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 우리말 이름, 마을 이름을 적기 위해 만든 우리식 한자
요즘 사람더러 우리말 '돌쇠놈'을 한자로 적어 놓으라고 하면 막막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놈'자에 해당하는 한자를 별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이를 '乭釗㖈'이라고 적고 '돌쇠놈'으로 읽었다. '돌'을 '돌(石)'의 뜻에 해당하는 '石'에 음을 나타내는 '乙'을 받쳐 '乭'로 적어 '돌'의 뜻과 음을 동시에 나타냈고, '노(老)'자에 한글 자모 ㅁ 모양의 口(입 구)를 받쳐 '㖈;놈'을 표기했다. 우리말(한글)과 한자의 조합인 셈이다.
①
우리식
한자의 등장
중국의 표음문자인 한자는 우리말을 제대로 나타낼 수 없었다. 토박이 순 우리말이 많은 우리의 한국어와는 애초부터 좋은 짝이 되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한자는 우리말을 표기하기엔 완벽하지 못한 글이었다. 특히, 토박이 땅이름이나 사람이름을 적을 때 이를 적을 마땅한 한자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옛날 우리 선비들은 중국에서는 아예 없는 우리식의 한자를
만들어 냈다. 주로 한자와 우리 글자로 조합된 '한국식 한자'를 만든 것인데, 이러한 식으로 만들어진 글자들은 중국이나 일본 등에서는
지금도 거의 볼 수 없는 것들이다.
乙(새 을)자를 써서 ㄹ의 음을 대신한 것이 많고, 口(입 구)자를 써서 ㅁ의 음을, 한글
자모의 ㅇ자를 써서 ㅇ의 소리값 음을 보태기도 했다. 이러한 식의 조합은 한글 창제 이후부터 더욱 많아진
것으로 추측된다. 한자와 한글의 자모를 짜 맞춘 글자들이 많이 나와 이용된 흔적이 문헌 등을 통해서
많이 발견된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한자는 역시 음의 체계가 다른 우리말을 제대로 표기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이러한 식의 조합 글자들이 적히고 읽힌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의적(義賊)으로 알려진 조선시대의 '임꺽정'을
어떻게 적었을까? 한자로 '林巨正'이라고 적기도 했지만, 이는 '임거정'으로 읽혀 원이름과 상당한 차이가 난다. 그러나, '꺽'자에 가까운 '걱'자를 만들어 적었다. '巨(거)'자에 한글 자모의 ㄱ자를 밑에 받쳐 '巪 '자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쁜 애'란 뜻으로 '이뿐'이란 이름을 지었다면 이를 한자로 어떻게 적었을까? '入分(입분)'이나 '伊分(이분)'으로 적기도
했지만, '伊哛 (이뿐)'으로 써서 완전한 발음이 되게 했다.
'分(분)'자를 된소리로 만들기 위해 그 글자에
된소리를 의미하는 '叱'자를 위나 아래쪽에 붙였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 된소리 ‘ㄸ’은 ‘ㅳ’이나 ‘ㅵ’, ‘ㅆ’은 ‘ㅼ’, ‘ㅃ’은 ‘ㅽ’ 등으로도 표기되었다(당시에는 발음이 약간씩은 달랐던 것으로 추정됨). ‘ㄷ’받침이나 된소리는 이들 글자와 모양이 닮은 ‘叱;질’자를 갖다 쓴 것으로
추정된다. 또는 '혀차는 소리','꾸짖음',
'성냄'의 뜻이어서 '분'을 성내듯 강하게 된소리로 발음하라는 뜻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참으로
기발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곱단'이란 이름을 가졌다는 어느 할머니
이름이 호적에는 '䯩丹'으로 기록되어 있다. 원래의 한자에는 '곱'자가
없어 '高(고)'자에
ㅍ 발음에 근사한 '巴(파)'자를
받침으로 받쳐 '䯩 (곱)'자를 만든 것이다.
