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335
■ 1부 황하의 영웅 (335)
제 5권 해는 뜨고 해는 지고
제 41장 끈질긴 악연 (2)
다음날,
진문공(晉文公)은 위성공을 함거에 싣고 하양 별궁에 머물러 있는 주양왕에게로 갔다.
그는 전날 열렸던 재판 결과를 보고한 후 말했다."위후(衛侯)는 참으로 암군입니다.
만일 위후를 죽이지 않으면 하늘이 용납치 않을 것이요. 인심이 복종하지 않을 것이요.
바라건대 왕께서는 위후에게 형벌을 내리시고 하늘의 뜻을 밝히십시오."
원래 위성공(衛成公)은 원훤이 진문공에게 소송을 내었다는 것을 알고 하양으로 오기 전에
주양왕에게 뇌물을 잔뜩 바쳤었다. 주양왕(周襄王)은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숙부의 판결은 명확하오.
하지만 본래 임금과 신하 간의 송사(訟事)는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굳이 죽일 필요까지는 없질 않겠소?“
진문공(晉文公)은 대번에 위성공이 주양왕에게 뇌물을 썼음을 알았다.
더 이상 얘기해봐야 모양새만 이상해질 것이다."신이 미처 거기까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왕께서 위후(衛侯)를 죽이지 않으시겠다니 그를 함거에 실어 왕성으로 보내겠습니다.
왕께서 적당히 처분하십시오.“이렇게 말하고 조용히 주양왕 앞을 물러났다.
그러나 진문공(晉文公)은 위성공이 괘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성공을 죽여 분풀이를 하고 싶었다.
그럴 때 마침 주양왕이 먼저 낙양의 왕성으로 돌아가겠다는 통지를 보내왔다.
진문공(晉文公)은 여러 제후들과 함께 하양 경계까지 나가 주양왕을 전송했다.
주양왕(周襄王)의 귀경 행렬 끝에 함거(檻車) 하나가 뒤따랐다.
두말할 나위 없이 위성공을 실은 함거였다.
위성공의 압송을 책임진 사람은 진(晉)나라 장수 선멸(先蔑)이었다.
선멸이 하직 인사를 마치고 떠나려 할 때, 진문공이 그를 불러세웠다.
"그대는 위성공(衛成公)이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예, 신이 보기에도 심신이 많이 쇠약해져 있는 듯합니다.“
"만일 위성공에게 변이라도 생기면 모든 책임은 우리 진(晉)나라에게 있다.
공연히 우리가 억울한 누명을 쓸 필요가 없다.
내 특별히 의원을 딸려보낼 터이니 그대는 모든 일을 잘 알아서 처리하라!"
- 모든 일을 잘 알아서 처리하라.이것이 무슨 말인가.
그러나 선멸(先蔑)은 즉각 진문공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명심하겠습니다.“선멸은 의원 연(衍)과 함께 왕성으로 떠나갔다.
한편, 재판에서 이긴 원훤(元暄)은 의기양양하게 위(衛)나라로 돌아갔다.
그는 여러 대부들을 불러놓고 말했다."이번 회맹에서 위후(衛侯)를 폐위하기로 결정하였소.
나는 방백(方伯)의 명을 받들어 새 임금을 정하기 위해 이렇게 돌아온 것이오.“
위나라 대부들은 회의를 열었다.그 결과 임금으로 뽑힌 사람은 숙무의 친동생으로서,
이름은 적(適)이며 자(字)는 하(瑕)였다.원훤(元暄)은 재상이 되었다.
그리고 숙무가 섭정하던 시절 등용했던 사마만, 손염, 주천, 야근 등이 주요 관직을 차지했다.
이로써 위(衛)나라는 오랜만에 안정을 되찾았다.
주양왕(周襄王)은 낙양으로 돌아갔지만 제후들의 회맹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진문공은 두 번째 안건으로 허(許)나라 일을 상정했다.
지금까지 진문공(晉文公)이 패공이 되어 주도한 회맹은 모두 두 번이다.
그런데 두 번 모두 참석하지 않은 나라는 초나라를 제외하고는 허(許)나라뿐이었다.
- 이를 그냥 좌시할 수는 없다.애초 진문공(晉文公)이 하양 회맹을 열게 된 목적이었다.
"주천자는 과인에게 중원의 단결과 평화의 대임을 위임하셨소.
그런데 허(許)나라는 중원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초(楚)나라만을 섬기고 우리 중원과는
교류를 끊은 상태요. 이는 주왕실을 능멸하는 처사라 할 수 있소.
