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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노래

이해인 詩人과 名詩들

작성자한재환|작성시간05.08.18|조회수148 목록 댓글 0

▣ 詩人 이해인(李海仁) ▣

본  명 : 이명숙
수녀명 : 클라우디아

1945년 강원도 양구 출생
       숙명여대 대학원 졸업
1964년 부산 올리베따노성 베네딕도 수녀회 입회
1970년 소년지에 동시 <하늘>과 <아침>이 추천되어 등단
1975년 필리핀 성 루이스 대학 영문과 졸업,
1981년 제9회 새싹문학상 수상
1985년 서강대학원 종교학과 졸업.
1985년 여성동아 대상
1998년 부산여성문학상 수상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는 1964년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의 시는 급속한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 인간으로
인정 받기를 갈구하는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따라서 그의 시집은
오랫동안 베스트 셀러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의 시에는 깊은 종교적인 신앙과 영감이 깔려 있지만
외면적으로는 별로 느낄 수 없을 만큼 은은하게 함축되어 있다.
작품의 특징은 모든 사람이 겪는 고독과 슬픔,
영혼의 병에서 오는 깊고 심한 갈등을
진솔하게 나누고자 하는데 있다.
그의 시는 마치 영원한 구원자에게 바치는 한 떨기의 꽃,
눈물의 제단에서 피어 오르는 향불처럼
이 세상의 고뇌와 법열의 진정한 고백이다.

시인의 겸손하고 자신을 바치는 진지한 자세가 느껴진다.
1인칭과 2인칭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독자는 친근감을 느끼게 하여 자신의 고통을
시인과 함께 나누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결국 그는 19세기 미국의 저명한 시인
에밀리 디킨슨과 비교되고 있다.


■시집  ■

민들레 영토 (1976), 내 혼에 불을 놓아 (1979),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1979), 시간의 얼굴 (1989),
사계절의 기도 (2000), 다시 바다에서 (1998),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1999),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1999)

동시집 : 엄마와 분꽃

기도시 모음집 : 사계절의 기도

종교 산문집 : 사랑할 땐 별이 되고

글모음집 : 두레박,  꽃삽

옮 긴 책 : 따뜻한 손길,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名詩 감상 ■


※ 목차 ※

1. 가을노래

2. 마지막 기도

3. 민들레의 領土

4. 병상일기

5. 내가 뛰어 가던 바다는

6. 미리 쓰는 유서

7. 보고 싶다는 말

8. 별을 보며

9. 성 금요일의 기도

10. 여행길에서

11.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12.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13. 시의 집

14. 나를 키우는 말

15. 파도의 말

16. 바람에게

17. 꿈을 위한 변명

18. 바람이 내게 준 말

19. 나무 책상

20. 비 오는 날의 일기

21. 구름의 노래

22. 해질 무렵 어느 날

23. 상사화

24. 매화 앞에서

25. 춘분 일기

26. 봄까치꽃

27. 여름 일기

28. 가을 편지

29. 장미를 생각하며

30. 석류의 말

31. 다시 겨울 아침에

32. 말의 빛

33. 꽃밭에 서면

34. 5월의 편지

35. 산 위에서

36. 산처럼 바다처럼

37. 살아 있는 날은

38. 석류꽃

39. 선물의 집

40. 수녀 1, 2.


☞ 가을노래 ☜

가을엔 물이 되고 싶어요
소리를 내면 비어 오는
사랑한다는 말을
흐르며 속삭이는 물이 되고 싶어요

가을엔 바람이고 싶어요
서걱이는 풀잎의 이마를 쓰다듬다
깔깔대는 꽃 웃음에 취해도 보는
연한 바람으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감이 되고 싶어요
가지 끝에 매달린 그리움 익혀
당신의 것으로 바쳐 드리는
불을 먹은 감이 되고 싶어요


☞ 마지막 기도 ☜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두고갈 것도 없고
가져갈 것도 없는
가벼운 충만함이여

헛되고 헛된 욕심이
나를 다시 휘감기 전
어서 떠날 준비를 해야지

땅 밑으로 흐르는
한 방울의 물이기보다
하늘에 숨어 사는
한 송이의 흰 구름이고 싶은
마지막 소망도 접어두리

숨이 멎어가는
마지막 고통 속에서도
눈을 감으면
희미한 빛 속에 길이 열리고
등불을 든 나의 사랑은
흰옷을 입고 마중나오리라

어떻게 웃을까
고통 속에도 설레이는
나의 마지막 기도를
그이는 들으실까


☞ 민들레의 領土 ☜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

태초로부터 나의 영토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진주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애처로이 쳐다보는
인정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쳐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게
피리를 불었지

