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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념 명당(明堂)이란 풍수지리설에서 이상적 환경으로서의 길지를 뜻하는 개념이다. 풍수지리는 그 원리에 따라 실 제의 땅을 해석하려는 방법으로 간룡법(看龍法)·장풍법(藏風法)·득수법(得水法)·정혈법(定穴法)·좌향론(坐 向論)·형국론(形局論)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특히 명당을 상세히 논하고 있는 것은 정혈법이다. 명당은 혈 앞 의 땅으로 내명당(청룡, 백호가 둘러싸서 마당을 이루는 곳)과 외명당(安山의 밖에서 朝山에까지 이르는 곳)으 로 이루어진다.
청룡과 백호는 둘러싸 호위해 주고, 주산(안산)과 객산(조산)은 서로 영접한다. 이러한 풍수지리에 의한 명당은 좋은 환경을 갖춘 집 자리와 묘소를 얻기 바라는 사람들이 땅에 대한 사고가 논리화된 것으로 명당을 찾기 위한 작업은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차원에까지 이어져 국도(國都)를 선정하고 흉 한 기운이 일어나는 곳에서 비보나 염승적으로 조치를 취하는 등 많은 분야에 걸쳐 이용되어왔다.
2. 명당의 종류(사물의 모양에 비유된 명당) 1)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 - 옥녀산발형은 여자가 화장을 하기 위해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는 모습이다. 옥녀 는 몸과 마음이 옥처럼 깨끗한 여인으로서 도교에도 자주 등장하여 옥황상제와도 관련이 깊고 절세의 미인인 동시에 풍요와 다산을 나타내는 표상이기도 하다. 이런 형국이 있는 고을에서는 만인이 부러워하는 인물이나 재자가인(才子佳人)이 많이 나오게 된다.
2) 야(也)자 형국 - '也'자는 본래 여자의 음부를 상징하는 상형 자로서 본뜻은 음부에서 음수가 흘러나온다 는 뜻이다. 야자 형국의 혈 앞은 '天'자가, 뒤에는 '乎'자가 있으면 길하다. '也'자는 천자문의 제일 끝 자일뿐 만 아니라 한문의 마지막을 마무리하기 위해 많이 쓰이고 있는 까닭으로 유종을 상징한다.
3) 복치형(伏稚形) - 뒤쪽 주산에 해당하는 산은 독수리가 치솟아 날아오르는 형국이고, 앞쪽은 매의 형상의 봉우리, 그리고 왼쪽에는 누런 개 모양의 황견곡이 보인다. 독수리·매·개 등 세 마리의 짐승이 서로 꿩을 노 리면서 견제하고 있는 형세이다. 이러한 형국이 되면 꿩은 세 짐승 사이에서 오히려 아무런 두려움 없이 영구 히 안락하게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울 수 있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4)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 금계라는 것은 천계(天鷄)를 뜻한다. 하루의 시작은 천계가 우렁찬 목소리로 울 어야만 한다. 그러면 닭들이 따라 운다. 닭의 형국은 알을 품는 곳이 진혈이다.
5)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 - 마주 앉은 장군형은 두 개의 험준한 봉우리가 마주 서 있는 형세를 이르는 말 이다. 이러한 곳은 군사전략상 방어에 유리한 지역으로 평화와 안녕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길지로 여겨졌다. 장군대좌형의 대표적인 터는 우암 송시열과 암행어사 박문수의 모터이다.
6) 보검출갑형(寶劍出匣形) - 보검출갑형은 보검의 예리함이 칼집 속에 감춰져 있기 때문에 한번 칼집에서 나오면 '척사(斥邪)의 기상으로 어둠을 물리칠 수 있어서 위대한 인물이 탄생한다.
7)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 - 매화는 매우 우아한 꽃으로 사랑을 상징하는 백 가지 꽃 가운데에서도 으뜸으 로 친다. 이러한 매화는 떨어지면서 사방이 향기로 가득 차기 때문에 자손이 크게 발복한다.
8) 금거북이 형국 - 금거북은 하늘에 사는 영물로서 천지의 기운을 흡수해서 만물을 낳는다고 한다. 거북이 가 진흙에 빠지는 형국이면 오행에서의 토생금(土生金)이 되어 땅 속의 기운을 더욱 힘차게 빨아들이므로 집 터로서 길하다.
전통적으로 사람이 집을 짓고 살 마을을 선택할 때면 대를 이어 편히 살 제반조건을 두루 갖춘 터를 찾아 나섰다. <설심부>는 ‘인걸은 산천의 기운을 받아 태어나는데, 산천이 생기롭고 모양이 좋으면 훌륭한 인재가 배출된다. 산이 수려하면 귀인이 나고, 물이 좋으면 부자가 난다’고 했다. 이 말은 세상의 존경을 받는 귀인이 되고 싶으면 산촌 마을에 살아야 하고, 재물을 얻어 세상을 편히 살고 싶으면 물자교역이 많은 강이나 바닷가에서 살라는 뜻이다. 여기서 전통마을은 집과 가까운 곳에 산이 있어 조상 묘를 모시고 돌보기가 수월한 곳이 선호됐다. 또, 농사짓기가 편리한 문전옥답이 넓게 펼쳐진 곳과 자식을 낳아 기르고 가르치기 용이한 곳을 명당으로 봤다. 하지만 현대의 도시는 대를 이어 살 곳이나, 조상의 묘를 쓸 풍수적 길지, 두레와 품앗이 같이 농사철에 일손을 구하기 쉬운 곳을 구할 수 없다. 대신 자식의 출세에 도움이 되는 학군이 좋거나, 부동산 가격이 급등해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는 마을이 명당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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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읍에는 예로부터 연주패옥이라 불리는 혈자리가 있다고 한다. 문경시 동로면사무소에서 가까운 곳이다. 동로면사무소에서 문경읍으로 이어지는 901번 도로를 따라 약 2킬로미터를 가면 좌측에 소나무가 한그루 서 있고 그 옆에 무덤이 두개 있다. 그중 작은 무덤이 마총이다.
이 마총과 연관지어져 연주패옥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연주패옥(連珠佩玉)이란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구슬을 잇고 구슬을 찼다"는 뜻인데 연주패옥형 명당이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이여송 부대에 속해 술사로 참가한 두사총이란 사람이 당시 조선의 명재상인 약포 정탁 대감의 인품에 감복하여 약포를 위해 잡아준 명당 자리이다.
두사총이 그 명당자리를 연주패옥의 자리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연주패옥형 명당은 경북 문경군 동로면 적성리 황장산(황정산) 기슭에 있다고 한다. 두사총이 위 명당자리를 잡아줄 때는 위 동로면이 경북 예천군에 속했던 지역이다. 위 명당의 형세가 "선녀가 화장을 하기 위해 거울을 보면서 목걸이(연주패옥)을 늘어뜨린 형상으로 이곳에 무덤을 쓰면 그 후손 중에 금관자 옥관자가 각 서말이 나올 자리"라고 설명하였다고 한다.
금관자 옥관자란 정3품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이 망건끈에 다는 관자로 결국 3품 벼슬 이상을 할 후손이 엄청나게 많이 나온다는 자리라고 한다. 두사총이 위 명당자리를 알려줄 때 약포대감은 연로하였기에 그의 구종을 데리고 가서 자리를 알려주고 명나라로 떠났는데 나중에 약포가 죽은 뒤 약포의 아들이 그 종을 데리고 위 적성리 부근에 가서 종에게 명당자리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그 순간에 말이 갑자기 놀라 발길질을 하자 발길에 구종이 차여 즉사하고 명당 자리를 알려주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화가 난 약포의 아들은 그 자리에서 말의 목을 베었고, 다른 지관들을 동원해 명당자리를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고향 이웃 동네인 현재의 예천군 호명면 본리 뒷산 위라곡에 묘를 썼다고 하고, 말의 시체는 주민들이 그곳 길가에 무덤을 만들어 주어 지금까지 동로면 생달리로 가는 길가에 마총과 조그마한 비석이 남아 있다.
그 후 현재까지 지관들이 위 황장산 일대에서 위 연주패옥의 자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아직 그 자리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명한 풍수사라면 능히 주변을 뒤져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첨언하자면 부근의 산세는 매우 뛰어난 것으로 소나무 주위를 싼 대부분의 산들이 돌출되어 있어 능히 명당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눈여겨 볼 것은 마총 뒤에 모셔진 묘역이다. 누구의 묘역인지 비석도 없다. 그러나 바위로 이루어진 혈판에 모셔져 있으며 좌우로 돌이 둘러쳐져 있는 모습이 약간의 변이는 있으나 해목혈(蟹目穴)로 보아도 모자람이 없을 듯하다. 해목혈은 매우 귀한 혈로서 속발하고 후손이 급제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혈로 알려져 있다. 단지 흠이라면 주변산세가 높아 조금은 억압을 당하는 형상이지만 천옥은 아니다. 또한 문경읍 방향의 산세에 깊이 파인 협곡이 있으니 팔요풍을 따져야 할 것이다.
혈판 자체는 충분히 도반을 넘어서고 있으니 귀한 혈판이다. 그 대소와 높이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낮은 곳에서도 좋은 혈판이 나올 수 있다. 기맥은 은맥으로 입수하였으며 중간에 논이 있는 것은 나중에 개간한 것이다. 그러나 은맥이기 때문에 입수룡에 전혀 지장은 없다. 혈판 주위가 바위로 이루어져 있고 아마도 배토장으로 묘역을 조성하였을 것이다. 기맥의 흐름으로 보아 전순이 너럭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니 후손중에는 대단히 명망있는 종교인이 출생할 것으로 보여진다. |
< 연주패옥(連珠佩玉)이란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구슬을 잇고 구슬을 찼다"는 뜻인데 연주패옥형 명당이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이여송 부대에 속해 술사로 참가한 두사총이란 사람이 당시 조선의 명재상인 약포 정탁 대감의 인품에 감복하여 약포를 위해 잡아준 명당 자리로 두사총이 그 명당자리를 연주패옥의 자리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어떤 기록에는 위 두사총이 잡아 준 것이 아니라 이여송의 부장으로 참전하였다가 명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대구에 살게 된 두사충 장군이 잡아 주었다고도 한다.
연주패옥형 명당이란 경북 문경군 동로면 적성리 황장산 혹은 황정산(皇廷山, 鵲城山) 기슭에 있다고 하는데(두사총이 위 명당자리를 잡아줄 때는 위 동로면이 경북 예천군에 속해 있었음) 위 명당의 형세가 "선녀가 화장을 하기 위해 거울을 보면서 목걸이(연주패옥)을 늘어뜨린 형상으로 이곳에 무덤을 쓰면 그 후손 중에 금관자 옥관자가 각 서말이 나올 자리"라고 설명하였다고 한다.
금관자 옥관자란 정3품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이 망건끈에 다는 관자로 결국 3품 벼슬 이상을 할 후손이 엄청나게 많이 나온다는 자리라고 한다.
두사총이 위 명당자리를 알려줄 때 약포대감은 연로하였기에 그의 구종을 데리고 가서 자리를 알려주고 명나라로 떠났는데 나중에 약포가 죽은 뒤 약포의 아들이 그 종을 데리고 위 적성리 부근에 가서 종에게 명당자리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그 순간에 말이 갑자기 놀라 발길질을 하자 발길에 구종이 차여 즉사하고 명당 자리를 알려주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화가난 약포의 아들은 그 자리에서 말의 목을 베었고, 다른 지관들을 동원해 위 명당자리를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고향 이웃 동네인 현재의 예천군 호명면 본리 뒷산 위라곡에 묘를 썼다고 하고, 위 말의 시체는 주민들이 그곳 길가에 무덤을 만들어 주어 지금까지 동로면 생달리로 가는 길가에 마총과 조그마한 비석이 남아 있다.
그 후 현재까지 지관들이 위 황장산(黃腸山) 일대에서 위 연주패옥의 자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아직 그 자리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도 일대에는 명당을 찾으려는 지관(地官)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곳으로 주변에는 백두대간(白頭大幹) 명산(名山)들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천주봉, 대미산(大美山), 옥녀봉, 경대봉이 있어 그 천하의 명당다운 형세를 자랑하고 있다. 문경읍에서 주흘산 바라보며 동쪽으로 가면 갈평지나 대미산 을 끼고 넘는 고개가 나옵니다. 이름하여 여우목 고개, 여우목 고개는 경상도 동쪽 지방의 사람들이 서울로 갈 때 문경새재로 향하던 길목이었습니다. 그 모양이 여우 목덜미와 비슷하다 하여 여우목이라 하기도 하고 여우가 많이 다니는 길목이라고 하여 여우목이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이 고개 너머가면 동로면 생달리인데 도로변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나무가 허리춤에 금줄을 차고 예사롭지 않은 자태로 마을을 지키고 있다. 마총(馬塚) 옆에 그 이후에 심어진듯 300년 수령의 소나무 금줄에 말과 짚신이 달려 있곤 했다고 한다. 그 금줄은 죽은 말의 위령을 달래는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소나무 자체보다 주변 이야기가 더 재미있는 소나무다. 나무의 수령이 350년 이라고 하니 말무덤 이후에 자란 소나무임이 분명한데 아직도 찾지못한 연주패옥의 명당자리는 바로 소나무 자리 말무덤이 아닐런지는..
또 다른 전설은 칡 덩굴이 많은 곳을 개간하여 마을을 만들었다 하여 갈밭골 또는 갈전동이라 한다는 갈전동의 전설이다. 마을 앞에 옥녀봉(玉女峰)이 있고 그 동쪽 산 정상에 치마바위가 있으며 연주패옥(連珠佩玉)이라는 풍수지리설이 전해오고 있다. 연주패옥이란 우리나라 8대 명산과 묘지 중의 하나라고 하며 선조때 약포 정탁(鄭琢)이 중국의 이름있는 풍수 두사충으로 하여금 자기의 묘터를 찾게 했는데 이 곳에서 연주 패옥을 발견하고 구리로 만든 술잔 한개와 은 300량을 묻고 표지를 해 놓았으나 자손들에게 알리지 못하고 죽었다 한다. 그 후 그 아들이 명당터를 찾기 위하여 선친 정탁과 같이 다니던 청지기를 데리고 갈밭골 입구 큰 노송 밑에서 잠시 쉬면서 묘터가 어느 쪽이냐고 묻자 청지기가 저기 저곳입니다 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타고 왔던 말이 갑자기 노(怒) 하면서 청지기를 물어 죽였다 한다. 이에 화가 난 주인은 말의 목을 베어 그 노송밑에 매장하여 버렸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연주패옥을 찾는 사람은 많으나 찾지 못한채 그 주변에 묘만 생겼고 말 무덤과 함께 50평 크기의 큰 바위 옆에 서 있는 수령 600년 가량의 노송만이 당시의 전설을 간직한체 외롭게 서 있다. 연주패옥은 그 곳에서 100보 거리일 것이라는 전설도 있다. 문경에는 견훤의 전설도 전해 온다. 가은읍 갈동 아차리는 견훤(甄萱)이 출생한 곳이라는 유래담이 있으며 견훤이 후백제왕이 되기 전 궁터에서 살고 있었다. 농암 궁터 입구에 층암절벽이 임립(林立)되어 있는 용추가에 말바위란 바위가 있다. 견훤이 이 바위에서 용마를 얻었다고하여 그 때부터 이 바위를 말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황장산(黃腸山) 산중에는 고구려 때 축성되었다는 작성산성(鵲城山城)과 고려 공민왕 때 왕실의 비빈과 상궁들의 피신처가 되기도 하였다는 문안골이 있다. 조선 숙종 6년 대미산(大美山:1,077m)을 주령으로 하는 이 일대가 봉산(封山)으로 지정되어 황장봉산(黃腸封山)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고 대원군이 이 산의 황장목을 베어 경복궁을 지었다고도 전해진다. 신라 때 개척하여 2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하늘재(寒喧嶺)와 계립재(鷄立嶺)·새재(鳥嶺)·이우리재(伊火峴)·이화령(梨花嶺)과 더불어 황장(黃腸)은 황제의 마음이라는 뜻이 있다. 황장목(黃腸木)이라는 이름은 줄기의 고갱이 부분에 송진이 적절히 베어들어 속이 누런 소나무를 말한다. 세종 2년 예조(禮曺)의 계(啓)에 "천자의 곽(槨)은 황장으로 만들고 군제후도 송장(소나무)으로 관(棺)을 만드는데 황장송심이 그것입니다. 옛적부터 천자제후의 곽을 반드시 황장으로 만드는 이유는 황심은 목재가 견고하고 오래되어도 썩지 않으나, 백변(白邊)은 내습성이 없어 속히 썩는데 있습니다." 하는 내용이 있다. 황장목이란 임금의 관을 만드는 데 쓰는 품이 좋은 소나무의 황장으로 된 목재로서 재궁(齋宮)또는 공공건물을 지을 때 사용하는 양질의 소나무를 말하고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내지 속대전(續大典)에 의하면 태봉봉산(胎封封山), 율목봉산(栗木封山), 금산(禁山), 의송산(宜松山), 송전(松田, 松山), 영액(靈液)등 그 산림지역을 봉산(封山)으로 지정하여 관리했다. 황장산 봉산표석은 지방문화재 자료 제227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미산은 옛 기록에는 대미산(黛眉山)이라고 하나, 조선조 1936년 발간 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與勝覽; 李秉延 著)의 기록에 퇴계 이황선생께서 대미산(大美山)이라고 명명(命名)하여 현재에도 대미산(大美山)이라고 한다. 또 문경제산지조(聞慶諸山之祖)라는 기록이 있으며 강원도 평창에 같은 이름의 산이 있다. 붉고 곧은 줄기, 사철 푸른 잎. 우리 소나무, 금강송(金剛松)은 소나무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고 심지가 곧다. 그래서 금강이다. 금강송의 피는 뜨겁고 기개는 시퍼렇다. 거기 함께 사는 사람도 어찌 금강송을 닮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한편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모사인 두(杜)복야가 실수하여 이여송이 그를 죽이고자 할 때 마침 약포가 이여송을 찾아보고 죽이느니 차라리 자신에게 달라고 해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며 두사충은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감여요람(堪輿要覽)이라는 풍수지리서를 지어 예천지방의 명당 묘터를 10곳을 적어 주었다. 그 뒤 예천지방에는 많은 풍수들이 이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몰려들어 지금까지 500년을 헤매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의 약포의 후손들도 대개 이런 정도로 들어 알고 있고 조상에 관한 귀한 전설로 여기고 있다. `회원(檜原)과 성림송(省林松) 그리고 범백석(凡白石)`이 떠오른다. 청주정씨재실에서는 그 잔으로 제를 올린다고 한다.