'보름섬', '그믐섬'이란 이름의 섬이 있다. 이를 한자로 적어야 하는데, 적을 만한 '보름'의 '름'자나 '그믐'의 '믐'자가 없었다. '르'나 '므'자라도 있으면 거기에 ㅁ을 받쳐서라도 만들면 되었지만 그나마도 없었다. 그런데, 결국 연음(延音)을 이용해
이를 해결했다. '乶音島(볼음도)'와 '今音島(금음도)'로 적어 '보름섬'이나 '그믐섬'을 표기했다. '甫(보)'자에 우리글 ㄹ 모양의 乙을 받쳐 '볼'이라는 음을 우리식 한자로 만들어 적은 것도 참으로 재미있는
발상이다. '곰달내'라는 땅이름을 '고음월천(古音月川)'이나 '고음달내(古音達乃)'라고
표기한 것보다 더 앞선 생각이다.
'외진 곳'이란 뜻의 땅이름인 '욋개'는 '夞怪(욋괴)'로 적었다. '外(외)'자에 '叱(질)'자를 받쳐 '夞;욋'자를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말 '움막'은 '집'의 뜻인 '广(집 엄)'에 '움'에 근사한 음을 가진 '音(음)'자를 넣어 '움'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瘖(벙어리:음)와 자형이 비슷하여 대신 음자와 비슷한 '昔'자가 들어간 庴(고을이름:적)자를 차자하여 '움'자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幕(막)'자를 붙여 '움막;庴幕'을 표기했다.
한자로의 표음이 불가능한 '갓', '것', '곱', '넙', '놀', '놈', '늣(늦)', '댐', '덜', '덩', '둘', '둥', '며', '묠', '볼', '섬', ‘얌’, '잘', '줄', '할' 등의
글자도 한자의 뜻이나 음과 우리 한글의 자모를 짜맞추어 기가 막히게 만들어 냈다. 일부 한자의 불가능한 표음 기능을 받쳐 주기까지 하면서 어느 음이나 표현을 가능하게 한 한글은 고금을 통해
우리말을 표기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훌륭한 글자였다.
②
우리식 한자(國字)의 몇 가지 예
우리 나라에서 만든 대부분의 한자는 우리말을 음(音) 그대로 적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畓(답 논))은 우리말은 아니나 논은 곧 물밭(水田)이란 생각에서 만든 글자로 음 '답'은
이와 비슷한 글자인 沓(답 유창하다)에서 따온 것이다.
垈(터:대)와 媤(시집:시)은 형성문자 형식으로 만든 글자.
이 말들은 원래 우리말인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
亇/㐃마(마치:마, 땅이름:마)는 마치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한국 상형문자이다.
串(곶:곶), 䢏(무지/마투리:두), 洑(나루:보), 䢘(땅이름:수) 등도 있다. ‘무지/마투리’는 ‘곡식의 분량을 ‘섬’을 단위로 하여 셀 때, 한 섬에 차지 못하고 남은 양’ 또는 ‘완전하게 한 섬이 못 되는 곡식’을 말한다.
倻(야)는 고유명사 가야(伽倻)를
표기하기 위해 만들 글자. 가야는 우리말 지명. 그래서 표기법도
다양하다.
가야(加耶, 伽耶, 伽倻), 가라(加羅), 가량(加良), 가락(駕洛), 구야(狗邪, 拘邪), 임나(任那).
여기서 倻는 불교 관련 음역 글자인 伽와 마찬가지 원리(人이 부수인 형성자)로 글자를 만들었기 때문인 듯.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중이었으니 불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乭(돌)은 이름에서 쓰는 글자로 한국어 돌을 한자로 옮긴 것.
재미있는 것은 石으로 뜻(훈)을 나타내고 乙로 'ㄹ' 받침을 나타낸다는 것(훈(訓)+乙). 乙의 발음이 ㄹ받침을 가지고 있고 또 글자 모양도 ㄹ과 비슷하기 때문에 이 글자를 썼다.