태양에 쫓기어
활활 타다 남은
저녁 노을에
저렇게 긴 강이 흐른다

노오란 내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 전
그이는 오실까

당신의 맑은 눈물
내 땅에 떨어지면
바람에 날려 보낼
기쁨의 꽃씨

흐려오는
세월의 눈시울에
원색의 아픔을 씹는
내 조용한 숨소리

보고 싶은 얼굴이여


☞ 병상일기 ☜

아플 땐 누구라도
외로운 섬이 되지

하루종일 누워지내면
문득 그리워지는
일상의 바쁜 걸음
무작정 부럽기만한
이웃의 웃음소리

가벼운 위로의 말은
가벼운 수초처럼 뜰 뿐
마음 깊이 뿌리내리진 못해도
오히려 듣고 싶어지네

남들 보기엔
별 것 아닌 아픔이어도
삶보다는 죽음을
더 가까이 느껴보며
혼자 누워있는 외딴 섬

무너지진 말아야지
아픔이 주는 쓸쓸함을
홀로 견디며 노래할 수 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삶을 껴안는 너그러움과
겸허한 사랑을 배우리


☞ 내가 뛰어 가던 바다는 ☜

처음으로 사랑을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하늘색 원피스의 언니처럼
다정한 웃음을 파도치고 있었네
더 커서 슬픔을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실연당한 오빠처럼
시퍼런 울음을 토해 내고 있었네.

어느 날 이별을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남빛 치마폭의 엄마처럼
너그러운 가슴을 열어 주었네

그리고 마침내 기도를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파도를 튕기던 은어처럼
펄펄 살아 뛰는 하느님 얼굴이었네


☞ 미리 쓰는 유서 ☜

소나무 가득한 숲속에
솔방울 묻듯이 나를 묻어 주세요.
묘비엔 관례대로
언제 태어나고
언제 수녀 되고
언제 죽었는가
단지 세 마디로 요약이 될 삶이지만

'민들레의 영토'에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남은 이들 마음 속에
기억되길 바랍니다.

영정 사진
너무 엄숙하지 않은 걸로
조금씩 웃음이 깃든 걸로
놓아 주세요

시를 쓰지 않아도 되는 지금
나는 이제 진짜 시가 되었다고
믿고 싶어요
갚을 길 없는 사랑의 빚은
그대로 두고 감을 용서하셔요.

생각보다 빨리
나를 잊어도 좋아요
부탁 따로 안해도 그리 되겠지요.

수녀원의 종소리
하늘과 구름과 바다와 새
눈부신 햇빛이
조금은 그리울 것 같군요

그동안 받은 사랑
진정 고마웠습니다.


☞ 보고 싶다는 말 ☜

생전 처음 듣는 말처럼
오늘은 이 말이 새롭다
보고 싶은데......

비오는 날의 첼로 소리 같기도 하고
맑은 날의 피아노 소리 같기도 한
너의 목소리

들들 때마다
노래가 되는 말
평생을 들어도
가슴이 뛰는 말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감칠맛 나는
네 말 속에 들어 있는
평범하지만 깊디깊은
그리움의 바다

보고 싶은데......

나에게도
푸른 파도 밀려오고
내 마음에도 다시
새가 날고......


☞ 별을 보며 ☜

고개가 아프도록
별을 올려다본 날은
꿈에도 별을 봅니다.
반짝이는 별을 보면
반짝이는 기쁨이
내 마음의 하늘에도
쏟아져 내립니다.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혼자일 줄 아는 별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제 자리를 지키는 별
나도 별처럼 살고 싶습니다.

얼굴은 작게 보여도
마음은 크고 넉넉한 별
먼 데까지 많은 이를 비추어 주는
나의 하늘 친구 별

나도 날마다
별처럼 고운 마음
반짝이는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 성 금요일의 기도 ☜

오늘은 가장 깊고 낮은 목소리로
당신을 부르게 해주소서
더 많은 이들을 위해
당신을 떠나 보내야 했던
마리아의 비통한 가슴에 꽂힌
한 자루의 어둠으로 흐느끼게 하소서

배신의 죄를 슬피 울던
베드로의 절절한 통곡처럼
나도 당신 앞에
겸허한 어둠으로 엎드리게 하소서

죽음의 쓴잔을 마셔
죽음보다 강해진 사랑의 주인이여

당신을 닮지 않고는
내가 감히 사랑한다고
뽐내지 말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했기에
더 깊이 절망했던 이들과 함께
오늘은 돌무덤에 갇힌
한 점 칙칙한 어둠이게 하소서

빛이신 당신과 함께 잠들어
당신과 함께 깨어날
한 점 눈부신 어둠이게 하소서.