또한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에 가면 묘라리(妙羅里)란 마을이 있다. 그곳 사람들은 이 마을 이름을 처음 지은 이가 바로 두사총이었다고 기억한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따라 조선에 온 두사총은 중국 군대를 따라 전국 각지를 누볐다. 한 번은 이곳을 지나게 됐다. 두사총은 이곳의 지세를 자세히 살핀 다음 ‘풍취라대’(風吹羅帶)라고 결론지었다. 비단 허리띠가 바람에 펄럭이는 모양이란 이야기다. 비단 띠는 고관대작이나 두르는 귀한 물건이라, 장차 이 마을 사람들은 부귀를 누리게 된다는 풍수예언이었다. 그런 뜻을 새겨 두사총은 마을 이름을 ‘묘라’(妙羅 매우 고운 비단)라고 했다. 북으로 만경능제가 있는 평야지역이다. 묘라, 후리, 두무동, 양수장, 사거리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

“오룡쟁주형” 결록을 찾아서 (충남 유구 동해)
公州 東海洞 五龍爭珠形 左旋 西向 공주 동해동 오룡쟁주형 좌선 서향
溫陽 南 二十里 新昌 東 二十餘里 公州 北 七十里 온양 남 2 0 리 신창 동 2 0 여리 공주 북 7 0 리
穴深 六尺 龜蛇 馬上貴 日月 悍門 혈심 육척 구사 마상귀 일월 한문
備 判筆 凌雲 誥軸 居震 三吉 六秀 當代發 九代 三公 駙馬 當出 비 판필 능운 고축 거진 삼길 육수 당대발 구대 삼공 부마 당출
羅訣 云 此 穴 越有大地 不可言傳云 나결 운 차 혈 월유대지 불가언전운
廣德 三邑界 茂城 兩龍 相過之間 東海谷 五龍爭 광덕 삼읍계 무성 병룡 상우지간 동해곡 오룡쟁
地名 臥龍谷 又 越有 云 大地 疑是 仙人擊鼓形 云 此 今 人稱之耳 지명 와룡곡 우 월유 운 대지 의시 선인격고형 운 차 금 인칭지이
- 만산결, 유산록(장익호). 봉안결(동산). -
공주 동해동 골짜기에 오룡쟁주형의 혈이 있으니, 좌 선룡이며 서향이다. 온양에서 남쪽으로 20리요, 신창에서 동쪽으로 20여리, 공주에서 북쪽으로 70여리다. 혈의 깊이는 여섯자 이다. “구사”는 거북과 뱀같이 생긴 사격이며, “마상귀”는 천마 위에 귀인이 앉아 있는 것 같은 사격이다. “日.月”는 “해”와 “달” 같이 생긴 사격으로, 산이 물 나가는 곳 즉 수구를 지키고 있다. 귀한 사격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며, 판필도 구름 위에 높이 솟아 있다. 고축사는 진방(卯) 에 있으며, 卯方(묘방)을 호위하고 여의주는 庚酉方(경유방)에 있다. 삼길(亥,震,庚) 육수(艮丙, 巽辛, 兌丁)방이 특위하고, 길한 사격들도 벌려 세워 져 있다. 당대에 크게 발복하여 9대에 걸쳐 장상(재상)이 연출하고, 부마도 당연히 나온다 . 羅氏(나씨) 라는 先師(선사)가 기록을 남겼다. 또, 이르기를 이 혈 건너 쪽에 대혈이 있으니, 함부로 전함이 불가 하다.
위 혈은 금북정맥의 연맥인 광덕산과 무성산이 서로 교차하며, 병룡이 병방에서 뻗어와 상우지간 차령을 지나, 금북정맥인 곡두고개(호계터널)인 과협을 거쳐 서진 하다가, 갈재고개에서 간인. 임감. 건해. 낙맥하여, 변화. 무쌍. 천변. 만화. 십여리를 행용하고, 평지. 과협. 절절. 기복. 위이.한다. 동해동(와룡골)에 이르러 입국 결혈 하였으니, 다섯마리의 용이 하나의 여의주를 앞에 놓고 서로 다투고 있는 오룡쟁주형국이다. 와룡곡 골짜기에 누워 있는 용이 승천하려고 하나,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하고, 영웅이 숨어 있으니, 결인처가 영리하고 용의 역량을 과시하고 있다 을진 갑묘 입수 곤파 이다. 물은 乾亥方(건해방)과 庚酉方(경유방)에서 상당하고 坤水口(곤수구)로 사라진다. 또, 오른쪽 넘어 대혈인 선인격고형(선인이 북을 치는형) 혈이 있으니, 대법관, 대검사 등이 등용하고, 귀인이 난다. 혈은 不高不低(부고부저)하고, 토색은 紅黃滋潤(홍황자윤) 오색토 이니, 부귀대발 무궁하다. 동해동 북쪽에는 괘등형, 동쪽은 복호형, 서쪽은 선인격고형, 남쪽은 오룡쟁주형 등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오룡쟁주가 주혈이며 대혈이다. 그 외에도 선인독서형,장군대좌형,잠룡입수형,,금구하전형,등이 있다. 도솔의 땅 천안 오룡쟁주형 지리비보
고려말 문장가 “이곡”(한산이씨)은 “영주회고정기”(영주는 천안의 옛명이며. 회고정은 정자이름이고 위치는 현 남산공원 남쪽기슬)에서 태조 왕건이, 도솔의 땅(천안 작은 고을명 ) 풍수를 보고 성을 쌓아, 십만 군대의 군영을 훈련시켜 조정하여 후 삼국의 통일을 이루었다고 했다. 이는 “예방”이란 술사가 이르기를 왕자의성과 오룡쟁주의 땅에 군영을 축성하여 전진기지의 역할을 수행하면, 삼국을 통일하여 왕이 될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첨”이 기록한 문집에도 천안의 생성과 건치 영혁에도 “왕씨의 시조가 예방의 말을 듣고 탕정. 대목. 사산의 땅을 나눠 천안부를 설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고려사절요” 제1권 태조신성대왕편의 13년조에 보면 서기930년 가을 8월에 대목군(목천 옛명)에 행차 동,서 도솔을 합쳐서 “천안부”라 하고, 도독부를 두어 왕이 이곳을 다녀간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는 나말여초에 풍수지리의 대가. 술사들이 많이 출현하여 많은 예언을 남기였는데, 그 예언이 평범한 글로 전술 된 것이 아니고, 현모한 언어로 전술 되어 쉽게 해석하기는 어렵고 해서, 그들의 예언를 비결이라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풍수의 대가인 도선선사가 잘 알려져 있는 반면에, 여말선초때는 무학대사가 있지만, 여초에 또 한사람 풍수지리의 술사요, 예언가인 일명 “예방”이라고도 하고 “윤계방”이라는 풍수 대가가 있었다.
“고려사” 첫 부분에 보면 고려의 창업과 도선국사의 내력이 전해지는데, 도선은 백두산에서 남하 하던 중 송학부근을 지날 때 왕건의 부친인 왕륭에게 왕건이 태어날 집터를 정해주며,송학산의 험한 바위를 비보 할 수 있는 소나무를 심어 암석이 보이지 않게 해 주면, 내년에 귀한 아이가 태어날 것이니, 그 이름을 왕건이라 지으라고 했다고 한다. 고려의 개국과 최고의 왕사로, 최고의 고승으로, 도선은 추앙을 받았다. 도선이 35년간 머물었다는 옥룡사는 과연 명당일까, 그렇치 안은 것 같다. 땅이 푹꺼져 있고, 좌청룡이 허약하고, 약점이 많은 옥룡사 터, 도선은 이런 것들을 보안하기 위해 비보로 명당을 꾸몇다고 볼 수 있다. 좋은 명당을 찾기보다는 허약한 부분에 나무를 심어 지기를 갖게 해주고, 땅을 고쳐 보안한다는 도선의 비보 풍수는,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람이 병들면 침이나 뜸으로 치료하듯, 산천의 문제점도 절이나 탑을 세워 가지고, 보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도선은 우리나라 지형을 행주형으로 보았는데, 태백산과 금강산은 배의 “머리”요, 월출산과 영주산은 “꼬리”요, 변산반도는 배의 “키”요, 지리산은 “노”요, 운주산은 배의 “중앙”으로 봐 천불천탑을 세워, 땅의 부족한 부분을 고쳐서 명당으로 만드는 비보풍수의 창조자였다고 볼때, 천안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술사 예방에 관해 열거하고자 한다.
“예방”은 어느 고향에서 태어났는지는 모르나, 풍수지리에 밝아 전국 각지의 산천을 두루 살펴 다녔는데,그가 평생을 몸바쳐 풍수지리를 공부한 것은 천하영지를 찾아서 백성들이 편안하고 태평성대를 누릴수 있는 곳을 찾아 다녔다. 그러다가 현재 천안에 이르러 동서로 관통하고 있는, 현재 금북정맥(서운산~위례산~성거산~태조산~취암산~광덕산)을 두루 간산 하였다. “예방”은 현제 부르고 있는 태조산에 올라 사방 산줄기를 살펴 보니, 위례산,성거산에서 서남방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 하나가 우뚝 서서 영기를 품고 있었다. “예방”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그 산줄기를 단숨에 내려가(왕자봉), 우뚝 솟은 산봉우리에 올라 갔다. 산 봉우리에 올라가서 사방을 살펴보니, 세 갈래의 산이 남북으로 뻗었으며, 동서의 산 줄기가 한축을 이루어 영락없는 임금 왕자 형국(현 호서대학교 주봉 왕자산)이었다. “예방”은 왕자산 능선이 서남방으로 뻗어 내려 회룡을 이루고, 여의주(중앙공원 남산)를 다투는 형국을 찾게 되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오룡이 서로 다투어 여의주를 취하면 하늘을 승천하는 듯 소위 오룡쟁주의 지세로 명당의 길지 였기 때문이다.
“예방”은 여러 번 태조봉 왕자산 오룡쟁주의 명당을 살펴 보고, 송악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였으나, 하루에 백 여리씩 걸으면서도 마음이 급한 탓인지 발걸음이 늘인 것만 같았다. 삼일 후 송악의 대궐 앞에 당도 하니, 초라한 행색으로 왕건을 뵙기를 요청하니, 수문장을 쉽게 통과를 허락 할리 없었다. 적지 않은 실갱이를 하고 있는 중에, 지나 가는 조관 한사람이 예방을 예사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수문장을 설득하여 대궐 안에 들어 갈 수 있었다. 왕건은 “내 일찍이 예방의 재주을 들은지 오래인데, 산 따라 물 따라 두루 발붙이지 않은 곳이 없는 도사가 찾아 왔으니, 어찌 반가운 일이 아닌가, 하늘이 나를 도우심이니 어서 그를 들게 하라 명했다” 그는 조관의 주선으로 왕건을 알현하고, 예방은 행색은 초라하였지만 고개를 조아려 말을 하였다. “소신이 생각하옵건대, 상감 마마의 고심은 삼국통일의 웅지를 펴지 못하는데 있을 것이라 생각되옵니다. 삼국을 통일하자면 천시. 지리. 인화를 얻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신라왕조가 천년의 대운이 쇠하고 천시를 다하였으며, 호남에는 견훤의 창궐하고 북방은 상감께서 웅거하셨으니 삼국정립시대가 재현될 것입니다. 후백제의 견훤은 가정도 못 다스리는 위인으로 인화를 잃은지 오래입니다. 따라서 대왕께서는 천시와 인화를 얻으셨으나 지리 한 가지가 부족 합니다. 만약 지리만 비보 한다면 후삼국통일의 대망을 기필코 성취하실 수 있습니다.
“예방”의 말이 잠깐 멈추자 태조는 숨을 몰아쉬며, “그러면 어떻게 지리를 비보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예방을 응시 하였다. 태조는 후일 훈요십조를 후손에게 내릴 때 풍수지리에 큰 관심을 표했듯이, 풍수지리를 신봉하고 있던 터이라 예방은 다시 세객으로 돌아가 막힘없이 말을 하였다. 소신이 평생을 바쳐 지리를 연구했습니다. 지리공부를 한 것은 속되게 음.양택이나 잡아주자는데 있지 않고, 태평성세를 이룰 길상의 땅을 가려 왕업을 비보하자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하태평의 길지가 없나하고, 근역 삼천리를 탐사하온바 삼국의 중심지인 사산(직산)목주(목천)땅 도솔이라는 곳에 일좌명산이 있사온데, 산위에 올라가 보니 산의 능선에 세획이 그어져 있고, 세로 한 획이 뚜렷하게 임금왕자(이것을 현재 상봉 중봉 하봉으로 왕자산)가 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산을 따라 내려가 살펴 보니, 여의주 형국의 작은산이 있고, 주위에 오룡이 서로 구슬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이 왕자형국의 산줄기가 뻗어 내려 다섯용이 구술을 다투는 형세 즉 “오룡쟁주형”의 명당에 걸쳐 있습니다. 신의 소견으로 왕자형국의 산에 성을 쌓고, 군영을 베풀고, 오룡 쟁주의 명당에 삼천민호 고을을 설치 한다면, 신라와 백제가 싸우지 않고 자연적으로 삼국통일의 대업으로 성취하실 것입니다. 태조는 무엇에 홀린 듯 듣고 있다가, 태조는 “그런 길지가 어디 있는가, 내 친심을 하리라” 하고, 그 자리에서 대소신료 들을 불러들여 남행거동을 하여 왕의 행차가 남으로 출발했다.
몇 일 후 예방을 앞세운 왕가가 남하하여 목주에 도착하였다. 태조는 여정을 푼 후 지체 없이 예방을 따라 산에 올았다. 태조는 신무를 자랑하는 명장이고, 예방은 산을 평지처럼 달리는 처지라 수종이 미처 따를 사이도 없이 산 봉우리에 올랐다. 이산이 현재의 태조산으로 420고지 입니다. 그 전까지는 산이름이 무엇인지 잘 전해지지 않았지만 고려 태조가 올라가 지세를 살핀 후, 산 이름을 태조산 또는 태조봉으로 불리우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 정상에 도착하자 예방이 눈 아래에 펼쳐있는 지팽이를 들어 서편 아래에 솟은 봉우리를 가르쳤다. 저 산의 형국을 살피보소서. 왕자형국이 아닙니까, 태조가 살피니 영락 없는 임금왕(산의 모양)자 이였다. 가로 세획, 세로 한획, 태조는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이렇게 좋은 곳을 나에게 물색하여 삼국통일의 과업을 달성하게 하니 참으로 가상한 일이요”. 이곳은 고려의 허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으로 삼천리 모두를 장악 할 수 있고, 저 북쪽에 보이는 곳이 사산(직산)이옵고, 삼한의 맹주인 목지국왕이 자리 잡았던 곳입니다. 그리고 저산이 위례성이 있는 산으로, 백제 온조왕의 첫도읍지로 목지국왕과 온조왕이 이 나라의 중앙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나라을 이르킬수 있었습니다. 전하는 이제 왕자산을 얻었으니 근역의 주인이 되신 것입니다. 예방의 말을 듣고 흐뭇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와 날이 저물어 하루 밤을 지내니, 지금도 이 마을이 목천 유왕골이다. 그 이튼날 오룡쟁주의 명당도 살피시고 왕가는 북으로 향하였다.
왕가가 환궁 하자마자 명을 내리여 왕자산 성을 쌓고, 성 아래에 고정을 설치하여 양병을 하였다. 또한 오룡쟁주의 명당에 왕자산을 진산으로 관아를 짖고, 삼천민호를 이주시켜 천안 도독부를 설치하니, 이것이 천안고을이 처음 생긴 것이다. 이해가 고려태조 13년이요. 서기 930년이다. 태조는 좋은 지리를 보고, 대 역사의 인재를 구하는되 몇 일을 궁리하다. 대승(大丞) 제궁(弟芎)으로 내정하고 입궐하라 명하여 제궁이 명을 받고 입궐하니, 태조는 “내 그대를 부른 것은 사산과 목주의 땅을 할해하여 천안도독부를 설치하여 삼국통일의 전진기지로 삼고자하오니, 천안 도독부사는 한 고을의 성주가 아니고, 신라 백제을 견제하는 중책을 맏기는 자리이다, 아무나 갈 자리가 아니라, 내 경의 용맹과 재주을 알고 있는 봐, 천안창군에 대임을 맏기니 부임하라” 명하였다. 이 말이 떨어지자 제궁은 머리를 조아려 “천안도독은 지방 수령이 아니옵고 군사도둑이니, 그 인제를 얻지 않고서는 감당 할 수 없는 자리니, 지리에 뛰어난 인재를 물색하여 천안도독을 제수하시기 바랍니다”. 신과 같은 용제가 맡을 자리가 아닌듯합니다. 태조는 대견 하듯이 제궁을 바라 보며 경은 내가 잘 알고 있는 터, 지체 없이 부임하여 삼국통일의 과업 터전을 닦도록 전력을 다하라. 도독부에는 유능한 부사가 필요하니 경과 함께 성업을 완수할 부사를 천거하라 하니, 재궁은 머리를 조아려 부사로는 나이가 젊은 지.인.용을 겸비한 엄식을 적임자임을 아뢰니, 태조는 기뻐하며 경은 과연 지인 지감이 있는 사람이요. 엄식은 내가 이미 내가 유능한 인제로 손꼽아 오던 사람중 한사람인데 흐뭇해 했다. 이렇게 해서 천안의 첫성주인 대승제궁으로 사使을 삼고과 원보元甫 엄식을 부사로 부임하니, 새로 개척하는 고을로 관아를 짖고, 민호를 이주시켰다. 원래 이곳에는 동도솔. 서도솔로 불리우던 고을 이었는데, 고려의 전진기지인 고을을 형성하기엔 부족했다. 관아는 오룡쟁주인 여의주인 남산을 바라보는 황룡에 세우고, 낮은 곳에는 논을 만들고, 높은 곳에은 밭을 개간하였다. 이렇게 이주해온 호구가 삼천호가 되었다.
