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과 해석하는 것 — 색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눈으로 본다고 믿는다.
글자를 읽고, 색을 구분하며, 세상을 직접 마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믿음은 조용히 흔들린다.
눈은 단지 빛을 받아들이는 기관일 뿐이다.
사물에서 반사된 빛이 들어오면 망막은 그것을 전기 신호로 바꾸어 뇌로 보낸다.
그리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보는 일”이 시작된다.
글자를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눈은 그저 검은 선과 흰 배경을 감지할 뿐인데 뇌는 그것을 글자로, 의미로, 기억으로
이어 붙인다. 결국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뇌가 해석한 세계를 보고 있는 셈이다.
이 점에서 인간과 동물은 다르면서도 같다. 모두 눈을 통해 신호를 받고 뇌에서 그것을
해석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종마다 다르다.
개는 색을 제한적으로 본다. 대신 움직임에 민감하다.
그들의 세계는 색의 풍경이 아니라 흐름과 움직임의 세계일 것이다.
벌은 인간이 보지 못하는 자외선을 본다. 우리 눈에는 단순한 흰 꽃이 벌에게는 길을
안내하는 무늬로 보인다.
뱀은 열을 감지한다. 그들에게 세상은 색채가 아니라 따뜻함과 차가움의 지도일지 모른다.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각자는 서로 다른 세계를 보고 있다.
그렇다면 색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흔히 빨강, 파랑, 초록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물리학은 말한다.세상에 있는 것은 색이 아니라 단지 서로 다른
빛의 파장일 뿐이라고.빨강도, 파랑도 우주 어딘가에 붙어 있는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눈이 신호를 보내고 뇌가 그것을 해석하는 순간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색이 완전히 없는 것도 아니다.파장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고 그 차이를 바탕
으로 우리는 색을 느낀다.그래서 색은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것도 아니다.
색은 현실 위에 인간의 해석이 덧입혀진 결과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라기보다 해석된 세계에
가깝다. 노을이 붉게 물드는 저녁, 강물이 푸르게 흐르는 풍경, 꽃잎에 스며든 색의 결들…
그 모든 것은 빛과 물질의 만남 위에 우리 마음이 얹은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우리는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며 살아간다.그리고 그 이해의
방식이 곧 우리의 세계가 된다.색은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 속에 있다.
주머니 속을 찾지 않는 이유
다 아는 얘기다.
빛이 어떻고, 뇌가 해석하고,색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이야기. 그러나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살아간다.
마치 주머니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람은 왜 주머니 속을 찾아보지 않을까.
이미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늘 가지고 다니던 것이고,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꺼내보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안에는 가끔 잊고 있던 것이 들어 있다. 한때는 소중했으나 이제는
존재조차 잊어버린 것들. 생각, 감정, 질문,그리고 깨달음.우리는 세상을 너무 바깥에서만
찾는다.
새로운 지식, 새로운 기계, 새로운 정보…눈앞에 펼쳐지는 것들을 쫓느라 정작 자기 안에
이미 들어 있는 것들은 꺼내어 보지 않는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우리가 “새롭게 안다”고
느끼는 것들 중 많은 것은처음 듣는 말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다시 꺼내어 보는
순간이다.
그래서일까.어떤 글을 읽다가 “아, 이거였지…” 하고 가슴이 조용히 울리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새로운 지식을 얻어서가 아니라 잊고 있던 자기 안의 것을 다시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주머니를 뒤지는 일은 새로운 것을 찾는 일이 아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조금 다르게
살아간다.사람은 모르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꺼내 보지 않아서 모르는
채 살아간다.
-원당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