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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고싶은얘기들

[李征敎] 조선왕조실록 132,133

작성자이준황n|작성시간25.08.10|조회수129 목록 댓글 0

조선왕조실록 132  
순조 3 - 홍경래의 난

 

1811년 12월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평안도 가산에서 일군의 무리들에 의해 저항의 기치가 

올려졌습니다. 그 중심에 평서대원수라 불리던 나이 마흔의 홍경래가 있었습니다.
홍경래는 일찍이 평양 향시에 합격한 뒤 한양으로 올라와 대과에 응시했다가 낙방했습니다.
- 내 그럴 줄 알았다.  합격자는 죄다 한양 권세가의 자제들. 썩어빠진 세상이다.
홍경래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벗을 사귀고 뜻 맞는 이를 구했는데,제일 먼저 가산 땅에서 서

자 출신의 인텔리인 우군칙과 의기투합했습니다.
이어 대부호인 이희저를 끌어들이고, 인근의 부자,지식인 장사들을 규합해 무기를 마련하고

가산의 다복동에 지휘부를 차려 은밀히 준비하더니, 이윽고 일어났습니다.
- 3년째 흉작인데다 역병까지 겹쳐 유랑자가 산천에 가득하고 세상에 대한 원망이 하늘에 

닿아있다. 이들이 광산 노동자를 구한다는 광고를 내니 굶주린 많은 유랑민들이 찾아 왔고, 

그렇게 모인 이들이 초기 봉기의 주력이 되었습니다.

1811년(순조 11년) 12월 18일, 봉기군은 홍경래를 대원수로 삼고 평안도에 대한 차별과 안

김씨, 반남 박씨 등 척족들의 득세를 규탄하면서 기치를 올렸습니다.
봉기군은 남북 진영으로 나누어 행동을 개시하였는데, 봉기 초반 봉기군의 기세는 거칠 것

없었습니다.일부가 한양으로 진격하면서 가산과 곽산 관아를 접수하였고,관아의 창고를

어 저장된 곡식으로 빈민들을 구휼하고 무기 등을 빼앗아 전투력을 강화하였습니다.
그 이후 정주, 선천, 태천, 철산, 용천, 박천 등지를 접수하였으나, 박천의 송림 전투에서 패

하면서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봉기군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조정에서 대규모의 관군을 파견하였고,여기저기에서 패한 봉

기군은 마침내 정주성으로 집결하게 되었습니다.
정주성에 집결한 홍경래의 봉기군은 이후 3개월 동안 처절하고도 거칠게 저항했지만, 역량

을 총집결시킨 정규 관군을 끝내 이겨낼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정주성은 함락되었고 홍경래는 전사하였으며 악에 받친 관군은 닥치는 대로 봉기군을

학살하였습니다.
학살을 면하고 체포된 약 2,938명의 군민 중 여자와 10세 이하의 어린아이를 뺀 1,917명의 

목이 그 자리에서 잘렸습니다. 홍경래의 난, 비록 궁극적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봉기였

지만, 19세기 대격변의 바람이 조선 안에서도 불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33   
순조4 -세도정치의 시작

 

세도정치는 특정가문이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순조 이후의 정치형태로서,

특정 가문의 위세가 당파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당파정치와는 구별

됩니다. 또한 세도정치의 주체는 왕가와 혼인관계로 이어진 척신 가문으로서, 이런 점에서 

세도정치의 조짐은 영조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나 영, 정조 때 홍봉한, 김귀주, 홍국영 등의 척신이 권력을 잡기는 했으나, 이때의 척신

들은 영조나 정조의 카리스마에 눌렸다는 점과 순조 이후의 세도정치에는 벽파니 시파니

하는 당파적 색채가 소멸되었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다르다 하겠습니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집권한 노론 시파는 벽파를 사실

상 궤멸시켜버렸는데, 이러한 시파의 중심에는 안동김씨,그 중에서도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

이 있었습니다. 안동 김씨뿐만 아니라 온 조정이 그를 주시했고 권력을 눈앞에 둔 김조순은

깊이 생각했습니다.
- 임금으로부터 그토록 총애를 받았던 홍봉한(사도세자의 장인)이나 김귀주(정순왕후의 동

생) 가문이 왜 몰락하고 말았는가? - 모든 것을 독식하려 했기 때문이다.
왕의 국구 김조순은 실제로 순조 재위 기간 내내 대제학, 병판, 이판 등 순조가 내리는 벼슬

을 모두 사양했고, 원자의 유선과 요속을 추천해 올리라는 어명에도 다음과 같은 이유를 달

아 바로 차자를 올렸습니다.
-신은 조정의 혹과 같은 존재로 은택이 과분하여 위아래에 미치지 못하옵고 좌우에 떳떳함

이 없나이다. 추천에 참여하라는 명을 거두어 주소서.
김조순은 이후에도 어떤 관직도 맡은 바 없었으나 이가 30년 동안 최강의 막후 실력자였음

은 이론이 없습니다.순조 32년에 그가 죽자 순조는 다음과 같이 그 죽음을 애통해 했습니다.
-그는 부지런하고 충성스러우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왕실을 위해 안으로는 지극히 정성을

해 나를 올바르게 돕고 밖으로는 두루 다스려 진정시켜 시국의 어려움을 구했으니 나라

의 오늘이 있도록 보호한 것이 누구의 힘이었는가.
죽은 그날로 순조는 그에게 영의정을 증직했고 문신으로는 최고의 영예인 충문공이라는 시

호를 내려주었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이렇게 대접받은 신하는 조선에 없었으니, 이는 

앞서 본대로 그의 남다른 처신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이와 같이 김조순이 안동김씨의 일원으로 세도정치를 편 원조이기는 하나,세도정치의 폐해

가 적나라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김조순 사후부터입니다.
김조순이 죽자 그 아들, 조카들이 전면에 나서며 세도정치는 막장으로 치닫게 됩니다.

 

(13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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