당시 천안 도독부의 지경은 사산(직산)의 일부분과 목주(목천)군일부와 탕정의 세고을에서 지경을 할애하여, 일부분 때어 천안 고을 이름을 지은 것이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보면 현제 천안시 일원과 풍세와 광덕면 아산시 배방면일부와 음봉 탕정 몇게 고을이 우리 천안고을이 된 것이다. 이 당시는 고을이라기 보다는 군사 도독부로 고려의 전진기지 사령부로 보는게 타당할 것이다. 첫눈에 왕건은 왕자 모양의 산을 보았을 때 왕자의 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시에 풍수지리에 밝은 관심이 깊던 때로 후삼국의 통일의 길지 명당터라니, 애착이 갔던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땅에 “天下安泰”를 얻을수 있다는 뜻에서 이름을 “천안”이라 즉 “천하대안”을 기원하는 “천안”이라 지은 이름으로 현제까지 이르고 있다.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군사 훈련을 하고, 도성을 구축하니 삼 여년 세월이 흘러 후 백제의 견제에 대비하니 고려태조 18년에 천안 도독부를 세운 후 신라 경순왕이 스스로 항복해 왔으며, 후백제는 견훤이 아들 신검의 반란으로 금산사로 유배 되었다가 도망하여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태조19년 6월에 태자 무(武)가장군 “술희”을 거느리고 천안도독부에 유진하였다. 다음에 왕사가 당도하여 태자군과 합류 다음달 9월에 신검은 패하여 일선군에 도망가서 패주하고 포로가 되었다. 태조는 신검이 불효 불충하여 용서 할 수 없다. 하여 자살을 명하였다. 이 관경을 본 견훤은 등창이 터져 서거하고 만다. 이 해가 태조 19년이며 서기 936년이다. 제궁이 천안도독부를 개척한 후 태자군과 왕사 연합주둔 기지를 형성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시설을 갗 춘바 신라가 항복하고, 후백제가 패망하자 설치 목적이 완수 되었으며, 그 이후로 고을이 계속 발전 했다. 이때 운집한 군사의 수가 11개 부대에 87500명에 달했다.
고려 태조는 천안 도독부를 철지한 후 예방의 말대로 지리를 얻었음인지, 적이 스스로 궤멸하여 어렵게 여겼던 삼국통일이 쉽게 이루어 졌다. 조선 태조때 무학 대사의 석왕사 전설은 널리 알려졌으나, 고려 태조때 예방의 왕자산 설화는 잘 알져 있지 않았지만, 천 여년의 세월이 흐르고 천안 고을의 사랑스러운 전설이며 사실이니, 널리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후 예방은 천안 도독부를 세워 삼국통일의 비보를 닦은 후 어디론다 사라져 행적이 묘연하다. 예방은 풍수지리를 공부하여 단 한번 삼국통일의 길지를 잡은 후 산중에 은거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태조 왕건이 직산을 지나 동쪽을 바라보니, 산위에 오색구름이 떠있어 신이 계시는 신령스런 산이라 여겨 사람들은 이때부터 “성거산”이라 불리게 되었고, 비보 사찰로 성거산 정상 바로 옆에 “만일사”란 사찰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때 아름다운 두 마리의 백학이 날아와 현제의 성불사 법당 뒤에 암벽을 부리로 쪼기 시작한지 49일만에 佛形이 완연하였다, 이때 초동의 싸움소리가 들려 이에 놀란 백학은 불상을 완성하지 못하고 날아 다시 굽어 살펴보니 성거산 웅봉이 눈에 띄었다. 그곳에 날아가서 돌을 찾아 부처를 쪼으니 현제의 만일사 마매석불입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 어두워져 앞이 보이지 않으니 백학은 하는 수 없이 미완성에 그치고 날아 갔다. 그 후 백학은 다시 오지 않고 미완성의 부처는 그 자태가 신비롭게 그대로 남아 있다. 날이 저물어 미완성의 부처를 모신절의 이름을 晩日寺라고 이름을 지었다.
천안의 지세는 백두산에서 출발한 대간은 13정맥중 보은 속리산 천황봉에서 서북쪽으로 용틀임하여, 충북지역인 북부 내륙간 동서로 이어져, 안성 칠장산에서 한남금북정맥으로 이어 오다, 북서쪽으로 문수산까지 한강 이남지방 즉 한남정맥으로 이어졌고, 한편 서남쪽으로 이어지는 태안반도 안흥으로 이어 지는 금북정맥은 안성의 칠장산. 서운산에서 천안지역인 옆돈재을 넘어 위례산 성거산 태조산 취암산 고려산 광덕산으로 이어와 높은 산이 연결하고, 천안지역의 동부와 남부지역으로 보면 된다. 북부와 서부는 대부분 구릉산지로 저지대를 이루어 시가지가 발전하고 있는데, 천안시가지는 동서남으로 이어진 금북정맥과 성거산을 주산으로 태조산으로 이어지는 주산에서 왕자산을 진산으로 하고 있다. 시가지는 내외 좌청룡 우백호가 두루 갖춘 형국으로 왕자산에서 내려온 내룡은 신부동 극동아파트을 지나 법원 뒤로 이어 전화국. 구경찰서. 구시청. 구소방서. 구천안군청. 구법원. 세무서. 중앙초등학교. 중앙시장으로 이어져 오룡쟁주형인 여의주 남산을 보고 있는데, 남산은 원래 외떨어진 어느 산에도 연결 되어 있지 않고 독립된 산이 였으나. 지금은 주택과 도로로 감쌓여 있다. 한편 주산에서 내려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여의주(남산)를 중심으로 남쪽의 청수동 水道山은 오룡쟁주의 남룡에 해당하는 곳으로 붉은 용을 상징하며, 여의주을 향하고 있다. 오룡쟁주형의 북룡은 천안초등학교 언덕을 가르키는데, 北龍은 黑龍으로 오룡중에서 가장 힘이 강하며 우람하다, 남산공원인 오룡의 여의주를 중심으로 천안시가의 모든 지류는 남산(여의주)에서 전부 모여 합류하고 감쌓아 합수처 역활을 하고 다시 용곡천으로 이루어 큰 내를 이룬다. 여의주을 중심으로 남서쪽에 보면 우주의 기운인 바람과 물 즉 음과양이 생성하는데 明 은 日 즉 陽과 月 陰이 합하여 명당이 이루어진다. 즉 日峰山과 月峰山은 토성으로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해와 달이 천지를 밝게 여의주을 비추고 있다.
명당이란 음과 양이 화합 한 곳이며 오행에 따른 좌청룡 우백호가 호위하고, 전주작과 후현무가 조화롭게 이루어진 사신을 모두 갖 춘 곧 즉 사수의 격을 갖춘 길지를 말한다. 천안은 주산에서 내려온 천안읍성 옛 관아 터는 명당자리로 중앙초등학교를 일커르며, 지금의 장로교회 언덕과 중앙초등학교로 연결하여 읍성이 옛 관아를 둘러 쌓고, 동헌터는 오룡동199번지로, 구 충청은행뒤 오룡쟁주형의 황룡에 해당하는 곳이다. 황룡의 눈으로 서기를 발하고 통찰하는 관아의 터로 전한다. 터가 강해서 민가로는 알맞은 터가 못되고, 관청의 터로 알맞은 곳이기 때문이다. 약40여년 전에 천안의 어느 부자가 이 터에다 큰집을 지었으나 이사하면서 죽었다고 한다. 동헌의 정문터는 188번지로 삼문으로 세개로 되었으며 삼태극을 그려 문을 표시했다. 가운데 문은 높고 양쪽 작은 문 두개를 두어 일반인들이 드나드는 문이다. 선화루터 내아터는 184번며, 오룡우체국 자리다. 수선정은 외한은행자리. 영남루터는 118번지로 동헌 근처에 있었으나 현제 삼거리공원의 연못가에 있다. 화축관은 중앙초등학교 정문 앞에 있었다.華祝館은 천안관아에서 추가로 건축한 건물인데 중국 화華땅의 은자처럼 임금의 천수를 송축한다는 뜻이 들어있는데, 임금이 온양에 행차시에 임시로 거처한 행궁이다. 현제 천안 관아와 객관자리는 일제시대때 중앙초등학교터로 변했고, 그 앞에는 중앙시 장이 되었다. 관아거리는 저잣거리로 변했다.
천안시 동부지역은 천안삼거리를 지나 傌望山(마망산) 고개 즉 응월리 고개를 넘으면 6개동면(목천.북면.병천.동면.수신.성남)을 일컸는데 이곳은 정감록 감결에 보면 살만한 고장 10승지에 나오며 도선비기에도 나온다. 토정 이지암도 기름진 농토를 짖기 위해 찾았던 봐 상왕산(현 흑성산)에 올라 봉황의 짝을 찾아준 비기 즉 북면의 봉황산과 수신면의 봉황 서로 대칭을 이루니, 상왕상의 큰 자연과 음양의 조화의 참뜻을 알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안타. 전국에서 살기 좋은 곳 다섯 중 한곳에 해당된다는 동부지역, 정권이 바뀔때 마다 행정도시로 주목을 받았던 곳 중의 한곳이기도 하다. 이곳이 청주목에 속했을 때에도 청주에서 제일 살기 좋은 터로 주목을 받으곳이기도 하다. 다음 남부지역은 풍세, 광덕산지 즉 태화산을 중심으로 큰 내와 월경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부지역은 직산 성환 성거 입장으로 북풍을 막아주고, 기름진 토질로 배와 포도가 유명하니 살기 좋은 고장이다.
충남제1의 도시로 부각 받는 천안(도솔.환주.임환.영주.영산) 예부터 천안삼거리는 영호남의 역로 갈라지는 길목으로, 호남지방은 천안서 차령고개를 넘어 공주 전주로 나갔고, 영남지방은 천안에서 청주 보은을 거쳐, 추풍령을 넘어 대구로 내려갔다. 1905년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1931년 장항선 철도가 개통, 서북부의 교통요충지가 되었다. 1970년경부고속도로 통과, 2000년 천안 논산고속도로 경부고속철도 통과, 서울지하철1호선 천안까지 전철 연장 수도권과 근접하고, 오십만 인구가 넘은 도시로 부각 되었다. 어쩌면 이러한 것들이 옛 삼국의 요충지요. 마한의 중심인 목지국요. 백제 온조왕이 도읍한 곳이요. 왕건의 고려건국 중심 역할을 한곳이다. 동남부권에 부각되는 천안삼거리를 근거리로 천안박물관 개축 공사가 진행중이고, 천안 행정타운 복합도시가 한창 공사중이다. 행정타운 지역은 낮은 구릉의 생김새가 용이 머리를 향하여 나르는 형국으로 용마부사 또는 용마비두이다. 옛부터 이곳은 명당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한참 공사중인 토목공사를 보면 좋은 황토와 혈토가 많이 분포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이곳을 용마가 하도를 업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현제ㅇㅇ그룹 ㅇㅇㅇ회장의 조부 ㅇㅇㅇ공의 묘소가 있던 곳이기도 하 유구 동해동.
천안에서 629번 도로로 가다가 광덕산(광덕사)방향 호계터널을 지나, 2킬로 정도 직진하면 동해동 마을이 나온다. 이곳을 여러번 지나 다녔으면서도 결록에 기록 되어 있다는 생각을 안고 무심코 다녔다. 그런데, 2005년 겨울이다. 경매에 나온 물건이 유구 동해동에 있는 마을 뒷산 5000여 평이 나와 이 곳을 찾게 되었는데, 추운 겨울. 눈이 쌓여 푹푹 빠져가면서 지도와 사진 도면을 갖고 찾던 일. 경매지에는 완경사로 나와 찾았으나, 확인하여 보니 급경사였고, 아주 오래된 묘 한기가 있었으며, 정혈처는 아니고, 어느 참판 정도하신 분의 묘지였다. 용맥이 너무 비탈져 있어 실망하고, 발길을 집으로 돌려, 땅 사기를 포기하고 왔다. 어쩌다, 친구한테 이 이야기를 하였더니, 친구(윤승진 천안거주) 말이 자기 부모님. 증조부. 고조부 산소가 동해리에 있는데, 청오 지창룡 풍수가를 불러 생전에 썼다는 말을 듣고, 어느 곳이냐 했더니. 아니라 다를까, 경매 물건에 나왔던 바로 옆 산줄기에 우뚝 솟아 잘 갗추어 묘지를 쓴 그 곳 이였다. 2006년도에도 이곳을 네, 다섯번 관산를 답사 했었고, 정통풍수지리학회 4기생 회원들과도 함께 답사하였던 곳이다. 2007년도 5월 8일 등산 겸 산세도 보고, 산 나물도 채취하기 위해 동해리를 찾았는데, 윤승진 형님이 어버이날이라 조상묘를 찾아 카네이션과 술. 예를 올리려 다녀 왔던 게다. 다가 가서 윤승준이 친구입니다. 산소 잘 쓰셨네요. 인사를 나누었다. 이곳에 조상 묘를 쓰고는 모두 집안들이 후덕하고 화목하며, 조카가 사법고시도 합격하였고, 또 한명은 경찰대학도 합격, 그리고 형제들의 사업도 잘 되고 있으니,.... 아. 이것이 바로 풍수에서 말하는 동기감응일까, 연구하여 볼 자리기도 한 곳. 동해동이다.
동해동
오룡쟁주형국(일명 구룡쟁주형국 필자)
동쪽으로는 무성산 산줄기가 疊疊山中(첩첩산중)이고, 圍繞(위요)한 산줄기는 萬疊(만첩)을 이루어져 開面環拱(개면환공)하니, 수구는 重重關鏁 (중중관쇄) 曲曲緊塞(곡곡권새) 하였으니 가히 “兵禍不入之地”(병화불입지지)이다. 500m가 넘는 높이 솟은 국사봉. 무성산. 금계산. 태봉산. 법화산. 삼십팔장 웅장하고 화려하다.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곳 결록을 보고 찾아와 답사하고, 산소를 썼으나 佳穴大地(가혈대지)이요, 어찌 예사로 얻을수 있단 말인가.! 靑龍(청룡)이 如意珠(여의주)를 물고 등천할까,!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이 장관이다.
과연 !
主人(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大地(대지) 後日(후일) 大穴(대혈)은 어느 積德福人(적덕복인)이 쓰여질까.! 여러번 답사한 결과 오룡쟁주형의 정혈처 천장지비는 그대로 남아 있으며, 또 다른 대혈을 찾았으니 하산하였다. |
 유구. 청양을 지나 칠갑산 산장에서 하루 쉬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쏘나기는 내리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황우석 박사의 생가 집은 충남 부여군 은산면 홍산2리, 鷄龍堂까지는 7킬로 정도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아침은 미리 준비한 컵라면으로 산장에서 뜨거운 물을 넣어 출발, 조금 가다 알맞은 장소에서 갓 길에 차를 되고, 대충 컵라면으로 아침을 먹었다. 길가 가장자리에는 군데군데 포도을 파는 원두막이 눈에 띈다. 2007년 8월 12일. 황우석교수의 생가 마을이 어디냐고 포도을 파시는 아주머니께 알아 보니, 조금 가서 좌 측편 마을이라고 친절히 가르쳐 주셨다. 고마워 이곳에서 포도 4~5송이를 사서 맛을 보니, 토질이 좋고 기후 조건이 맞아 그런지 당분이 많아 맛이 좋았다. 어느 덧 눈 시야에 홍산2리(계룡당) 펫말이 보이고, 입구에는 황 교수님의 플랭카드를 걸어 놓았던 흔적인 쇳 파이프가 그대로 놓여 있다. 한때 이곳에는 황 교수님의 플랭카드 글이 가득 메웠을 게다.
鷄龍堂.
마을 지세가 닭의 벼슬과 같고, 용의 꼬리를 닮았다하여 붙처진 “鷄龍堂”마을.
우리나라 백두대간의 13정맥중 하나인 금북정맥. 속리산의 정맥을 타고, 안성의 칠장산에서 서진, 서운산과 천안의 동남쪽 방향의 산맥, 즉 태조산. 광덕산을 지나, 오서산 가기 전 청양의 백월산에서 남진, 삼태산. 조공산. 축륭봉을 이루고 동진하여, 당산에서 두릉을 이루니, 두지봉에서 멈췄다. 계룡당 마을의 형세를 살펴 보면 제일 큰 봉우리가 두지봉으로 좌 우 산재당골과 파래골이 겹겹이 둘러 쌓여 있으며, 마을의 용세가 닭의 벼슬과 같으니 그 형상이 금계가 계룡당을 품는 것 같다. 마을은 여름이라 그런지 녹음이 우거져 한층 마을이 평화롭게 보여 진다. 마을 앞 뜰에는 조공산(402.2)에서 발원한 냇물이 흐르며 길가의 원두막이 한가롭다.