☞ 여행길에서 ☜

우리의 삶은
늘 찾으면서 떠나고
찾으면서 끝나지
진부해서 지루했던
사랑의 표현도
새로이 해보고
달밤에 배꽃 지듯
흩날리며 사라졌던
나의 시간들도
새로이 사랑하며
걸어가는 여행길

어디엘 가면
행복을 만날까

이 세상 어디에도
집은 없는데 ......
집을 찾는 동안의 행복을
우리는 늘 놓치면서 사는게 아닐까


☞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

손 시린 나목의 가지 끝에
홀로 앉은 바람 같은
목숨의 빛깔
그대의 빈 하늘 위에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차 오르는 빛

구름에 숨어서도
웃음 잃지 않는
누이처럼 부드러운 달빛이 된다.

잎새 하나 남지 않은
나의 뜨락엔 바람이 차고
마음엔 불이 붙는 겨울날

빛이 있어
혼자서도
풍요로워라

밁고 높이 사는 법을
빛으로 출렁이는
겨울 반달이여


☞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

나는 문득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묵혀 둔
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한 채의 빈집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음, 마음에 드는데 ......'
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지어 줄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


☞ 시의 집 ☜

나무 안에 수액이 흐르듯
내 가슴 안에는
늘 시가 흘러요

빛깔도 냄새도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어
그냥 흐르게 놔두지요

여행길에 나를 따라오는 달처럼
내가 움직일 때마다
조용히 따라오는‥‥‥

슬플 때도
힘에 되어주는 시가 흘러
고마운 삶이지요


☞ 나를 키우는 말 ☜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해서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이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 파도의 말 ☜

울고 싶어도
못 우는 너를 위해
내가 대신 울어줄게
마음놓고 울어줄게

오랜 나날
네가 그토록
사랑하고 사랑받은
모든 기억들
행복했던 순간들

푸르게 푸르게
내가 대신 노래해줄게

일상이 메마르고
무디어질 땐
새로움의 포말로
무작정 달려올게


☞ 바람에게 ☜

몸이 아프고
마음이 우울한 날
너는 나의
어여쁜 위안이다, 바람이여

창문을 열면
언제라도 들어와
무더기로 쏟아내는
네 초록빛 웃음에 취해
나는 바람이 될까

근심 속에 저무는
무거운 하루일지라도
자꾸 가라앉지 않도록
나를 일으켜다오
나무들이 많이 사는
숲의 나라로 나를 데려가다오
거기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하겠다
삶의 절반은 뉘우침뿐이라고
눈물 흘리는 나의 등을 토닥이며
묵묵히 하늘을 보여준 그 한 사람을
꼭 만나야겠다


☞ 꿈을 위한 변명 ☜

아직 살아 있기에
꿈을 꿀 수 있습니다

꿈꾸지 말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꿈이 많은 사람은
정신이 산만하고
삶이 맑지 못한 때문이라고
단정 짓지 마세요

나는 매일
꿈을 꿉니다
슬퍼도 기뻐도
아름다운 꿈
꿈은 그대로 삶이 됩니다

오늘의 이야기도
내일의 이야기도
꿈길에 그려질 때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꿈이 없는 삶
삶이 없는 꿈은
얼마나 지루할까요

죽으며 꿈이 멎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은
꿈을 꾸고 싶습니다
꿈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바람이 내게 준 말 ☜

넌 왜
내가 떠난 후에야
인사를 하는 거니?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왜 제때에 못하고
한 발 늦게야 표현을 하는 거니?

오늘도
이끼 낀 돌층계에 앉아
생각에 잠긴 너를
나는 보았단다

봉숭아 꽃나무에
물을 주는 너를
내가 잘 익혀놓은
동백 열매를 만지작거리며
기뻐하는 너를
지켜보았단다

언제라도
시를 쓰고 싶을 땐
나를 부르렴

어느 계절이나
나는 네가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단다
나의 걸음은
네게로 달려가는
내 마음보다도 빠르단다
사랑하고 싶을 땐
나를 부르렴

나는 누구의 마음도 다치지 않으면서
심부름 잘하는
지혜를 지녔단다

세월에 가도 늙지 않는
젊음을 지녔단다


☞ 나무 책상 ☜

숲의 향기 가득히 밴
나무책상을 하나 갖고 싶다

편히 엎디어 공상도 하고
나무냄새 나는 종이를 꺼내
그림도 그리고 편지도 쓰고
시의 꽃을 피우면서
선뜻 나를 내려놓아도 좋을
부담 없는 친구 같은 책상을
곁에 두고 싶다