이 방식의 글자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이미지 참조)
(入+乙)㐈들, (文+乙)㐎글, (米+乙)㐘쌀, (角+乙)뿔, (浮+乙)㐢뜰, (擧+乙)들.
乶(볼)은 甫(보)라는음이 나는 글자에 ‘ㄹ’ 받침을 나타내는 乙을 붙여 썼다(음(音)+乙).
이 규칙을 따라는 것이 무척 많은데, 다음과 같은 것이다.
갈乫㐓, 걸乬, 굴㐇㐝, 길㐞(其+乙), 놀㐐㐗, 돌乭㐑(冬+乙), 둘乧㐙, 말(馬+乙), 묠乮, 볼乶, 빌㐟, 살乷㐊, 설㐥(鋤서+乙), 솔乺㐒, 올㐏㐚乯, 울㐛, 율㐕, 을얼乻(※을-에 해당하는 글자가 없어 비슷한 於 응용), 잘乽, 절㐉(정에서 받침 ㅇ이 빠짐), 줄乼, 톨㐋, 펼(坪+乙 ※평에서 받침 ㅇ이 빠짐), 할乤, 홀乥(呼+乙) 등.
임꺽정의 꺽 또는 걱(巪)은 巨 밑에 받침으로 ㄱ을 붙여서 나타냈다. 斗
밑에 ㄱ 하면 㪲둑자가 된다.
엇시조의 엇(旕)은 於 밑에 ㄷ(ㄷ, ㅅ, ㅈ, ㅊ, ㅌ의 대표받침은 ㄷ) 받침을 뜻하는 叱을 붙여서 썼다.
이 방식도 상당히 많이 이용되었다.
예: 굿㖌 , 팟巼 , 끝唜(귿-끝을 나타내는 한자 末에
ㄷ음으로 끝남을 표시하는 叱. '말'도 이 글자를 씀(唜)), 싯(始+叱 ※始(비롯할:시)자에 ㅅ받침으로 끝남을 표시하는 叱), 짓嗭(直직에서 받침 ㄱ이 빠짐), 잣㗯 , 씻㘒(종種+叱), 곳㖛㖜廤蒊(※꽃)
ㅂ 받침은 巴 또는 邑을 밑에 써서 나타냈다.
그래서 곱䯩(高+巴), 삽(沙+邑)(삽사리:삽)
老 밑에 ㅁ 받침을 붙이면 노+ㅁ=㖈놈이 된다.
斗 밑에 ㅇ 받침을 붙이면 두+ㅇ=㪳둥이 된다.
일부 한자는 중국에서 만들어졌으나 우리나라 문서에서 고유한 뜻을 부여한 경우가
있다. 太는 콩이란 뜻으로(음은 태), 印은 끝이란 뜻으로(음도 끝) 쓰인
게 그 예. 쇠釗(힘쓸/깍을:소)는 사람 이름에서 한국어 ‘쇠’를 적는 데 썼다. 뜻을 나타내는 金이 부수로 쓰였고 또 소는 쇠와
발음이 비슷해서이다. 또 娚(말소리:남)은 한국에서는
글자모양을 이용해서 '오라비:남'의 뜻을 추가하여 남자 형제 또는 아내의 남자 형제를 가리키는 글자로 사용하게 되었다. ‘각각:갓(這)’은 과거에 ‘저마다, 제각각’의 뜻으로
‘갓’이란 우리 말이 있었고 這(이:저)자를 借字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아직 ‘각각:갓’으로 자전에 남아있다.
또, 이두에 쓰는 한자가 있다. 旀는 '(공부)하며(爲旀)'의 '며'란 음을 표기하는데 썼다. 이 글자는 㢱(미;彌와 동자)와 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이 글자를 변형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산壭은 산의 이두식 표기이며, 兺,哛 은 우리말 '뿐'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