여기서, 63억 인류의 희망을 주고, 난치병. 희귀병을 고칠 희망을 준, 황 교수가 태어난 작은 산골 마을이다. 계룡당에 도착하였을 때도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으며, 황교수님이 살았던 생가집은 마을에서 좌측으로 올라가 끝집 이였다. 집 입구에 들어서니 차량 2대가 있어, 어느 분들이 답사하기 위해 왔겠지 하고 살펴 보니, 비가 많이 내리는 와중에도 청소를 하고 있지 않는가. 집안 구석구석 부엌이며 안방. 마루. 솟뚜껑 등 깨끗하게 정돈을 한다. 알고 보니 황교수님을 지지하는 모임 대전에서 황교수님의 생가터에 청소를 하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알았다. 생가터는 양지 바른 곳에 위치 하고 있으며, 안채에는 마루 벽에 태극기가 붙쳐저 있고, 마당 보다 조금 높게 지었는데 방안을 살펴보니, 셋 칸짜리 방으로 겉으로는 새롭게 보수하였으나, 원채는 그대로 보존한 상태에서 보수 한 것 같다. 이 곳에서 황 교수님의 3대가 모여 살았다. 한때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 것을 상기 한 듯, 간이 화장실이 2개가 있으며, 마당 뜰에는 아랫채와 감나무. 그리고 호두나무가 열매를 맺어 무르 익어가고 있다. 조금 있으면 멀지 않아 이 호두나무는 두꺼운 껍질속에서 깨어 호두알이 꽊찬 모양을 갖추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게다. 이와 같이 자연도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데, 사회 현실은 알고나 있을까. 과실나무 옆으로 흙 돌담과 나무울타리로 쳐진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다. 대전에서 오신 000. 000 분들로부터 생가 옆으로 황교수님의 조부 산소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조모 묘소와 부친묘소는 동행하여 안내하여 주시니 고마웠다. 그 분들과 짧은 시간이지만 아쉬운 시간을 남기고, 다음에 만날 날이 있겠지 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비가 많이 내려, 우산을 쓰고 부친 산소를 가서 보니, 황교수님이 5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세월의 흐름에 관리가 소홀 한 점은 매우 아쉬웠다. 조모 산소는 부친 산소 못 미쳐, 마을 입구의 봉선사 위쪽, 밭 가장자리에 있는데, 비가 많이 와서 불편한 감은 있었으나, 주맥은 내려와 혈이 맺어진 것으로 확인하였으나, 벌초때 다시와 관산하여 보기로 하고 하산하였다. 조부 산소는 마을 뒤로 내를 건너, 끝 집 위로 150미터 오르면 있는데, 주산에서 온 용맥도 잘 내려 왔고. 주변 산세 또한 좋으며. 수구나 사격도 고루 갖춘 전형적 산소로 세월 속에 관리 소홀로 봉분이 내려와 아쉬운 여운을 남긴다. 모 풍수가들은 황교수의 불행이 조상 산소가 좋지 않아 흉지로 액운이 불운으로 보는 이가 많이 있다. 그 해답을 얻기 위해 답사하였으나 어찌 함부로 붓 가는 데로 쓸 수 있을까.
생가 터
두지봉의 정기가 장독 옆에 있는 복숭아 나무 중심으로 맥이 작혈하여, 안방으로 땅의 생기가 뭉쳐져 결혈 되어 있다. 또 안채 꿀둑 부근 즉 계룡산에 온 또 하나의 지맥이 안채로 작혈하여 지기가 결혈하니, 안방은 최고의 명당터로 자리를 갗추었다. 이곳은 영웅이 태어날 양택지로 황박사님이 태어났다고 보여 진다. 안방에 들어가 뒷문을 활짝 열고 앉아 있어 보니 포근하다. 우백호 두주봉의 골 바람이 조금 불어 오나, 안채의 기운이 흩어져, 불행을 일으킬 그런 흠은 되지 않아 보인다. 생가터의 사격은 주산의 지맥이 잘 내려와 좌청룡. 우백호 안산 모두 조화를 모두 갖춘 보기 드문 금계포란형의 명당터이다.
황우석교수는 창원황씨로 (음력) 1952년 12월 15일 계룡당에서 태어났다. 조부 황태희옹은 유학자로 학문에 밝았으며, 한의학에도 조회가 깊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치료해 주었다. 아버지는 3대독자로 자식이 귀한 집안 이였으나, 이 곳 계룡당에서 터를 잡아 살았다. 황교수님이 5살 때 아버지를 여위고, 편모 슬아에서 3남3녀 6남매 중 셋째이다 . 1960년대 시골의 생활은 매우 어려운 생활 환경으로, 먹고 살기까지 힘이 든 시기였다. 시골 마을에서는 소를 길러서 팔아, 땅도 사고, 자식교육도 시키고, 한집안의 큰 밑천 이였기에 한 가족 같이 항상 함께 지냈던 것이 소 였다. 소가 없는 소작인는 송아지를 다른 집으로부터 얻어와 길러, 엄이 소가 되어 새끼를 낳으면, 어미는 옛 주인에게 돌려 주고, 송아지는 소작인이 같은 때 였다. 황교수의 어머니는 올해로 92세. 6남매를 훌륭하게 키운 강한분이시다. 자식을 교육시키기까지 한우 소작인으로 소를 길렀고, 그로 인해 황교수님은 어린시절은 소와 자연히 친해 졌으며, 소의 습성과 성격을 잘 알았을 것으로 보여 진다. 그는 은산초등학교. 대전서중.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수의학과 동대학원 임공임신학전공하여, 수의학 석사(1979). 박사(1982). 1984년 일본 홋가이도대학 객원연구원 유전번식 연구을 하였고, 1986년 서울대학교 수의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동물복제연구. 1999년 최초로 체세포 복제젖소 영롱이가 탄생한다. 2005년 세계기술 네트워크 생명공학상을 받았고, 동년 세계 최초로 개 복제 성공. 2004년 서울대학교 수의학대학 수의학 석좌교수. 그는 배아죽기세포 연구를 하여, 세계적인 과학자로 주목을 받았고, 국가적인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줄기세포가 가짜라는 이유로 불명예로 놓여 있는 실정이다.
잠시 박사님의 심성을 알아보고 싶어 해박한 지식은 아니지만 10년이 넘게 공부했던 지식을 총 동원해 보았다. 12월 태생인 황 박사님은 농업. 신농(神農)씨가 착한 주인을 돕는 농우(農牛)로 변신, 근면한 백우(白牛)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옛부터 소(丑)는 특별한 무기를 지니지 않으며, 평소에는 보잘것 없고 온순하며, 우둔한 동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일단 목표를 정하면 절벽이라도 뛰어 오른다는 강한 집착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시련과 곤경도 이겨내는 강인한 정신. 한번 하기로 마음먹으면 성취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비장한 각오와 격렬한 정열을 가지고 있다. 소의 인내와 추구심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성공보다 본질적인 향상을 추구하고, 오늘의 괴로움보다 내일의 희망을 중요시한다. 무슨 일이든 믿고 맡기면 책임을 완수할 수 있고 도량도 포부도 크며 인내심도 있다. 와중지병이라 조상의 유산으로는 성공이 미약하고, 본인 스스로 개척하여야 하며, 고향보다는 타향이 타향보다는 타국에서 운이 좋다. 능유능강기모난측(能柔能强其謀難測): 부드러울 땐 부드럽고 강할 땐 강함이 있고, 모계가 깊어 그 의중을 타인이 헤아리기 어렵다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생가와 선영
대통령 선거 때가 되면 풍수지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후보들의 조상 묘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나타낸다. 내 주변 사람들은 빠짐없이 "누가 대통령이 될 것 같으냐?"는 질문을 해댄다. "내가 그것을 알면 지금 이렇게 살겠냐?"가 나의 답변이지만 그들은 뭔가 그럴듯한 답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눈치다. 5년 전에도 그랬다.
풍수지리를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대통령에 누가 당선될 것인가를 미리 예측해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또 풍수지리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이 어느 정도 맞는지를 확인해보는 것도 이런 기회를 통해서다. 사실상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간의 양파전이 될 이번 대선(大選)에서 두 후보의 선영과 생가를 비교해보고 싶은 것은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갖는 마음일 것이다. 과연 그것이 맞을지 안 맞을지는 지켜볼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인물에 대한 선입감을 버리고 순수하게 풍수적인 것만 가지고 판단하기로 했다. 또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보는 시각이고 입장이므로 이것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다. 혹시나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이를 가지고 시비를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실 이 글은 공개하려고 쓴 것이 아니다. 답사를 다녀오면 으레 그런 것처럼 일기 형식으로 혼자 간직하려고 쓴 것이다. 그렇지만 혹시 그곳을 방문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길 안내나 할까 해서 공개하는 것이니 이 마음을 헤아려 주었으면 좋겠다.
작년부터 팔도풍수지리사랑회 정기 답사 때 대선 후보가 될만한 인물들의 생가와 선영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노무현씨의 생가와 선영은 서울에서 너무 멀어 쉽게 갈 수가 없었다. 몇 번 시간을 내서 가보아야지 하면서도 미루고만 있었다. 그러다 지난달 그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마음이 급해졌다. 다 결정된 다음 가보아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되어 결정되기 전에 가보아야 될 것 같았다.
5월26일 팔풍사 정기답산 때 임수현 사장님(현재 팔도풍수지리사랑회 고문이고 영남대학교 대학원 풍수지리학과 석사과정)과 월요일(5월26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약속을 했다. 좀 편안한 장거리 운행을 위해서 임 고문님의 애쿠스 승용차를 이용했다.
1.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대전에서 대전-진주간 고속도를 따라 끝까지 가면 남해안 고속도로와 연결된다. 부산방향으로 들어서 달리다 보면 진영, 진례 IC가 나온다. 톨게이트를 나와 진영 쪽으로 우회전하여 쭉 직진하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1042번 도로 진영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그리고 직진하여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14번 도로 창원, 진영과 한림으로 갈리는 설창사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진영 쪽으로 좌회전한다. 그리고 얼마안가면 오른쪽에 `본신입구삼거리` 와 `봉화산마애불`이라는 표시판이 나오는데 이 표시를 보고 우회전하여 가면 작은 공장 지대가 나타난다.
이곳은 본래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용화사라는 절을 새로 짓고 있었는데 절 옆에 있는 산이 노무현 대통령 후보 조부모 묘의 안산이 되고 건너편 감나무 밭 소나무 두 그루 서있는 곳에 조부모 묘가 있다. 이곳은 생가와 부모 묘를 돌아보고 나올 때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봉하(峰下) 마을로 갔다.
공장지대에서 봉하 마을을 가려면 공단 내에 있는 중앙일보 인쇄공장 앞을 똑바로 지나 농수로 같은 개천 길을 따라가면 된다. 마을입구로 돌아가기 전에 좌측 산 중턱에 보면 두 개의 초라한 묘가 보이는데 그곳이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후보의 부모 묘다.
우선 생가를 찾아보기로 했다. 마을 사람에게 물으니 제일 끝에 있는 집이라고 한다. 마을 앞으로 난 개천 길을 따라 가면 끝에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나오는데 감나무 밭 가운데 파랑색 지붕을 한집이 노무현씨가 태어난 곳이다. 지금은 하씨 성을 가진 분이 살고 있다.
2. 봉하 마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 마을은 봉화산(烽火山, 140.4m) 아래에 약40여 호가 모여있는 산골이다. 봉하라는 마을 이름은 옛날부터 봉수대가 서있던 봉화산 아래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해발 140m 정도 밖에 안 되는 산이지만 일자문성인 거문토성이 기운차게 서있고 외청룡 끝에는 낮지만 기암절벽이 솟아있다. 앞에는 일자문성(一字文星)과 천마사(天馬砂)가 한 줄로 이어지면서 마을을 감싸주고 있다. 마을 앞 들판은 마치 바둑판을 깔아놓은 것처럼 반듯하면서 평탄하기가 그지없다. 들판 가운데로 흐르는 하천은 허리띠를 두른 것처럼 마을을 환포해주고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마을이다. 그러나 물이 나가는 수구(水口)가 좁게 관쇄(關鎖) 해주지 못하고 있다. 작은 독산 하나가 수구 들판가운데 있기는 하지만 너무 넓어 부(富)를 축적할 마을 같지는 않았다.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 복거총론(卜居總論)에서 "대저 살곳을 택할 때에는 처음에는 지리(地理)를 살펴보고, 다음에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를 돌아 보라"고 하였다. 지리 중에서도 첫째 수구(水口)를 보고 다음에 야세(野勢), 산형(山形), 토색(土色), 수리(水理), 조산(朝山), 조수(朝水)등을 보라 하였는데 수구가 텅 비고 넓은 곳이면 비록 좋은 토지와 큰집이 있다하더라도 대개는 다음 세대까지 잇지 못하고, 자연히 흩어지고 없어져 망하게 된다고 쓰고 있다.
봉하 마을이 전체적으로 그런 곳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세와 수세 야세는 좋으나 수구가 넓어 재물이 쌓이지 않고 나가니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까 마을은 이러다 할 현대식 집이 없었다. 거의 대부분이 옛집이다. 요즈음 어느 농촌을 가더라도 주택을 현대식으로 개량한 집들이 많은데 이곳은 그렇지가 않았다. 마을에 사람도 많지 않았지만 가끔 만나는 사람들한테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 대해서 물어보면 특유의 무뚝뚝한 경상도 어투로 이사 온지 얼마 안 돼 잘 모르겠다는 대답들이었다. 마을사람들은‘봉화산 정기`를 믿고 있다. 선진규씨(69·봉화산정토원 원장)는 “예로부터 평지에 솟은 돌출산에는 특별한 인물이 난다 했다"며“노후보도 봉화산에서 공부할 때 어두운 시대에 불을 지피는 봉화지기가 되겠다며 호연지기를 키웠다"고 전했다. 봉화산 반경 4㎞ 내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 부인의 손명순씨, 서석재 전 의원, 장기표씨가 태어났고 사시합격자 3명이 배출됐다. 진영에선 10월 말 전국적 명산물인 단감제가 열리고 노무현도 단골 축사멤버다.』
3. 노무현이 태어난 집
노무현 후보가 태어났다는 집은 마을 왼쪽 끝 가장 아래 집에 있다. 바로 윗집은 단칸집에 노부부가 살고 있었고 그 아래 집이 생가(生家)다. 노부부가 살고 있는 집을 통하여 내려오는 맥을 받고 있지만 이곳이 대통령후보가 될 만큼 좋은 집터라고 보기는 어렵다. 집 앞으로 농수로 물이 흐르고 있지만 이곳을 잘 싸주지 못하고 있고 좌측으로 마을의 수구가 넓어 보인다. 또 기암괴석으로 된 청룡이 무섭게 버티고 있으며, 백호는 마을 안쪽을 향해 돌아주니 비주(飛走)했다고 보아야 한다. 재산을 관장하는 백호가 비주했으니 재산이 있을 수 없다. 집 앞에 보이는 안산은 일자문성이며 그 아래 귀인봉이 있지만 집터를 약간 외면하고 있다. 일자문성은 왼쪽 오방(午方)에 있는데 집은 정향(丁向)을 하였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이곳은 마을을 싸주는 청룡끝 자락에 있는 집이다. 그러나 비록 지룡(支龍)이지만 용맥은 내려오고 있었고 그 용맥이 끝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 옛말에 논두렁 정기라도 받아야 면장이라도 한다고 했듯이 어쨌든 봉화산의 정기를 받는 집이라고 하겠다. 집 앞 들 건너편으로 보이는 사격은 대단하다. 오방(午方)의 일자문성(一字文星)이 있고 신방(申方)에 귀인봉(貴人峰), 경방(庚方)에 천마사(天馬砂), 유방(酉方)에 또 천마사가 2개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사격을 모두 취할 수 있는 용과 혈이 못되기 때문에 이상은 높은데 현실이 따라주지 못하는 형국이라 하겠다.
집은 계좌정향(癸坐丁向)을 하고 있는 서사택(西四宅)이다. 파구는 을진(乙辰) 방위이므로 팔십 팔향법으로 충파향상쇠위(沖破向上衰位)에 해당되어 길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도 아닌 길흉(吉凶)이 상반(相半)하는 향이다. 현재는 하씨 성을 가진 언어장애가 있는 분이 살고 있어 자세한 것을 물어 볼 수가 없었다.
노무현은 이곳에서 아버지 노판석(盧判石, 1976년 작고)과 어머니 이순례(李順禮, 1998년 작고) 사이에서 1946년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는 누나 2명, 형이 2명 있었다. 어머니 이씨는 43세의 늦은 나이로 노무현을 잉태할 때 태몽을 하였다. 엄청나게 큰 백마가 말뚝에 매어있었는데 할아버지가 고삐를 주면서 타고 가라하여 말을 타자 발굽을 내딛는 소리가 우렁찬 꿈이었다. 그의 집안은 교육에 남다른 열성을 가진 아버지 덕분에 그의 큰형 노영현(73년 작고)은 당시 진영에서 대학(부산대 법대)을 다닌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어린 노무현은 대학생 형을 둔 것이 커다란 자랑거리였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에 학비를 대는 것은 보통문제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양식이 궁해서 다른 집으로 꾸러 다녔으며 노무현과 둘째 형 건평은 기성회비를 제때 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필통도 제대로 갖지 못해서 선생님한테 꾸지람을 들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노무현은 늘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였다. 그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그의 집은 더 어려워졌다. 큰형 영현씨가 고시에서 좌절하며 가세는 더 기울어 진 것이다. 노무현은 중학교 입학금이 없어서 곤란을 당하기도 했으며, 제때에 입학금을 내지 못한 그의 어머니는 교감선생님 앞에서 엄청난 수모를 당하였다. 교감선생님은 능력도 없으면서 억지로 학교를 들여보내려는 그의 부모를 향해 "구태여 공부시킬 필요가 있는가?"라고 모욕적인 말을 하였다. 결국 입학금도 내지 않고 `외상입학`을 받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 일 때문에 그는 학교가 서먹서먹했다고 한다. 이전부터 자식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그의 부모는 전답을 곶감 빼먹듯 하나씩 팔아 왔는데, 결국 논밭을 비롯해서 이곳 집터까지 팔아야 했다.