이제 과인은 방백의 자격으로 여러 제후들과 함께 군대를 일으킴으로써 허나라를 문죄(問罪)하고자 하오.
제후들의 생각은 어떠하오?"물어보나마나 답은 뻔했다."삼가 방백(方伯)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하양 회맹은 폐막되었다.허나라는 삼황(三皇)중 한 사람인 신농(神農)의 후손에게 봉한 나라로서
주왕실로 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초나라 북방 경계에 접한 관계로 가장 먼저 초(楚)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허(許)나라는 춘추시대 초기 정장공(鄭莊公)이 득세를 할 때 멸국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회생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 뒤 수시로 도성을 옮기지 않으면 안 되는 비운(悲運)의 소국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로서는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한 최선책으로 초(楚)나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나,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중원의 패자국(覇者國)들은 언제나 이러한 허(許)나라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이 무렵 허나라 임금은 허희공(許僖公).
수도는 영양(穎陽).지금의 하남성 허창시 일대이다.
그해 10월 15일.
진(晉)나라를 비롯한 제, 송, 노, 정, 채, 진(陳), 진(秦), 거(莒), 주(邾) 등 10개 나라 군대는 하양을 출발,
황하를 건너 일제히 허나라 도성인 영양을 향해 쳐들어갔다.여기서 주목할 것은 날짜다.
하양 회맹 날짜는 10월 10일.회맹에서 출병까지 불과 5일밖에 되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보아 진문공(晉文公)은 애당초 허(許)나라를 치기 위해 군대를 하양까지 이끌고 온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중원 10개국 연합군이 황하를 건너 영수(穎水)를 따라 남하할 때였다.
별안간 정나라 임금 정문공(晉文公)이 연합군에서 이탈했다.
본래 정문공(鄭文公)은 허, 채나라 등과 함께 친초(親楚) 노선을 유지해왔다.
자신의 두 딸을 초성왕에게 주기도 했다.
성복 전투 때까지만 해도 정문공은 초(楚)나라 동맹국으로서 진문공과 싸웠다.
그러나 성득신이 패한 이후 진문공의 보복이 두려워 마음에도 없는 회맹에 가입했다.
하지만 역시 정문공(鄭文公)은 진문공의 모든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위성공(衛成公)과 조공공(曹共公)에 대한 혹독한 처사에 불만이 컸다.
말로는 위(衛), 조(曹) 두나라를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들에 대해 철저히
보복하고 있질 않은가.'한 번 원한을 품으면 기어코 복수하고야 마는 것이 바로 진문공(晉文公)이다.
그런 그가 어찌 나에 대해 옛 감정을 버리겠는가.‘어찌 보면 정확한 인물 평가일 수도 있었다.
위(衛),조(曹)나라는 모두 진문공이 유랑하던 시절 그를 핍박했던 군주들이다.
그 이유 하나로 인해 위, 조 두 나라는 폐허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군주들은 영어(囹圄)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정문공(鄭文公) 또한 진문공을 홀대했다.
언제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럴 바엔 차라리 초(楚)나라에게 잘 보여 닥쳐올 환란에 대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마침 연합군은 정나라 접경인 영수(穎水)를 따라 행군하고 있었다.
국내 소식이 들려왔다. 한 마을에 병이 돌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 날 저녁 정문공(鄭文公)은 진문공의 영채를 찾아가 말했다.
"듣자하니 우리 나라 도성인 신정에 괴질이 퍼졌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본국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이로써 허(許)나라로 향하는 중원 연합군은 9개국으로 줄어들었다.
신정으로 돌아온 정문공(鄭文公)은 즉시 초나라로 밀사를 보냈다.
- 진문공(晉文公)이 여러 나라를 거느리고 귀국의 조공국인 허(許)나라를 치려하고 있습니다.
저는 초왕의 위엄을 사모하여 연합군에서 이탈하였으므로 이렇게 보고합니다.
초성왕(楚成王)이 정문공의 밀사를 접견하는 중에 이번에는 허(許)나라로 부터 사신이 당도했다.
"진문공(晉文公)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우리 나라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초왕께서는 부디 우리를 구원해주십시오."그러나 초성왕(楚成王)의 대답은 시큰둥했다.
"우리 군대는 지금 성복 싸움에서 패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출병할 형편이 되지 않는다.“
그로서는 당분간 진문공(晉文公)과 다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336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