소출 얼마입니다. 주인으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요구를 한 것입니다. 대개 6대 4로 소작료를 정하는데, 주인은 소득의 10분의 1만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세를 바치기 싫어서 주인이 보낸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습니다. 이러면 주인이 당장 농부들과 계약을 파기하고 고발해 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이 주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11절. “다시 다른 종을 보내어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주인은 다시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뭔가 오해가 있는가 보다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종들이 무슨 실수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주인은 다른 종을 보냈지만 이번에도 종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몹시 때리고 능욕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거저 보냈습니다. 처음보다 종을 더 심하게 대했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도 주인에게 소출을 전혀 주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막가자는 것입니다. 한번은 참지만 같은 일을 두 번이나 반복하면 이제는 끝장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어떻게 합니까? 12절.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주인은 세 번째 종을 보내었습니다. 종을 보내면서 주인은 종에게 제발 가서 농부들의 성질을 건드리지 말고 잘 타일러서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아마 앞에 보낸 종들보다 더 성숙하고 무게가 있는 종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세 번째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았습니다. 점점 주인이 보낸 종들을 대하는 농부들의 태도가 과격해지고 있습니다. 소위 삼세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세 번까지는 참아 주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삼세판이 끝났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같은 짓 꺼리를 반복하고 오히려 더 상황을 악화시키는 경우라면 그대로 두면 안됩니다. 더 참으면 바보취급을 당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13절.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주인은 이번에 자신의 아들을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종들이 이미 세 번이나 당하고 왔는데, 이번에 아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미운 아들이거나 없어져도 좋은 그런 아들이 아닙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아들을 보내는 것은 곧 자신을 보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들이 ‘미운 우리새끼’라고 할지라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못된 농부들에게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는 주인은 바보 같은 주인입니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인은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면서 말합니다.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존대는 존중입니다. 유대에서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입니다. 아들에 대한 태도는 곧 아버지에 대한 태도입니다. 주인이 농부들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존중입니다. 존중은 주인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인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농부들이 주인을 주인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할 때, 주인과 농부들이 맺은 계약도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14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이들은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이번 기회에 이 포도원을 차지할 수 있는가를 의논했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주인의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므로 이 포도원을 차지하자고 했습니다. 이들이 왜 그동안 주인이 보낸 종들에게 못되게 굴은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이 처음 주인에게 포도원을 받았을 때에는 아주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포도원을 가꾸었습니다. 이제는 탐스러운 포도가 주렁주렁 열리기 시작하자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인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것이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아예 그렇게 하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은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의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을 차지할 수 있을까요? 유대에서 주인이 죽고 상속자까지 죽으면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인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주인은 이들이 종들을 때리고 괴롭혔지만 세 번씩이나 참고 또 참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주인의 그러한 사랑과 인내를 아예 주인이 죽었거나 아니면 주인을 아무것도 못하는 무력한 자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아들만 죽이면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완전 착각이고 빗나간 욕심으로 어리석은 판단을 한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내린 결론대로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주인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까지 악하게 된 것은 포도원을 차지하고자 한 빗나간 욕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욕심보다 더 심각한 문제, 어쩌면 그 욕심의 뿌리가 된 것은 바로 주인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은 문제입니다. 주인에 대한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혹자는 완전히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범죄를 저지른 것의 복사판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받았지만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빗나간 욕심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마음, 즉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십계명의 앞의 4계명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원을 새로 얻은 농부들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은 이를 어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들에게 하나님과 맺은 언약, 일테면 계약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 선지자를 계속해서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주인이 보낸 종에게 하듯이 이들을 때리고 핍박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만큼은 존대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미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까지도 포도원 밖에서 주인의 아들을 죽인 농부들처럼 성문 밖에서 죽였습니다. 이 모든 일의 뿌리에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하나님의 무능력으로 오해합니다. 자신의 아들까지 보내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조차도 무시합니다. 이런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사람들에게 물으셨습니다. 15절.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동안 참고 또 참았던 주인이니 이번에도 참을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절대로 심판 같은 것은 하지 않고 끝까지 참고만 계실까요? 16절.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와서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주인의 인내가 언제까지 무한정 계속되지 않습니다. 주인이 그동안 종들이 그렇게 당할 때에도 가만히 있었던 것은 주인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농부들이 자신의 아들까지 죽이자 이제는 주인이 더 이상 참지 않습니다. 주인은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라고 합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무한한 사랑, 끝없는 사랑, endless love 라고 말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무한정 참으시는가? 심지어 자신의 아들까지 죽이면서 권위를 무시하고 자기 욕심만을 채우고자 해도 참고 계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고 계시지 않습니다. 어느 때까지 참으시다가 그 마지막은 모든 기회와 축복을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십니다. 권위를 무시하는 자에게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3장, 모퉁이의 머릿돌(17-18)
예수님의 비유를 들은 사람들은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라고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의 창끝이 바로 자신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분명하게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17절.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예수님은 시118:22절을 인용하여 그 예언이 성취된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건축자들은 이스라엘을 뜻하고 그들이 버린 돌은 바로 예수님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것도 아예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버린 그 예수님으로 구원의 집을 짓는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돌로 집을 지을 때, 모퉁이의 머릿돌은 기초석이 되고 또 기준석이 됩니다. 돌의 입장에서는 건축의 기준이 되는 모퉁이의 머릿돌의 권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그 집을 짓는데 쓰임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18절.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셔서 구원의 근거가 되고 기준이 되셨습니다. 이제 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자, 곧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집의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자는 끝까지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자입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제 멋대로 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는 결국 돌 위에 떨어져 깨어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돌이 그 사람 위에 떨어져 가루로 만들어 버립니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심판을 당합니다.
학교에 가면 모범생도 있지만 문제아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선생님의 권위를 인정하느냐 않으냐의 차이입니다. 군대에서 군대의 규칙을 잘 따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관심사병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도 이럴 수 있습니다. 욕심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의 것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인정하기 보다 그냥 내 것으로만 여기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내게 속한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 요구를 갖고 하나님과 흥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위에 나를 맞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아서 반발하고 자기 멋대로 하다보면 문제 신자, 관심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예수님이 구원이 아니라, 심판의 돌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게 주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 안에서 그 어떤 집보다 튼튼한 구원의 집으로 세워지게 됩니다. 우리가 이 복을 얻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