4. 노무현이 자란 집
노무현이 중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3칸인 집을 팔고, 마을 중앙에 있는 다 쓰러져 가는 부엌과 방 하나 있는 초라한 오두막집으로 이사를 갔다. 지금도 헛간 같은 오두막집이 남아 있는데 사람이 사는지 안 사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곳을 가보니 집 모양과는 다르게 음택(陰宅)이면 아주 좋았을 혈처(穴處)였다. 마을 뒷산인 일자문성 오른쪽 끝에서 내려온 맥이 원봉(圓峰)을 만들고 다시 대나무 숲이 있는 봉우리를 만든 다음 뒷집 대문 쪽으로 내려온 용맥이 멈추어 유두혈(乳頭穴)을 맺은 곳이다. 일자문성 끝에서 용맥이 출맥하면 거문성(巨文星)으로 보지 않고 평탐랑성(平貪狼星)으로 보기 때문에 유두혈을 맺으면 그 주산의 진혈이라 할 수 있다.
용맥을 확인하기 위해서 뒷집으로 들어가 보자 용맥이 기세 있게 내려오고 있었다. 집 뒤로 난 길이 볼록하므로 용맥을 확인할 수 있다. 집 오른쪽을 보면 선익사가 뻗은 것이 보이며 청룡과 백호가 잘 감싸주는 아주 단단한 혈이다. 너무 좁기 때문에 양택지(陽宅地)로는 부적합할지는 모르지만 풍수적으로는 아주 좋은 곳이다. 그 집의 초라함 때문에 사전 정보가 없으면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꼭 들려보기를 권한다. 이곳에서도 일자문성이나 천마사가 보이고 자좌오향(子坐午向)을 하고 있다. 음택지로나 적합할 단칸 오두막집에 궁핍하게 살았지만 사실상 노무현의 오늘날이 있게 한 자리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큰 형은 부산에 있었고 작은 형 노건평(현재 이 마을에 거주)씨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세탁소 직공으로 취직하며 야간 고등학교를 다녀 그곳에서 숙식을 했기 때문에 노무현만 이곳에서 자랐다. 작은 형은 68년 5급 시험(지금은 9급)에 붙어 10년 동안 세무공무원을 했고 지금은 이 마을에서 과수원 농사를 짓고 있다. 부모님들은 집 주변을 개간하여 딸기와 고구마를 재배하였고, 어머니는 농산물을 이고 30-40리나 되는 마산까지 내다 팔았다. 아버지는 5.16 직후 정부가 시행한 취로사업에 나갔다.
노무현은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5급 공무원(지금의 9급 공무원)이 될 요량으로 강의록을 사다 읽으며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였다. 이때 부산에서 대학을 다니던 큰 형이 집에 내려와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크게 노하여 강의록을 집어 던지면서, 고등학교에 진학하라고 일렀다. 형의 권유 때문에 고교 입시를 준비하였으나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의욕을 별로 갖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머리가 좋은 노무현은 부산상고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가 있었으며, 부산 경남 지역에서 35명을 뽑는 부일 장학생에 선발되었다.
집안에서 학비를 대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가정교사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고, 자취와 하숙을 전전하면서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고교2학년 때는 성적이 떨어져 장학금 마저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호기심 많고 장난기 심한 청소년들이 그러하듯이 친구들과 공부 안 하기 시합을 한다든지, 시험에 같이 불참한다든지, 머리 더 많이 기르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든지, 담배를 숨어 핀다든지 하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정 형편이 어렵기는 하지만 외향적인 그의 성격 때문에 정신적으로 심한 좌절감을 느끼진 않았다고 한다.
고교 졸업 무렵 그는 고시에 도전할 생각을 어렴풋하게 품고 있었지만 먼저 생활이 문제였다. 그래서 농협에 들어가서 돈을 번 다음 서울대학교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시공부에 매진하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꿈은 무산되었다. 농협 시험에 낙방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삼회어망`이라는 작은 어망회사의 경리과 직원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난생 처음 받는 그의 월급은 너무나 적었다. 그는 자신의 학력과 능력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회사를 그만 두었다. 현실안주를 거부한 그의 최종의 몸짓이었다.
그는 독학으로 고시 공부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남의 집 가정교사로 용돈을 마련하고 고시 관련 책들도 얻어왔다. 1966년 5월부터 움막집을 짓고 고시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돈이 필요하면 노가다를 나갔다. 노가다를 하다가 이빨을 다쳐 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때 아파서 병원에 누워 있는데 그에게 희소식이 전해 왔다. 고졸자를 대상으로 하는 사법 행정요원 예비시험에 합격하였다는 것이다.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장래의 성공을 향한 험난한 길에 자그마한 초석을 놓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전까지의 생활에서 보이듯이 당시 그는 고시 공부에 몰두할 수 없었다. 경제적 조건의 어려움이 그를 끊임없이 방황하도록 만들었고, 군 입대는 그의 공부를 잠시 중단시켰다. 그는 군 생활 동안 3급 재경직에 응시해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제대 후 71년 5월 그는 행정직시험 3급 1차 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자신의 저항적 기질이 상명하복의 행정조직에는 적합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어 사법시험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아버지가 개간한 과수원 모퉁이에 움막집을 짓고 고시공부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1975년 드디어 사법고시에 합격하였다.
[54-2]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 부모와 조부모 묘
5. 부모 묘
노무현 부모 묘는 마을입구 야산 중턱에 있다. 봉하 마을에서 보면 우백호 끝 능선 소나무 밭에 있으며 그곳의 주산 형태는 머리가 둥글게 생긴 무곡성(武曲星)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보면 도저히 혈이 될만한 곳 같지가 않았다. 우선 왼쪽 청룡이 될만한 산이 마을 쪽으로 돌아버렸고 오른쪽은 산이 감싸주는 것이 없어 공허해 보인다.
묘를 가기 전에 부모 묘와 할아버지 할머니 묘를 비롯해서 그 윗대 산소에 대한 정보를 더 알기 위해서 노무현 대통령후보 형 노건평씨 댁을 찾았다. 마을 앞을 흐르는 개천 오른쪽에 마을 창고가 있고 그 아래 지붕에 태양열 시설을 한 집이다. 집은 작지만 깨끗하고 마당에 잔디도 깔아놓았고 연못도 있었다. 그러나 농사일을 나갔는지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사람이 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안내자 없이 가기로 했다. 혹 만나는 마을 사람들한테 물어보아도 남의 조상 산소를 어떻게 알겠냐고 약간은 퉁명스러운 대답이다.
마을로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산중턱에 있는 묘지로 향했다. 마을 진입로 길에서 묘지를 바라보면 도저히 혈 같다는 생각이 안 든다. 이곳은 산모퉁이에 해당되기 때문에 바람이 세게 불고있어 더욱 그랬다. 그런데 묘지 근처에 다다르자 바람이 잠잠하였다. 바람 부는 날 답사를 다닐 때 혈처에 이르면 느끼는 그런 감촉이었다. 임 사장님과 나는 동시에 어! 하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의문감탄사가 나왔다.
묘 아래 약1m높이의 석축을 쌓았는데 그 아래는 갈대와 같은 수기가 많은 곳에 자라는 풀들이 무질서하게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미 다녀갔는지 밟힌 흔적이 난무했다. 그런데 여기서 잘 보면 석축 아래를 둘러 싸주고 있는 하수사(下水砂)가 팔을 안고 있듯이 있다. 우측에서 나온 하수사가 왼쪽으로 돌아주었고 오른쪽에서 나온 하수사는 왼쪽으로 돌아 있었다. 가파르고 파헤쳐져서 쉽게 구분하기 어렵지만 자세히 보면 분명한 흔적이 있다. 좌우하수사가 감싸준 공간이 석축 아래다. 그래서 용맥을 좌우에서 보호하면서 따라온 원진수(元辰水, 骨肉水)가 입수도두(入首倒頭)에서 선익사(蟬翼砂)를 따라 좌우로 분수(分水, 界水)한 다음 다시 혈 앞에서 합수(合水)하므로 이곳에 수기가 많은 것이다. 이 하수사가 있으므로 이곳이 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이 혈을 결지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태식잉육법(胎息孕育法)이고, 둘째는 결인속기법(結咽束氣法)이며, 셋째는 좌우선용법(左右旋龍法)이다. 이곳은 좌우선용법에 해당된다.
묘지에 오르면 밑에서 보아 좌측에 아버지와 우측에 어머니 묘가 나란히 쌍분으로 되어 있다. 둘레석을 하였지만 봉분이 아주 작고 관리 상태도 안 좋아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묘 뒤 입수도두에는 모양은 그렇게 좋지 않지만 바위가 단단하게 박혀있고, 왼쪽 청룡 선익사에도 작은 돌이 3개나 박혀있다. 이는 기가 그만큼 강하다는 증거다. 우측 백호 선익사는 바람을 막기 위해서 흙으로 사성을 두껍게 쌓아기 때문에 확인할 수 없었다. 입수도두의 바위를 비롯해서 묘 좌우로 있는 선익사가 매우 단단하게 묘지를 끌어안고 있으니 기가 충만하게 멈춘 혈(穴)이 분명하다. 특히 어머니 묘보다는 아버지 묘가 진혈이라 할 수 있다. 흠이라면 입수도두에 박혀있는 바위의 뾰족한 부분이 어머니 봉분 중앙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묘의 좌향은 축좌미향(丑坐未向)이며 파구는 을진(乙辰) 방위로 들판의 물은 우수도좌(右水倒左)하고 있다. 팔십 팔향법으로는 생가와 마찬가지로 충파향상쇠위(沖破向上衰位)에 해당된다. 이것은 길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도 아닌 길흉(吉凶)이 상반(相半)하는 향이다. 용맥을 확인하기 위해서 숲이 우거진 산으로 올라가 보았다. 넓게 펴져 오는 용 같지만 그 주맥(主脈)은 가늘게 좌우로 굴곡위이(屈曲 ) 변화를 하면서 급하게 내려와 입수도두 바위 오른쪽 끝과 연결된다. 주맥의 좌우에 있는 작은 능선들은 모두 주룡을 보호해주고 있으니 자세히 보면 볼수록 좋은 용맥이다. 이 곳을 답사하는 사람들이 주의해야 할 점은 건성으로 보면 용맥도 혈장도 없는 것처럼 보이므로 꼼꼼히 살펴보아야 한다. 시간을 가지고 보면 볼수록 좋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 곳이니 이러한 혈을 괴교혈(怪巧穴)이라 한다.
멀리서보면 청룡 백호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특히 백호가 허해 보이지만 가까이에 이르면 작은 청룡 백호들이 여러 겹으로 이곳을 감싸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산 아래와는 달리 바람이 잠잠하다. 주변 산과 명당인 들판을 살펴보면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우선 안대로 보이는 산은 관모사(官帽砂)고, 좌측에는 거문성인 일자문성 3개가 나란히 있고, 우측으로는 잘생기고 기운찬 천마사 3개가 나란히 연결되면서 이곳을 감싸 돌아주고 있다. 특히 우측 천마사 아래 들판에 있는 작은 산은 거북이 같기도 하고, 북 같기도 하고, 임금의 옥새(玉璽)같기도 하다. 그 아래 명당인 들판은 마치 바둑판을 펼친 것처럼 평탄하고 넓다. 들판 가운데로 흐르는 하천은 여기서 보아 콤파스로 선을 그린 것처럼 환포해주고 있다. 주변 사격과 명당만 가지고 본다면 이곳처럼 장엄하고 잘생긴 곳은 보기 힘들다. 하나만 있어도 귀하다는 천마사와 일자문성이 각각 3개씩 있는데 이들의 방향은 손(巽), 병(丙), 정(丁) 방에 일자문성이고, 신(申), 유(酉), 신(辛) 방에는 천마사다. 천마사의 특징은 발복이 매우 빠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흠이라면 정방(丁方)과 경방(庚方)에 이곳을 살짝 엿보는 규봉(窺峰)이 있다.
임 사장님과 나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이곳의 형국(形局)을 무엇이라고 해야할지를 가지고 고심했다. 단번에 뭐라고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아들이 대통령 후보이고 우측 들판 가운데에 있는 산을 임금의 옥새로 보아 군왕형(君王形)으로 이름을 붙이자는 임 사장님의 의견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너무 결과를 가지고 아부하는 느낌이 들어 장군단좌형(將軍端坐形)으로 하기로 했다. 우선 주산이 둥글게 생긴 무곡성(武曲星, 盧武鉉의 이름도 武자가 들어간다.)으로 장군이 앉아있는 모습으로 보았다. 앉아있는 사람은 기가 단전(丹田)에 집중되기 때문에 주산과 비교해서 이 묘의 높이는 단전 높이와 비슷하다. 장군에게는 필수적인 말인 천마사가 있고, 일자문성은 군막으로 보았다. 오른쪽 옥새 같은 사격은 북으로 보고, 봉하 마을 청룡에 있는 바위산을 깃발로 보면 좌기우고(左旗右鼓)가 들어맞는다. 장군대좌형(將軍臺座形)으로 하지 않고 장군단좌형(將軍端坐形)이라 한 이유는 병사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없는 장군은 있을 수 없겠지만 일자문성을 군막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안에 병사들이 숙영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2개의 살짝 엿보는 규봉(窺峰)은 적군의 스파이로 보자. 장군이 홀로 앉아 군마(軍馬)와 군막(軍幕)을 바라보면서 다음날 전투구상을 하는 형국이라고 내가 소설을 쓰듯이 이야기를 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도 한산도 달 밝은 밤에 긴칼 옆에 차고 수루에 홀로 앉아 있지 않았던가. 좀 더 비약시켜 말을 꾸미자면 천마사와 일자문성이 3개씩이므로 육군, 공군, 해군이고 이 3군을 통솔하는 장군 즉 국군통수권자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노무현씨는 육군 병장 출신이다. 하기야 대장 위에 병장이라는 말을 군 생활 할 때 많이 들었다.
설사 아버지 묘가 속발하는 혈이라 하더라도 이 때문에 노무현씨가 대통령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왜냐하면 용과 혈이 다른 곳에서 보았던 제왕지지처럼 크고 뚜렷하지가 않다. 또 이곳이 대통령을 낼만한 자리라 할지라도 풍수지리에서 동기감응은 묘를 쓰고 태어난 자손은 100% 그 정기를 받지만 나이들은 사람은 그 영향력을 적게 받기 때문이다. 노무현씨가 1946년 생이고 아버지는 1976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장년이 다 된 서른 살에 쓴 묘다. 이 때문에 임 사장님의 단호한 확신과는 다르게 여러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꼭 할아버지 할머니 묘를 꼭 살펴보아야만 했다. 그곳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증조부나 고조부 묘도 살펴보아야 했다. 그 곳의 위치를 알기 위해서 노 후보 형님 댁에 들린 것인데 아무도 없어 물어보지 못했으니 아쉽기 그지없었다.
부모 묘 앞에 있는 작은 상석(제단) 전면에는 "학생광주노공휘판석지묘(學生光州盧公諱判石之墓), 배유인성산이씨쌍분(配孺人星山李氏雙墳)"이라 적혀있고, 좌측면에는 "父 1900년 8월 19일生 - 1976년 1월 19일 卒, 母 1904년 9월 13일 生 - 1998년 1얼 24일 卒" 우측면에는 "子 영현(英鉉) 건평(健平) 무현(武鉉), 孫 창국(昌國) 지원(智源) 진국(振國) 상욱(尙煜) 건호(建昊)"이라고 쓰여 있다. 이 곳에 묘를 쓰게 된 동기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경향신문에 다음과 같이 형 노건평씨와 인터뷰한 내용이 있었다.
『요즘 묘를 보려는 전국 지관들이 몰린다.“햇볕 잘 드는 곳에 묻어달라는 게 부모의 유언이었다. 1976년에 `반풍수`로 불리는 마을 어른께 2만원(현재 20만원쯤)을 사례하고 부친 묘를 잡고, 98년 별세한 모친을 옆에 모셨다. 94년쯤 묘를 단장하려 석물 3백만 원 어치를 샀는데, 동생(노무현)이 호화 묘가 된다고 반대해 겨우 제단만 차리고 나머지는 버렸다. 서운했지만 국민 경선을 치러보니 동생 판단이 옳았다. 계획대로 했으면 사진 찍히고 공격받았을 것이다.』
노무현의 본관은 광주(光州)다. 광주노씨(光州盧氏) 32대 손(孫)이고, 노태우(盧泰愚) 전대통령은 교하노씨(交河盧氏)다. 16대조는 정승을 했고 10대조 해은공(海隱公)은 벼슬하다 임금의 오해를 사 이 지역에 내려와 은거했다고 한다. 9대조(경남 고성)를 거쳐 8대조부터 김해에 정착했고, 그의 부인(전주 최씨)은 어사 박문수가 임금에게 추천해 지금도 마을에 열녀비가 서 있다.
부친 판석씨는 같은 본산리 출신인 어머니 이씨 부친에게 한학을 배우다 눈에 들어 사위가 됐다. 판석씨는 일제말기 3년 간 일본(타이어 재생공장)과 중국 상하이에서 돈을 벌어왔으나 사기를 당해 다 날렸다고 한다. 그는 까막눈들의 편지를 대신 써주고 읽어준 자상한 성격이었지만 배고파 죽어도 아쉬운 소리를 못하는 사람이었다. 경제적인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식구들을 고생시켰고 이 때문에 어머니의 구박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75년 3월 노 후보가 사시에 합격하자 "이제 고생 끝났다"며 기뻐하다 10달만에 눈을 감았다. 어머니 이씨는 강단있고 생활력이 강했다. 환갑이 넘도록 가난과 싸우며 고구마 순과 딸기를 이고 30-40리 길 마산까지 내다 파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녀는 입담이 좋아 흉년 때 방송국에서 취재 오면 항상 동네 대표로 마이크 앞에 섰다고 한다. 당시“까마귀가 와도 먹을 게 없어 그냥 간다"는 유행어도 어머니 이씨가 한 말이라고 한다. 6.25때 마을에서는 좌익 계열의 사람들이 죽창을 들고 다니면서 아버지도 함께 동참하라고 다그쳤다. 이때 어머니는 그들에게 잡혀가면 죽는다며 아버지를 산으로 피신시켰다. 뒤에 좌익들은 모두 총살당했으니 어머니의 지혜가 아버지를 살렸다는 것이다.
