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이야기]<591>君子는 喩於義하고 小人은 喩於利니라

유학의 고전은 義(의)와 利(리)의 변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둘의 변별을 義利之辨(의리지변)이라고 한다. ‘논어’ 里仁(이인)편의 이 장은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義에 밝아서 일마다 義를 표준으로 삼는 사람을 君子(군자), 利에 밝아서 일마다 利를 표준으로 삼는 사람을 小人(소인)으로 규정했다.
고전에서 君子와 小人의 구별은 문맥에 따라 다르다. 여기서는 지혜와 덕이 있는 사람을 군자, 그렇지 못한 사람을 소인이라 했다. 喩(유)는 신속하게 깨우친다는 뜻인데 대개 曉(효)와 뜻이 같다. 於(어)는 ‘∼에서, ∼에 대해서’의 뜻을 나타내는 기능을 한다. 義는 옳을 宜(의)와 통하여 本然(본연)의 理法(이법)에 부합함을 말한다. 道義(도의)나 義理(의리)라는 복합어로 사용한다.
이에 비해 利는 자기를 이롭게 함을 말하며 利益(이익)이라는 복합어로 사용한다. 본래 利는 禾(화)와 刀(도)로 짜여 곡식 따위를 칼로 베는 형태로, 곡식을 베어 거두어 이익으로 삼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후한 때 ‘說文解字(설문해자)’는 곡식 베는 칼날의 날카로움에서 ‘날카롭다, 재빠르다’의 뜻이 나왔다고 풀이했다. 모두 통하되 여기서는 이익의 뜻이다.
남송의 陸象山(육상산)은 사람이 義에 뜻을 두면 義를 깨치고 利에 뜻을 두면 利를 깨친다고 주장했다. 정약용은 義를 깨친 뒤 義에 뜻을 두고 利를 깨친 뒤 利에 뜻을 둔다고 반박했다. 다만 義는 공변된 天理(천리)이고 利는 사사로운 人欲(人慾, 인욕)이며, 둘이 氷炭(빙탄, 얼음과 숯)의 관계라고 본 점은 같다. 天理와 人欲의 사이는 당초 머리카락 하나 끼울 수도 없을 만큼 좁지만 양극의 결과는 대단히 멀어진다. 그렇기에 유학은 인욕을 뿌리째 뽑고 근원을 막는 拔本塞源(발본색원)의 공부를 강조한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한자 이야기]<592>父母之年은 不可不知也니, 一則以喜요 一則以懼니라
부모님이 건강하게 오래 사시기를 바라는 마음이야말로 孝誠(효성)의 순수한 발로이다. ‘논어’ 里仁(이인)편의 이 장은 孝의 마음을 아주 쉽고도 명확하게 말하였다.
不可不(불가불)은 ‘아닌 게 아니라’라는 이중부정을 통해 강한 긍정과 주장의 뜻을 드러낸다. 이 글의 知(지)는 確認(확인)하고 記憶(기억)한다는 뜻이다. 글 끝의 也(야)는 단정의 어조를 표시한다. ‘一則(일즉)∼’의 구를 겹치면 한편으로는 이러면서 한편으로는 저런다는 뜻을 드러낸다. 以(이)는 이유나 근거의 말을 끌어온다. 여기서는 ‘부모님 연세를 앎으로써’나 ‘부모님이 高齡(고령)이기에’라는 뜻을 함축한다.
喜(희)는 본래 神을 즐겁게 하려고 큰북 치는 일을 뜻했는데 사람이 마음으로 기뻐함을 뜻하게 되었다. 懼(구)의 오른쪽은 발음을 표기하면서, 새가 두 눈 굴리는 모습을 나타냈다.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부모님 연세를 생각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은 부모님의 長壽(장수)를 새삼 확인했기 때문이다. 부모님 연세를 생각하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高齡이시라서 혹 餘生(여생)이 얼마 되지 않으실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부모님 연세를 생각하며 기뻐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는 것을 愛日(애일)의 정성이라고 한다. 愛日이란 날을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다. 날이 감을 愛惜(애석)해한다는 말이다. 한나라 揚雄(양웅)의 ‘法言(법언)’에 “어버이 섬기는 일은 언제까지고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효자는 날이 감을 애석해한다”고 하였다. 선인들은 거처에 愛日堂(애일당)이라는 당호를 붙이고는 했다. 孝道하려고 생각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라서 風樹之嘆(풍수지탄)을 하게 되지나 않을까 우려해서 미리 정성을 다하려 한 것이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