노무현은 고시 공부중인 1973년 아무런 장래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같은 마을 2년 후배 권양숙씨와 결혼을 했다. 노무현의 집에서는 처녀의 아버지가 6.25 때 부역혐의로 복역도중 71년 옥사했기 때문에 장래의 출세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며 반대를 하였다. 반면에 그녀의 집에서는 아무런 장래의 보장도 없는 청년에게 딸을 보낼 수 없다고 반대를 하였다. 그러나 노무현은 "만약 상대방 집안의 내력이 자신의 고시합격 후에 문제가 된다면 그것 때문에 포기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더욱 더 그녀를 포기할 수 없다"는 오기를 가지게 되었다. 이미 혼기에 도달한 그녀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사랑하는 그녀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혼인신고를 하고 식을 올렸다.
노무현은 슬하에 남매를 뒀다. 아들 건호씨(29)는 올 8월 연세대 법대 졸업반으로 LG전자에 입사할 예정이다. 홍익대 역사교육학과를 나온 딸 정연씨(27)는 영국대사관에 근무한다. 누나 명자씨(74)·영옥씨(64)는 일제 때 소학교만 나와 농사, 양복점을 하던 집에 시집갔다. 노무현의 조카 11명은 교사, 목욕탕주인, 농부, 웹에이전시, 학생 등 평범한 생활인들이다. 둘째 누이 영옥씨의 사위 정재성씨가 서울대 법대를 나와 부산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다. 처조카 7명도 교사와 회사원, 나머지는 학생이다.
6. 조부모 묘
봉하 마을을 출발하기 전에 만나는 마을 사람들마다 할아버지 할머니 묘의 위치를 물었지만 공동묘지에 있다고 할 뿐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노씨 집안 사람이나 알지 누가 남의 조상 묘를 알게냐는 대답만 들었다. 그러면서 옛날 마을에 초상이 나면 모두 그 공동 묘지로 갔는데 지금은 공단이 조성되면서 다 다른 곳으로 이장했거나 화장을 해서 묘들이 없다고 했다. 나는 경산대학교 대학원 풍수지리학과에 재학중인 동료 중에 이곳을 다녀왔다는 울산의 기태우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로 그 분이 안내하는 대로 조성중인 공단으로 똑바로 나와 지금 공사 중인 용화사라는 절로 갔다. 절 맞은편 이동통신 탑이 있는 산아래 두 그루의 소나무가 서 있는 곳을 찾았다. 그 소나무 아래 묘가 있다고 하였다. 누군가 표시를 위해 묘 뒤 감나무에다 끈을 메달아 놓았으니 그것을 찾아보라고 하였다. 그곳을 찾는 것은 쉬웠다. 단감나무 과수원인 그곳으로 가면서 마침 밭에서 일하고 있는 할머니에게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그러자 할머니는 "왜들 뫼동만 찾는지 모르겠다"며 저 소나무 아래쪽으로 가면 있다고 말해주었다. 진영은 어디를 가든 단감나무 과수원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서야 "아하! 진영단감!"하면서 서울에서도 진영단감이 유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가 뉘엿뉘엿 산 너머로 넘어가려는 무렵이었고 울창한 감나무 숲 가운데 있어서인지 수풀에 싸여 있는 한 기의 묘는 초라해 보였다. 그런데 발을 그곳에 들이는 순간 임 사장님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혈(穴)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먼저 앞을 보니 안산이 반절은 도로 공사로 깎이기는 했지만 마치 해가 동해에서 반쯤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이를 일월(日月)안산이라고 하고 임금을 상징하는 산이다. 그리고 그 뒤로 기치있게 서있는 산들이 모두 이곳을 향해 읍 조리고 있는 모습은 만조백관이 서있는 거와 같았다. 어느 것 하나 배신한 것 없이 모두 이곳을 감싸주고 있다. 그 모양들도 제각각이어서 귀인봉(貴人峰)이 있는가하면 일자문성(一字文星)이 있고, 천마사(天馬砂)가 있으며, 관모사(官帽砂)가 있고, 무곡성(武曲星)이 있다. 참으로 장엄한 산세가 아닐 수 없다.
집안, 학력, 경제적 능력 등 아무런 배경이 없는 노무현씨가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던 것이 우연이 아님을 이곳에서 알 수 있었다. 묘지와 안산과의 사이는 평탄한 명당이었을 텐데 지금 `일진`이라는 공장을 짓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장 진입 도로가 묘지로 똑바로 나있고 그 왼쪽은 빈터인데 흙에 물기가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는 습지가 아니었나 추정을 해보았다. 좌측으로 보이는 진영읍내와 비교해서 높은 지대가 분명한데 이와 같은 보국(保局)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왼쪽이 약간 허전하다는 것을 빼놓고는 전후좌우에 즐비한 귀한 사격(砂格)들만 본다면 틀림없는 제왕지지다. 그러나 풍수지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용과 혈이다. 용을 확인하기 위해서 묘 뒤로 가보았다. 뒤쪽은 감나무 가지로 울타리를 만들어 놓았고 풀이 무성하게 자라 정확히 확인 할 수 없었다. 또 감나무 과수원을 조성하면서 나무 주변에 흙을 다져 놓아 용이 어떻게 변화하면서 내려왔는지는 확인 할 수 없었다. 능선이 이곳으로 내려온 것은 확실한데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으니 아쉽다. 해질 무렵이고 무성한 감나무 숲이라 어둑어둑해진 것도 용맥을 파악할 수 없는 이유라면 이유다. 그래서 흙을 밟아보았다. 그 단단함이 기가 강하게 뭉쳐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묘는 두 그루의 소나무 바로 아래가 아니고 그곳을 가기 전 약 3m 전이다. 소나무 아래에는 이제 흔적만 남아있는 두 개의 묘가 나란히 있는데 그 사이 비어 있는 땅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곳은 옛날 공동묘지였다. 이 근처 마을에 초상이 나면 모두 이곳으로 왔는데 당시 노무현 집안 형편으로 보아 지관을 사서 땅을 살피고 묘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쓰다보니 이곳에 묻히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인지 묘지 관리가 엉망이고 누구 묘지라는 표석 하나 없다. 이곳이 공단으로 조성되면서 몇 해전 모두 파가고 남은 몇 기의 묘가 과수원 속에 있었는데 수기가 가득 고여 있었다. 아마도 자손이 없어 그대로 방치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노무현씨 조부모 묘는 왜 그대로 남아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명당은 주인을 만나기도 힘들지만 쉽게 파여지지도 않는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이곳이 명당이기 때문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어떤 후손이든 제대로 발복할 때까지 기다려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노무현은 정말로 하늘과 땅이 점지하고 있는 인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주변이 공단조성으로 파헤치고 있지만 그래도 제일 중요한 이 묘의 주산과 주룡은 과수원으로 남아 그대로 보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을 상제봉조형(上帝奉朝形, 신하들이 임금을 받드는 형국)이라고 혈명(穴名)을 붙이고 싶다. 노무현이라는 인물이 나니까 묘를 명당으로 만든다고 반박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런 사람에게 산은 있는 그대로 보아야지 묘지의 상태로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 혈판을 감싸고 있는 청룡 백호는 감나무가 심어져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주변을 몇 번만 다니면서 능선을 확인하면 겹겹으로 이곳을 감싸고 있다. 모두 현무봉에서 개장한 능선들이다. 그래도 믿기 지 않는다면 맞은편 태양이 반쯤 떠오르는 듯한 안산 위에 올라서 이곳을 한번 살펴보기를 권한다. 아마도 입이 딱 벌어질 것이다. 이동통신 탑이 있는 주산 뒤로 있는 산들은 천마사와 일자문성으로 이어져있고 마치 병풍을 친 것처럼 뒤를 받쳐주고 있다. 이를 어병사(御屛砂)라고 한다. 통신 탑이 있는 봉우리에서 개장한 능선은 외청룡 외백호가 되는데 백호는 잘생긴 천마사다. 그런데 지금 공사로 산이 반절은 깎여져있어 보기 흉하다. 청룡 역시 잘 생긴 산이나 도로를 내면서 잘렸고 산 또한 깎여져 있다. 주산에서 개장을 하고 중심으로 출맥한 용이 다시 작은 봉우리를 만든다. 그리고 또 개장(開帳)을 한 다음 중출맥으로 나와 둥근 혈장을 만들었고 그 중심맥이 노무현 조부모 묘로 연결되어 있다. 봉우리마다 좌우로 개장한 능선들은 모두 묘를 감싸주고 있다. 묘지에서 확인 안되었던 용맥을 이곳에서는 확인 할 수 있었다.
노무현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인터넷을 다 뒤져도 없었다. 이름조차도 모르지만 분명 생전에 적덕(積德)과 적선(積善)을 많이 한 분이 아니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이와 같이 숨겨진 대혈(大穴)에 들어갔을 것이다. 묘는 오좌자향(午坐子向)으로 정북향을 하고 있다. 물은 좌측에서 우측으로 흐르는지 좌측에서 우측으로 흐르는지 명당이 공사로 파헤쳐져서 정확한 수구처를 찾을 수가 없었다. 북향에는 혈이 없을 것 같아도 북향대지(北向大地)라는 말이 있듯이 맺으면 큰 혈이 대부분이다. 이곳이 그런 곳이다.
노무현(盧武鉉)은 의회에 진출하자마자 청문회스타로 부상하면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돌다리도 두들겨보는 지략가 보다는 방향이 정해지면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정치가다. 무모하다 할 정도의 행동은 그의 성장과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소외 받고, 없는 사람들의 사정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그이기 때문에 촌놈 같은 행동은 촌놈 출신인 나에게 친근감을 준다. 그런데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그의 기질을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를 불안하게 보고 있는 계층이 많은 것 같다. 풍수지리에서 용이 혈을 맺으려면 험하고 거친 기운을 모두 박환(剝換)하여 순하고 부드러운 생기(生氣)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 것처럼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되려면 이제 촌놈의 거칠음을 털어 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촌놈의 기질이 가장 노무현 같은 매력이지만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걱정이 앞선다.
윤씨가 되었다."
"윤관이 함흥 선덕진 광포(廣浦)에서 전쟁 중에 거란군에게 포위되었다.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강가에 이르렀지만 건널 배가 없었다. 이때 잉어 떼가 나타나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윤관은 무사히 강을 건너 탈출하였다. 적군이 장군의 뒤를 쫓아와 강가에 이르자 잉어 떼는 어느 틈에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파평 윤씨는 잉어의 자손이며 또한 선조에게 도움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파평 윤씨들은 파주(坡州)와 장단(長湍) 일대에 터를 잡고 살아온 토착 호족(豪族)세력이었다. 윤신달(尹莘達, 1세) 이후 아들 윤선지(尹先之, 2세)와 손자 윤금강(尹金剛, 3세), 중손 윤집형(尹執衡, 4세)은 계속 고려 중앙정부의 관직에 나가 고관에 이르렀다. 그러나 가문이 더욱 크게 번창한 것은 5세조인 윤관(尹瓘)이후부터다. 파평윤씨 세계(世系)는 시조이래 5세 윤관 장군까지는 단계(單系)로 이어지다가 윤관이 여섯 아들을 두어 그 아랫대로 내려가면서 수십 파(派)로 갈라진다. 따라서 파평윤씨들은 모두 윤관 장군의 후손들이다. 윤관의 여섯 아들은 윤언인(尹彦仁), 윤언순(尹彦純), 윤언암(尹彦巖), 윤언식(尹彦植), 윤언신(尹彦 ), 윤언민(尹彦旼)이다. 이중 윤언민만 아들 대 이후 자손이 끊겼을 뿐, 후손들이 모두 번창하여 현달(顯達)했는데 특히 다섯째 아들인 윤언신(尹彦 )의 후손이 대대로 고관 및 학자들을 가장 많이 배출했다.
문강공(文康公) 윤언신(尹彦 )은 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송나라에 다녀왔으며, 1135년 묘청(妙淸)의 난 때는 원사(元師) 김부식(金富軾)의 막료로 출전하여 서경(西京)함락 때 큰공을 세워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그의 아들 삼 형제 윤인첨(尹鱗瞻), 윤자고(尹子固), 윤돈신(尹惇信)은 모두 대과에 급제하였다. 윤인첨(尹鱗瞻)은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금나라에 다녀왔고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원사(元師)가 되어 이를 정벌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된 인물이다. 윤인첨의 아들 3형제 윤종악(尹宗 ), 윤종성(尹宗誠), 윤종양(尹宗양)도 대과에 급제하여 양대(兩代)에 걸쳐 3형제씩 대과급제함으로써 이들 집안을 `삼제택양사택(三第宅兩師宅)`이라 불렀다. 또 이들 후손 중에 참판공(參判公) 윤민신(尹民新)이 있었는데 그의 다섯 아들이 모두 대과급제하였고 이중 한 사람이 장원급제하였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참판공이 사는 마을을 `오자등과(五子登科) 터`라 불렀다고 한다. 이밖에도 파평윤씨 가문에는 급제자가 많은 만큼 과거(科擧)에 얽힌 수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파평윤씨 가문은 크게 번성했다. 이 태조를 도와 조선 개국공신이 된 윤호(尹虎),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협조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어 이조판서에 오른 윤곤(尹坤), 태종 때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지낸 윤향(尹向), 수양대군의 장인이며 대사헌, 우참찬을 지낸 윤번(尹 ), 윤번의 아들 3형제인 윤사분(尹士昐), 윤사윤(尹士 ), 윤사흔(尹士昕)은 각각 우의정, 예조판서, 우의정에 올랐다. 윤번의 딸은 제7대왕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다. 또 윤사분과 윤사흔 집안에서는 같은 시기에 왕비가 2명이 나왔다. 제11대 중종의 제1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로 장경왕후(章敬王后)다. 그녀는 제12대 왕인 인종(仁宗)을 낳았다. 제2계비(繼妃)는 윤지음의 딸로 제13대 명종(明宗)의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다. 그런데 장경왕후의 동생 윤임(尹任)과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은 같은 종씨이면서도 서로 세력을 잡으려고 반목하여 세간으로부터 대윤(大尹, 윤임), 소윤(小尹, 윤원형)의 지목을 받았다. 이들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비롯하여 20년 간 서로 죽고 죽이는 일가상잔의 비극을 초래하였다. 제9대 성종(成宗)의 왕비 정현왕후(貞顯王后)도 파평윤씨(坡平尹氏) 영원부원군 윤호(尹濠)의 딸이다.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윤필상(尹弼商), 이시애 난 때 공을 세워 우의정에 오른 윤희재(尹希齋), 청백리로 녹선되고 시문에 능해 호당(湖堂)에 뽑힌 윤현(尹鉉), 중종 때 우의정인 윤인경(尹仁鏡), 송시열의 문하에서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난 윤증(尹拯), 현종 때 좌의정을 지낸 윤지선(尹趾善), 영조 때 영의정인 윤동도(尹東度), 일제치하 중국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을 죽이고 한국 독립의지를 만방에 과시한 윤봉길 의사도 파평윤씨다. 이처럼 파평윤씨가 명문대가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윤관 장군 묘의 음덕(蔭德)이라고 후손들은 믿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유명한 묘도 시련이 있었다.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 ?-1565년)이 문정왕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 때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그도 문정왕후가 죽자 삭직 당하고 귀양가서 죽음을 당했다. 그때 윤원형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그의 선조인 윤관장군 묘를 파헤치려 하자 이 사실을 안 후손들이 유골이나마 온전히 보호하기 위해서 봉분을 헐어 평장(平葬)을 하였다. 장군의 묘를 파헤치려고 왔던 사람들은 묘를 찾지 못해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약100년이 흘렀다. 조선 인조와 효종 때 세도가이며 영의정을 역임한 청송심씨(靑松沈氏) 심지원(沈之源, 1593-1662년)이 죽자 그 후손들은 명당으로 소문난 이곳에 묘지를 섰다. 그런데 윤관 장군 묘보다는 약간 위에 쓰게 되었다. 명당을 골라 쓴다고 했지만 결인속기처(結咽束氣處) 위에 씀으로서 결과적으로 과룡지장(過龍之葬)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또 약100년이 지난 후인 영조(제21대 왕 재위기간 1724-1776) 때 파평 윤씨 후손들은 선조인 윤관 장군 묘를 되찾았다. 그런데 묘 바로 뒤에 심지원 묘가 있어 용맥을 차단한다며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가문의 위세로 따지면 파평 윤씨 못지 않은 청송 심씨 후손들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 때문에 두 가문은 다투게 되었다. 윤씨들은 윤관 장군 묘 뒤에다 담을 높이 쌓아 심지원 묘 앞을 답답하게 가려 버렸다. 청송 심씨들은 담의 철거를 요구했으나 듣지 않았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들은 오늘날까지도 이에 대한 산송(山訟)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윤관 장군 묘는 36대(代)까지는 발복(發福)이 지속된다고 하는 자리다. 1대(代)를 30년으로 잡는다면 약1,080년 동안 발복하므로 계산대로라면 지금도 발복이 남아 있다고 하겠다. 용미리에서 광탄리로 가면서 윤관 장군 묘로 뻗어 내려가는 산줄기를 보면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도 대단한 기세를 느낄 수가 있다. 주산인 박달산(369m)에서부터 잘생긴 봉우리가 연속적으로 이어져 내려가는 모습은 마치 기치창검을 높이든 백만 대군이 행진하는 모습과도 흡사하다. 산봉우리마다 이름이 있을 테지만 지도상에는 무명고지로 표시되어 있다. 홍살문에서 묘지뒤쪽을 바라보면 단아한 탐랑체인 현무봉이 있고 그 뒤 좌우에는 균형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좌천을(左天乙) 우태을(右太乙)이 버티고 있다. 좌천을 우태을이란 귀인이나 장군이 앉아 있으면 그 뒤 양쪽에서 호위하고 서있는 장수를 말한다. 사람도 경호원이나 수행원을 거느릴 정도면 귀한 사람이지만 산도 귀하게 본다. 때문에 좌천을 우태을의 보호를 받는 봉우리에서 중심 맥으로 이어진 용맥(龍脈)에 혈을 맺으면 대개 대혈(大穴)에 속한다.
현무봉에서 혈까지 내려오는 용맥을 살피기 위해서 묘지 뒷산을 오르면 매우 급하게 내려오는 능선을 발견할 수 있다. 일직선으로 곧장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현자(之玄字)로 계속 굴곡(屈曲)하면서 마디인 절(節)을 형성하고 있다. 현무봉 정상까지 기세 있게 변하는 절수(節數)를 제대로 셀 수 없을 정도니 36절룡(節龍)이라는 것이 과장이 아니다. 급하게 내려간 용이 마지막에 결인속기(結咽束氣)하여 기를 묶어주고 혈을 맺었다. 결인속기처는 담장 바로 뒤 약간 잘록한 부분이다. 여기서 기를 묶어주었기 때문에 보이는 대로라면 혈의 결지 방법은 결인속기법(結咽束氣法)에 해당된다. 그러나 묘역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하수사 등이 잘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좌우선룡법(左右旋龍法)과 태식잉육법(胎息孕育法)에도 해당될 것 같다. 태조산을 출발한 주룡이 수많은 변화 과정을 거치면서 강하고 험한 기운을 모두 털어 버리고 순수한 생기(生氣)만 모아 혈을 맺는다. 이때 생기가 흩어지지 않고 뭉치도록 하여 혈을 결지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결인속기법으로 최종적으로 용맥의 목을 잘록하게 묶어 기를 모으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좌우선룡법으로 내룡(來龍)의 생기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도록 용맥의 끝이 좌측이나 우측으로 돌아 마무리하는 방법이다. 이때 물이 우측에서 흘러나오면 용맥은 좌측으로 돌아야 하고, 물이 좌측에서 나오면 용맥은 우측으로 돌아야 음인 용과 양인 물이 서로 음양교합을 할 수 있다. 이를 좌선수(左旋水)에 우선룡(右旋龍), 우선수(右旋水)에 좌선룡(左旋龍)이라는 표현을 쓴다. 세 번째는 태식잉육법으로 현무봉 중출로 처음 나오는 용을 태(胎), 과협이나 결인속기처럼 잘록하게 변화하는 것을 식(息), 혈장의 입수도두(入首倒頭)에 기를 모아 마치 아이밴 모습과 같은 잉(孕), 아이를 출산하여 기른다는 뜻으로 혈을 육(育)이라 부른다. 용맥이 혈을 결지(結地)하였는지 여부를 살필 때는 이 세 가지 방법 중에서 한 가지 이상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때로는 세 가지 현상 모두가 있을 때도 있는데 윤관 장군 묘가 이에 해당되는 것 같다. 그렇지만 묘역을 성역화하면서 너무 많은 정비를 하여 이를 자세히 살필 수가 없어 아쉬웠다.
답사를 다닐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문화재 관리에 문제점이 있는 것 같다. 많은 예산을 들여 성역화(聖域化)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화재는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꼭 대대적인 사업을 해서 원형을 훼손한다면 그것은 보존이 아니라 파괴다. 또 문화재는 조형물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그 자리에 있도록 한 지형도 중요하다. 주변 땅을 파헤치고 석축(石築)을 쌓으면 물길과 지기(地氣)가 변해 문화재에 나쁜 영향을 준다. 이러함에도 대대적인 정비만이 최선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 앞으로 문화재 범위에는 지형까지 포함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이곳까지 이어진 산맥은 백두산을 출발한 백두대간이 철령 위 추가령에서 한북정맥을 분맥하여 백암산, 적근산, 대성산, 백운산, 운악산(현등산), 수원산, 죽엽산, 광릉 용암산을 거쳐 축석령을 지난 다음 양주군 주내면 불국산(470m)을 만든다. 여기서 다시 한북정맥은 산성, 호명산을 이루고 의정부 뒤 산맥을 따라 남진하여 서울의 태조산인 도봉산(716.7m)으로 이어진다. 파주 일대로 오는 산맥은 의정부 뒷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칠봉을 만들고 장흥유원지를 이루는 꾀꼬리봉과 앵직봉(621.8m), 계명산(621.3m)을 지나 뒷박고개를 넘은 다음 박달산을 만드니 이곳의 소조산(小祖山)이다. 박달산에서 기세 장엄하게 광탄 쪽을 향하던 산맥은 분수리에서 방향을 우측으로 틀어 넓은 국세(局勢)를 만들고 행룡을 멈추었다.
주산과 현무봉이 탐랑(貪狼) 목성(木星)체이므로 혈은 유두혈(乳頭穴)이 진혈이다. 유두혈이란 혈판이 마치 풍만한 여자의 젖가슴처럼 생겼고 혈심은 젖꼭지부분에 해당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용맥은 잘록하게 결인속기 한 후 수평으로 길게 늘어져 가는데 위는 가늘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차 넓어지다 다시 좁아져 끝을 맺는다. 이를 상세하거(上細下巨) 형태라 하는데 혈은 가장 넓은 부분에 자리한다. 윤관 장군 묘는 혈심(穴心) 보다 약간 위에 자리잡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장 넓은 양 선익(蟬翼) 끝이 아니라 그 보다 위에 있기 때문이다. 혈 앞 순전(脣氈)이나 하수사(下水砂) 등은 너무 많은 인공적인 조장을 했기 때문에 확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묘 아래로 길게 뻗은 능선 또한 자연 상태를 알 수 없어 설명하기 곤란하다.
청룡 백호는 여러 겹으로 감싸주면서 혈장을 보호하고 있다. 안산은 작고 귀하게 생긴 반월형(半月形)이다. 주변 사격은 사방(巳方)에 문필봉(文筆峰), 오방(午方)에 옥녀봉(玉女峰), 정방(丁方)에 거문성(巨門星), 유방(酉方)에 천마사(天馬砂), 신방(辛方)에 문필봉(文筆峰)등이 수려하게 있어 보국(保局) 안에 장엄한 기운이 감돌게 한다. 그러나 이곳도 흠은 있다. 명당은 평탄하나 원만하지 않고, 명당 가운데로 흐르는 물길은 혈을 감싸주지 못하고 반배(反背)하였다. 안산은 똑바로 혈과 조응하지 못하고 약간 비껴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용과 혈은 좋으나 주변 산이나 물이 완벽하게 보호를 못해준다. 이러한 곳은 똑똑한 인물은 나오나 그를 도와주는 사람보다는 시기하고 모함하는 자가 있어 이로 인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곳이다. 돌이켜보면 윤관 장군 생애와 비슷한 자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답사를 하면 할수록 느끼는 거지만 묘 자리도 살아 생전 그 주인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공덕을 쌓지 않으면 절대로 명당에 못 들어간다고 강조한 것 같다.
들판의 물을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꼭 우측에서 좌측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물 나가는 파구를 정미(丁未) 방향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데, 물은 좌측 용미리 쪽에서 나와 우측 광탄 쪽으로 흐른다. 물은 반드시 산 따라 흐르기 때문이다. 파구는 경유(庚酉) 방향이며 좌는 간좌곤향(艮坐坤向)을 하여 문고소수(文庫消水)에 해당된다. 문고소수 향은 이른바 녹존유진(祿存流盡)이면 패금어(佩金魚)라 하여 총명수재하고 문장이 특출하여 부귀상전(富貴雙全)하는 길향(吉向)이다. 그러나 혈이 아닌 곳에서는 이 향을 놓으면 음탕하지 않으면 바로 패절(敗絶)한다 했으니 함부로 쓰면 안 되는 향이기도 하다.
윤관 장군의 생애
윤관 장군은 태어날 때 아버지가 용마를 타고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일찍이 학문에 눈이 트여 잠시도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특히 오경을 즐겨 봤다. 일곱 살 되던 해는 뽕나무를 소재로 하여 칠언절구의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술에도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073년(문종 27)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요직을 거친 다음 1104년 2월 동북면 행영도통으로 임명되어 여진 정벌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북쪽 국경인 압록강에서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경계로 그 위쪽 지역에 살고 있던 여진족은 고려를 상국 혹은 모국이라 하여 조공도 바치고 더러는 귀화도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점차 국경 일대에 새롭게 일어난 동여진이 그 세력을 확대하고 고려의 국경 요새 등을 잠식하기 시작하였다. 1103년 부족장에 우야소가 그 자리에 올랐을 때에는 그 세력이 함흥 부근까지 들어와 주둔할 정도였다. 이리하여 고려군과 우야소의 여진군은 일촉즉발의 충돌 상태에 놓였으며, 1104년 초 완안부의 기병이 먼저 정주관 밖에 쳐들어왔다. 이에 숙종은 무력으로 여진 정벌을 결심하고 문하 시랑평장사 임간을 시켜 이를 평정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여진군에게 패퇴하고 말았다.
윤관은 이때부터 왕명을 받고 여진 정벌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추밀원사로 있던 2월 21일 정벌의 책임자로 임명받고 전장에 나가 3월에 여진과 싸웠으나, 이번에도 여진의 강한 기병부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아군의 태반이 죽고 적진에 함몰되는 패전의 장수가 되었다. 결국 임기응변으로 화약을 맺고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패전 뒤 왕에게 전투력의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진언하여 같은 해 12월부터 여진 토벌을 위한 준비 확장에 전력을 기울여 나갔다.
그 결과 신기군, 신보군, 강마군으로 구성된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창설하였다. 이와 같이 군제를 개편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킴과 동시에 양곡을 비축하여 여진 정벌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1107년(예종 2)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변방의 긴급보고를 접하게 되었다. 이때 원수가 되어 왕으로부터 지휘관을 상징하는 부월을 하사 받고 17만 대군을 이끌고 정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휘하에 5만 3,000명을 거느리고 정주에 도착한 뒤 육지와 바다로부터 공격하였다.
이같이 기세 등등한 고려군의 위세에 눌린 여진군이 동음성으로 숨자 정예부대를 동원해서 이를 격파하였으며, 여진군이 숨은 석성을 공격하여 적의 태반을 섬멸시켰다. 이 전투에 135개 처에 달하는 적의 전략적인 거점을 점령하였고, 적의 전사자 4,940명, 그리고 생포 130명이라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즉시 조정에 승전보를 올리고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확정하고 그 주변에 9성을 축조하였다. 이어 남쪽에 사는 백성들을 이곳으로 이주 시켜 남도 지방민들이 국경지방 일대에 개척하며 살게 하였다. 오랑캐 땅을 개척한 것이 사방 700여 리에 달했고, 선춘령에 경계비를 세워 고려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이렇게 고려군이 함경도 일대를 석권하게 되자, 그곳을 근거지로 웅거하던 완안부의 우야소는 1108년 다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윤관의 일사분란한 지휘와 부하인 척준경의 용맹과 지략으로 이를 완전히 패주(敗走)시켰다. 그는 개선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한편 전투에 패한 여진은 서쪽으로 강력한 요나라와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와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여진족은 조공을 바치고 끝까지 배반하지 않는 조건 아래 평화적으로 성을 돌려주기를 애원하였다. 여진이 적극적으로 강화교섭에 나오자 당시 고려왕인 예종은 육부를 소집하고 9성 환부를 논의하였다.
예부낭중 한상이 반대하였으나 나머지 28명이 환부에 찬성하는 등 육부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대신들은 화평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여진을 공략할 때 당초에 한 통로만 막으면 여진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고려의 예측이 맞지 않았다는 점, 둘째 개척한 땅이 수도에서 너무 멀어 안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점, 셋째 근거지를 잃은 여진족의 보복이 두려웠다는 점, 마지막으로는 무리한 군사 동원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나리라는 점등이었다.
그리하여 다음해 7월 3일 회의를 열고 9성 환부를 결의하여 7월 18일부터 9성 철수가 시작되었다. 결국 자신이 장병들과 더불어 목숨을 걸고 회복하였던 9성 일대의 땅이 아무 의미 없이 다시 여진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더욱이 여진정벌에 대한 패장의 모함을 받고 문신들의 시기 속에 관직과 공신호조차 삭탈 당하였다. 아무 명분 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하였다 하여 처벌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되었고, 회군해서는 왕에게 복명도 하지 못한 채 사저로 돌아갔다.
반대파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계속 상소를 올려 그의 사형을 주장하였다. 임금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달래기 위하여 윤관의 관직과 공신의 호를 빼앗기에 이르렀다. 이후 예종이 재상이나 대간들의 주장을 물리치며 비호해 준 덕으로, 1110년 다시 시호가 내려졌으나 사의를 표하였다. 말년을 우울한 심정으로 서재에 파묻혀 평소 좋아하던 경서를 읽으며 지냈다. 그러다 1111년 5월 "호국일념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위해 끝까지 분투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쓸슬히 눈을 감았다.
윤관은 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어진 성품과 학식을 겸비했다고 전한다. 1130년 예종의 묘정과 조선 문종대에 이르러 왕의 명으로 숭의전에 배향되었다. 파주 여충사에 봉사하고 청원의 호남사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처음에 문경이었으나 후에 문숙으로 고쳐졌다. 척지대업을 이룩한 해동명장이라는 명성으로 지금까지 후대에 널리 추앙 받고 있다.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에는 장군대좌형(將軍臺座形)이라 불리는 우암 송시열(1607-1689년) 선생 묘가 있다. 원래 묘소는 숙종(肅宗) 15년(1689) 왕세자 책봉 문제로 정읍에서 사사된 후 수원 무봉산에 있었으나 8년이 지난 후 숙종 23년(1697)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청천은 송시열이 벼슬을 물러난 후 은거했던 화양동계곡과 노론사림(老論士林)의 중심인 화양서원(華陽書院)이 있는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자리는 장군대좌형인데 주변 산세에 졸병에 해당되는 산들이 없으므로 발복(發福)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후손들은 시설자금 300냥을 기부하고 청천시장을 개설하여 사람들이 몰려들게 하였다. 그러자 마을도 번창하고 송씨 가문 후손들도 번창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2002년 1월 20일. 새해 들어 팔도풍수지리사랑회 첫 답산을 우암 송시열 선생 묘로 정했다. 한달 전 2001년 12월 마지막 답사 때 근처에 왔음에도 시간이 없어 그냥 지나쳤기 때문이다. 아침 일기예보에 큰비나 눈이 온다고 하였는데 날씨는 잔뜩 찌푸려 있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1년 중 가장 춥다는 대한(大寒)임에도 포근한 겨울 날씨여서 답사하기에 좋았다. 약2년여 동안 우리가 답사를 다니는 동안 비가 온 적이 없었다. 출발 때는 비가와도 답사지에 도착하면 신기하게도 그쳐주었다. 전국 팔도에서 기 센 사람들만 모였기 때문에 비가 놀라 멈춘다고 누군가 우시게 소리를 했다.
우암 송시열의 생애는 교과서나 사극을 통해서 잘 알려져 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매우 극단적이다.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에 빗대어 송자(宋子)라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오직 당리당략(黨利黨略)에만 치우친 당쟁(黨爭)의 원흉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팔풍사 회원들 간에도 그를 좋게 평가하는 사람과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사람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생전에 못할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절대 명당에 들어갈 수 없을 거라고 단언한다. 오늘의 답사주제는 그 말을 확인해보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오전8시40분 서울을 출발하여 10시 정각에 진천에 도착하였다. 안내를 맡아줄 진천군청에 근무하는 서상석 회원을 비롯하여 10여명의 지방 회원들이 합세하였다. 진천을 출발한 버스는 34번 도로를 따라 초평저수지를 지나 두타산 고개를 넘고 증평 읍내로 들어섰다. 반탄교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하여 올라가더니 증평읍사무소에서 우회전하여 읍내를 빠져나온다. 증평리 삼거리에서 청안, 화양구곡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592번 도로로 들어선다. 그리고 청안에서 다시 화양구곡, 청천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달린다. 괴산군(傀山郡)은 신라가 삼국통일 무렵 가잠성을 지키다 순사한 찬덕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김춘추가 괴주(傀州)라는 명칭을 하사하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산 모양들이 정말 괴(傀)하게 생겼다해서 글자그대로 괴산(傀山)이라 한 것 같다.
청안면(淸安面)을 지날 때는 칠보산(540m)자락이 청안천과 어울려 만든 산수(山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그때 음성에 사시는 최대규 선생께서 이곳이 전국에서 진사(進士)가 가장 많이 나온 고장이라고 알려준다. 나중에 안 내용이지만 조선 숙종이 청안현 출신 생원과 진사 50여명이 사마방(司馬榜)에 급제하자 이것을 기념하고자 청안사마소(淸安司馬所)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현감 23명, 생원과 진사 91명을 배향(配享)하였다. 이 경치를 보고 가만있을 수 없었던지 문학박사인 유영봉 교수가 차안의 마이크를 잡더니 특유의 입담으로 이곳 지형을 설명해준다. 속리산 연맥들이 일구어낸 산들 즉 두타산, 보광산, 백미산, 칠보산, 좌구산, 설운산 등은 경치가 아름답고 신비로워 모두 불가나 도가를 연상시키는 산 이름이다. 그리고 이곳 산 속에는 지금도 도를 닦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다고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버스가 좌구산(657.4m)자락 질마재를 힘겹게 넘더니 19번(청주-충주)도로와 교차하는 백봉 사거리를 직진한다. 여기서부터는 37번 도로가 된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삼거리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회전하면 화양구곡 가는 592번 길이고, 우회전하면 37번 청천 가는 길이다. 청천 길로 들어서 조금만 오면 아주 작은 분지가 나오는데 바로 청천면소재지다. 청천 사거리에서 청천초등학교 쪽으로 우회전하여 약200m정도 올라가면 송시열 선생 신도비가 보인다. 여기다 차를 주차하고 주변 산세를 살피면 청천(靑川)이라는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산과 물들이 사방으로 둘러 쌓여 있다. 먼저 묘지 전설에 나오는 청천 시장이 있는가하여 살펴보았는데 깊은 산골임에도 쾌 큰 시장이 있었다. 묘지 입구에서 보이는 우암 산소의 주산은 탐랑(貪狼) 귀인봉(貴人峰)으로 아주 잘 생겼다. 묘지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고 높지만 계단이 잘 정비되어 있어 그렇게 힘이 들지는 않았다. 산등성에 다 오르면 커다란 봉분 하나가 나타나는데 바로 우암 송시열 선생 묘다. 묘에는 문인석과 정조임금의 어필인 "유명조선좌의정문정공우암선생묘(有明朝鮮左議政文正公尤菴宋先生墓) 정경부인이씨부좌(貞敬夫人李氏부左)"라고 적혀있는 묘비가 있다.
간단한 묵념으로 참배를 한 후 주변을 둘러보니 경치는 정말로 아름답다. 묘 뒤 주산 현무봉은 탐랑 목성으로 기세 있어 보이고, 앞쪽에는 10여 개가 넘는 귀한 봉우리들이 키 재기라도 하듯 일렬로 우뚝우뚝 솟아있다. 마치 출진(出陣)을 알리는 깃발 같기도 하고, 크고 작은 붓을 세워놓은 필진사(筆陣砂) 같기도 하다. 주변 산세로만 본다면 과연 송시열 같은 문명 높은 대학자가 묻힐만한 자리다. 그러나 풍수지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용(龍)과 혈(穴)이다.
백두대간 속리산(1057,7m)에서 분맥한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은 시루산(482,4m)과 선도산(547,2m), 상당산성, 구녀산(484m)을 거쳐 좌구산(657.4m)을 만든다. 정맥은 질마재를 지나 계속 북상하고 아래로 뻗은 산맥 하나가 청천의 주산인 설운산(588m)을 기봉(起峰)하였다. 좌구산은 이곳의 태조산(太祖山)이 되는 것이다. 청천면 가운데를 흐르는 박대천을 사이에 두고 우암 산소 쪽은 한남금북정맥이고 건너편 봉우리들은 백두대간에서 기봉한 것들이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두 산맥 사이로 화양구곡이 이루어지고 이것이 달천이 되었다가 충주호로 합수하여 남한강을 이룬다. 두 산맥이 강을 사이에 두고 만나서 작은 보국(保局)을 이룬 것이 청천이다. 이러한 곳에 대혈(大穴) 하나쯤은 있을 법한데 아쉽게도 우암 산소는 아니다.
| 재물보다 벼슬 발복 기약해 주는 명혈 |
| 양호기의 풍수여행 ■ 錦城羅氏 송제공 묘: 臥龍隱山形 명당 (하) |
| 입력시간 : 2009. 03.25.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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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나씨 9세 송제공 나세찬 묘역. | |
금성나씨(錦城羅氏)의 묘지풍수를 보자. 금성나씨의 탯자리인 문평면은 나주땅 중 유일한 산촌에 해당한다. 거평 들판을 제외하고는 넓은 들은 거의 없다. 큰 산들보다는 작은 산들이 많은 곳이다. 그 산들이 하나같이 단아하고 부드러운 봉우리들을 자랑한다. 그래서 명당길지가 많은 곳이다. 그 명당길지들은 금성나씨들이 거의 차지했다. 그 대표적인 묘는 시조 나총례의 9세손 송제공(松齊公) 나세찬(羅世纘)의 선산이다.
송제공 나세찬(1498-1551년, 연산군 4년~명종 6년)은 문평면 남산리에서 출생하였다. 별시문과와 문과중시에 모두 장원급제하고, 이퇴계ㆍ김하서 선생들과 사가독서한 당대 문명을 떨친 선비였다. 벼슬은 이조참의, 대사헌, 한성좌윤 등을 지냈다.
그의 묘는 문평면 송사리 송림 마을에 있다. 마을 앞을 조금 지나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들이 유산객들을 다정하게 반긴다. 우측을 보면 둥근 산봉우리들로 이어진 구절봉이라는 산능선이 얼른 눈에 띈다. 그 능선에서 용틀림하며 내려온 생기맥이 눈에 들어온다. 그 용맥을 향해 올라가니 짐작대로 기다랗게 뻗은 묘역이 보인다.
형국론에서 물형은 주로 주산에서 찾는다. 주산인 구절봉 능선이 변화무쌍한 용의 형상이고, 혈장으로 내려온 두툼하고 긴 용맥도 꿈틀거리는 용을 연상시킨다. 이 용이 주변의 산들로 싸여있어 밖에서 보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용이 산 속에 숨어 있는 형국이다. 이런 형국을 와룡은산형(臥龍隱山形)이라고 한다.
이 묘역은 3대가 연장됐다. 상단은 송제공의 조부모 묘, 가운데는 부모 묘, 하단은 송제공 묘이다. 조부 청백리(淸白吏) 공은 장성 등 현감을 지냈으나, 손자 송제공이 높은 벼슬을 하게 되어 묘비에 새겨진 '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의 벼슬이 추증된 것 같다.
송제공 묘는, 올라오면서 요석을 보고 예상했듯이 보기 드문 명혈이다. 주산인 구절봉에서 행룡한 주룡이 직룡입수하였다. 일반적으로 입수룡은 현무봉에서 혈까지 이어지는 용맥을 말한다. 이 혈의 입수룡은 입수1절용에서 을용(乙龍)으로 내려와 갑용(甲龍)으로 틀어 두툼한 뇌두를 만들고 간좌(艮坐)로 결혈됐다. 아무리 용맥(來龍)이 좋아도 입수1절용이 부실하면 허사가 된다. 이 입수1절용은 매우 튼튼하고 양명하다. 만약 입수룡이 손상됐거나 단절됐으면 혈을 결지할 수 없고, 그런 곳에 장사지내면 자손이 귀하고 절손될 우려가 있다고 한다.
이 혈은 유혈로 맺었다. 좌청룡 우백호가 가깝게 감싸주고, 주변의 산들도 주밀하게 혈을 감싸주고 있다. 어느 한 곳 함한 곳이 없다. 그 산들의 높이가 높지도 낮지도 안 해서 혈장은 아늑하고 편안하다. 전형적인 장풍국이다. 흠을 말한다면 명당보국이 다소 협소하다. 명당(明堂)이란 일반적으로 좋은 땅을 지칭하지만, 풍수지리에서는 혈 앞에 펼쳐진 평평한 땅, 즉 청룡과 백호, 안산이 감싸준 공간에 펼쳐진 들판을 말한다. 이 명당이 너무 넓으면 혈이 바람을 타게 되어 흉하고, 너무 좁으면 혈의 생기가 제대로 피어나지 못하여 흉하다.
이 혈의 수세를 보면 청룡 백호의 안 골짜기에서 흐른 물이 혈 앞에서 합수하여 청룡 끝자락을 역관하여 보이지 않게 거수한다. 이 지점(不見處)이 수구가 된다(庚破). 묘의 방위를 정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많이 쓰고 있는 방법은 88향법과 구성법이다. 이 방법들은 수구(水口ㆍ破口)의 방위를 기준으로 묘의 좌향을 정한다. 88향법에 의하여 간좌곤향으로 입향하면 문고소수라는 길향이 된다. 구성법(補星水法)에 의하면 경파에 곤향은 염정으로 길향길파가 된다.
안산은 적당한 높이로 혈의 정면에 금형산으로 수려하다. 그 우측으로 비슷한 크기의 둥근 봉우리 5개가 연봉으로 솟아있다. 이 봉우리들은 좋은 기운을 혈을 향해 품어주고 있다. 보기 드물게 귀한 안산이다. 그런데 이 안산이 고속도로 개설로 잘리고 말았다. 절개된 곳이 바로 혈의 앞이고 보니 이 명혈에는 치명적 파살이 된다. 그러나 이 묘들이 오래 되어 현재의 후손들에게는 흉살의 영향이 미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상단에 있는 조부모 양위 묘로 올라가 보았다. 너무 오래 됐고 묘역 작업으로 원래의 혈장을 알아볼 수 없으나, 결혈 형상이 약한 것이 흠으로 보인다. 그러나 좌우 용세, 국세, 안산, 조산 등이 빼어났다. 소제공 묘에서 보이지 않은 외명당과 조산이 매우 길하게 보인다. 소제공 묘처럼 수구, 내명당, 용호 등이 가까우니 속발지지(速發之地)가 된다.
이 묘가 속발하여 그의 손자, 당대 문명을 떨친 훌륭한 선비가 태어났을 것이라고, 또 용세, 사격ㆍ수세 등으로 미루어 재물보다 벼슬을 기약해주는 혈이라고 풍수적 해석을 해본다.
주산에서 내려온 산 능선은 힘은 있어 보이나 활발한 변화가 없다. 특히 묘 뒤 과협처(過峽處)는 약20m정도가 일자로 쭉 뻗었다. 과협이 길면서 일직선으로 곧장 나가면 마치 죽은 뱀이 일자로 뻗은 것과 같다하여 혈의 결지는 기대할 수 없다. 과협이 길더라도 중간이 학의 무릎처럼 기운이 한번 뭉치거나 벌의 허리처럼 잘록하다면 생룡(生龍)이 되는데 그렇지를 못했다. 그런데 이곳에 영송사(迎送砂)는 뚜렷하게 있어 생룡 여부를 판단하는데 다소 혼란이 된다. 그러나 혈장을 보면 혈이 아님을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다. 묘지 바로 뒤 입수도두처럼 생긴 곳을 자세히 보면 주산에서 내려온 용이 여기서 양쪽으로 갈라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룡의 행룡(行龍)이 멈춘 곳이 아니라 양분하여 나가는 곳이다. 그 사이에 묘소가 있으니 생기가 모일 수 없다. 두 산줄기가 갈라지면 그 사이로 물이 흐른다. 묘 앞을 보면 많은 흙으로 축대를 쌓았지만 본래는 계곡이었을 것이다. 계곡은 물이 곧장 앞으로 나가므로 지기가 모이지 않을 뿐 아니라 재산도 곧장 빠져나간다고 본다. 또 밤낮으로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음곡풍(陰谷風)은 계곡을 따라 불면서 묘지에 큰 피해를 준다. 이처럼 원진수(元辰水, 용맥을 따라 온 물)가 앞으로 곧장 나가는 것을 두고 고전(古典)은 `원진당심직출(元辰當心直出) 미가언흉(未可言凶)`이라 하였다. 즉 원진수가 혈 앞으로 곧장 흘러나가면 그 흉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라는 내용이다.
주변 산세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정답게 이곳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 강 건너 10여 개가 넘는 귀한 봉우리들도 똑바르게 이곳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을 향해 있다. 이곳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봉우리를 향해 안산을 삼고 장군대좌형이라 이름하였다. 누군가 그럴듯한 전설까지 만들어 우암 선생의 명성을 더욱 빛나게 하려고 하였던 것 같다. 역사적인 유명인물이라 하여 그 묘지가 명당이라는 선입감은 버려야 한다. 특히 우암은 풍수지리에는 문외한이었던 것 같다. 그가 자리를 정해 주어 이장했다는 송강 정철의 묘는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 있다. 이곳처럼 높은 산 능선에 자리했는데 용이 지나가는 과룡처(過龍處)다. `과룡지장(過龍之葬)은 삼대내절향화(三代內絶香火)`라 하여 가장 꺼리는 곳이다.
우암의 풍수지리관을 가장 잘 나타내는 역사적 기록이 있어 살펴보았다. 북벌을 준비하다 갑작스럽게 숨진 효종대왕의 장사를 지낼 때 송시열은 국상(國喪)의 자문을 맡았다. 송익필, 김장생, 김집, 송시열로 이어지는 자타가 인정하는 조선 예학의 거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금의 관이 시신보다 작아 널 판을 잇대 관을 크게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임금의 관(棺)은 관 자체가 궁(宮)이라 하여 재궁(梓宮)이라 한다. 성리학과 예학의 나라 조선에서 이 관을 너덜너덜하게 잇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후에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이는 송시열이 효종의 염을 빨리 못했기 때문이라고 공격했다. 처음 효종의 장지를 결정한 인물은 당시 풍수에 능한 예조참의(禮曹參議) 윤선도였다. 윤선도(1587-1671년)는 서인(西人)인 송시열과는 반대되는 남인(南人)의 거두였다. 그는 수원부 청사 뒷 산등성이를 명당이라고 지목했다. 청사 뒤 산이 용혈(龍穴)로서 앞산과 물이 모두 좋아 천리 이내에 보기 드문 명당이라고 주장하였다. 세종대왕의 영릉 다음가는 곳이니 주자(朱子)가 말 한대로 종묘(宗廟)의 제사를 영구히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다른 지관들도 그곳이 길지(吉地)라고 호응했다.
그러나 송시열을 비롯한 대신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수원부 청사 뒤를 장지로 정하면 수원부를 옮겨야 하므로 군사들과 백성들의 고통이 클 것이다라는 이유를 달았다. 그러면서 "장지를 결정하는데 풍수설을 쫓을 것은 없고, 그 땅이 도로가 되거나, 집터가 되거나, 수해가 있는 등 오환(五患)만 일어나지 않는 땅이면 충분하다"고 하였다. 특히 송시열은 "효종은 군사들을 특별히 사랑했는데 7천 병력이 주둔하는 고을을 철거하고 그 농토와 가산을 파괴하여 능을 조성하는 것은 대왕의 뜻이 아니라"고 반대하였다. 효종 장지 문제에 대한 송시열의 반대는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일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신과 반대 당파인 사람이 주장했다고 해서 반대를 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결국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服喪)문제를 가지고 치열한 당쟁이 시작되었으니 그 유명한 예송논쟁(禮訟論爭)이다. 윤선도가 지정했던 그 지리는 공교롭게도 약100년 후 효종의 현손인 사도세자의 능이 조성되었다. 이때 정조가 내탕금으로 이주비용을 마련해주자 군사들과 백성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특히 수원은 더욱 발전하여 행정 군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송시열이 우려했던 일들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점들을 비추어 볼 때 송시열이 천문지리(天文地理)에 능했다고 알려진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청천 분지는 평탄하고 원만한 명당이다. 이 깊은 산골에 이만한 분지가 형성된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자연이 아니면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는 절경이다. 청천은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복지(福地)의 땅이 분명하다. 이러한 땅을 만들려면 용맥을 통하여 산천정기를 이어 받아야만 가능하다. 아마도 우암 선생 묘 뒤 볼록한 곳에서 갈라진 맥이 각각 평지로 낙맥(落脈)하여 청천이라는 양택지를 이루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암 선생 묘는 명당 물은 우측에서 나와 좌측으로 흐르는 우수도좌(右水倒左)인데 자좌오향(子坐午向)을 놓았다. 이상하다 싶어 물 나가는 파구(破口)를 측정하니 손사(巽巳) 방위다. 이는 팔십 팔향법 중에서 가장 흉하다는 살인대황천(殺人大黃泉)에 해당된다. 오향(午向)을 가지고 향상작국(向上作局)을 하면 인오술(寅午戌) 삼합(三合)은 화국(火局)이 된다. 화국에 손사(巽巳) 방위는 임관궁(臨官宮)이다. 이곳을 물이 치고 나가 파구(破口)되니 그 집안에서 가장 똑똑한 자손이 화를 당한다는 향이다. 또 향의 바로 좌측 궁위는 재물과 관련된 녹(祿)방위다. 녹 방위를 물이 치고 나가면 소황천(小黃泉)이라 한다. 하루아침에 재산이 망한다고 하는 향이다. 이처럼 귀와 녹을 한꺼번에 물이 치고 파구되도록 향을 놓는 것을 살인대황천이라 하니 이곳이 그렇다. 경치가 아름답다고 이곳을 장군이 앉아있는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이라 한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리 주변 경치가 좋아도 용의 기운이 뭉쳐 혈을 맺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주변 산과 물 역시 혈지를 감싸주지 못하면 좋은 산수(山水)라 할 수 없다. 우암 손시열 선생 묘가 좋은 혈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우암 송시열! 주자학(朱子學)의 거유(巨儒), 도학(道學)정치의 대노(大老 : 대현군자로 크게 높혀서 존칭하는 칭호), 공자 맹자 주자처럼 송자(宋子)로 불림. 노론(老論)의 영수(領袖), 당쟁(黨爭)의 표본(標本). 우암 송시열에 대한 평가는 그를 일컫는 칭호만큼이나 다양하다. 조선왕조실록에 한 사람의 이름이 3천 번 이상 나오기는 오직 우암 뿐이며, 전국 42개 서원(書院)에 배향되어 이 부문에도 최고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 나라 정치와 학계를 30여년간 한 손에 쥐고 흔든 인물이며, 83세의 나이에 `죄인들의 수괴`라는 죄목으로 사약을 마시고 죽은 비운의 주인공이다. 우암은 조선 역사상 가장 치열한 당쟁의 시대에 살았고 그 자신이 최대의 당쟁가였다. 살아생전은 물론 죽은 후에도 끝없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서인(西人)과 노론(老論)에서는 도학과 의리의 표본인 성현(聖賢)으로 추앙하고, 남인(南人)과 소론(少論)에서는 저주와 증오의 대상이다. 이러한 논란은 지금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
팔도풍수지리사랑회 회원들은 어느 묘를 답사하던지 그곳에 묻힌 분에 대한 예의 표시로 간단한 묵념을 한다. 종교를 떠나 어느 누구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송시열 선생 묘에서만은 "절을 하고 싶은 사람만 합시다"라는 말과 함께 몇 명은 끝내 절을 하지 않았다.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 탓에 적이 많고 주변과 끊임없는 불화를 일으킨 송시열이다. 이것이 개인적인 일로 끝나지 않고 꼭 정치적인 문제를 야기 시켜 당쟁으로 이어졌다. 말년에는 가장 촉망하는 제자였던 윤증(尹拯, 1629-1714년)과도 불화하여 끝내 서인(西人)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리는 계기도 만들었다. 이러한 송시열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절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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