동서남북 네 귀퉁이엔
비밀스런 꿈도 심어야지
외롭다고 느낄 때마다
살짝 웃어보는 나를
어진 마음으로 받아주는 그

평범해 보이지만 아름다운 깊이로
나를 제자리에 앉히는
향기로운 나무책상을 하나 갖고 싶다


☞ 비 오는 날의 일기 ☜

* 1 *

비 오는 날은
촛불을 밝히고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습관적으로 내리면서도
습관적인 것을 거부하며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그대에게
내가 처음으로 쓰고 싶던
사랑의 말도
부드럽고 영롱한 빗방울로
내 가슴에 다시 파문을 일으키네


* 2 *

빨랫줄에 매달린
작은 빗방울 하나
사라지며 내게 속삭이네

혼자만의 기쁨
혼자만의 아픔은
소리로 표현하는 순간부터
상처를 받게 된다고
늘 잠잠히 있는 것이 제일 좋으니
건성으로 듣지 말고 명심하라고
떠나면서 일러주네


* 3 *

너무 목이 말라 죽어가던
우리의 산하
부스럼난 논바닥에
부활의 아침처럼
오늘은 하얀 비가 내리네

어떠한 음악보다
아름다운 소리로
산에 들에
가슴에 꽂히는 비

얇디얇은 옷을 입어
부끄러워하는 단비
차갑지만 사랑스런 그 뺨에
입맞추고 싶네

우리도 오늘은 비가 되자

사랑 없이 거칠고
용서 못해 갈라진
사나운 눈길 거두고
이 세상 어디든지
한 방울의 기쁨으로
한 줄기의 웃음으로
순하게 녹아내리는
하얀 비, 고운 비
맑은 비가 되자


* 4 *

집도
몸도
마음도
물에 젖어
무겁다

무거울수록
힘든 삶

죽어서도 젖고 싶진 않다고
나의 뼈는
처음으로 외친다

함께 있을 땐
무심히 보아 넘긴
한 줄기 햇볕을
이토록 어여쁜 그리움으로
노래하게 될 줄이야

내 몸과 마음을
퉁퉁 붓게 한 물기를 빼고
어서 가벼워지고 싶다
뽀송뽀송 빛나는 마른 노래를
해 아래 부르고 싶다


☞ 구름의 노래 ☜

* 1 *

구름도 이젠
나이를 먹어 담담하다 못해
답답해졌나?

하늘 아래 새것도 없고
놀라울 것도 없다고
감탄사를 줄였나?

그리움도 적어지니
괴로움도 적어지지?

거룩한 초연함인지
아니면 무디어서 그런 건지
궁금하고 궁금하다

대답해주겠니?


* 2 *
나의 삶은
당신을 향해 흐르는
한 장의 길고 긴
연서였습니다

새털구름
조개구름
양떼구름
꽃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여러 형태의 무늬가 가득하여
삶이 지루한 줄 몰랐습니다

오늘도 나는
열심히 당신을 찾고 있군요
내 안에는 당신만 가득하군요

보이는 그림은 바뀌어도
숨은 배경인 내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고

나는 구름으로 흐르며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 해질 무렵 어느 날 ☜

꽃 지고 난 뒤
바람 속에 홀로 서서
씨를 키우고
씨를 날리는 꽃나무의 빈집

쓸쓸해도 자유로움
그 고요한 웃음으로
평화로운 빈 손으로

나도 모든 이에게
살뜰한 정 나누어주고
그 열매 익기 전에
떠날 수 있을까

만남보다
빨리 오는 이별 앞에
삶은 가끔 눈물겨워도
아름다웠다고 고백하는
해질 무렵 어느 날
애틋하게 물드는
내 가슴의 노을빛 빈집


☞ 상사화 ☜

아직 한 번도
당신을
직접 뵙진 못했군요

기다림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를
기다려보지 못한 이들은
잘 모릅니다

좋아하면서도
만나지 못하고
서로 어긋나는 안타까움을
어긋나보지 않은 이들은
잘 모릅니다

날마다 그리움으로 길어진 꽃술
내 분홍빛 애틋한 사랑은 언제까지 홀로여야 할까요?

오랜 세월
침묵 속에서
나는 당신께 말하는 법을 배웠고
어둠 속에서
위로 없이도 신뢰하는 법을
익혀왔습니다

죽어서라도 꼭
당신을 만나야지요
사랑은 죽음보다 강함을
오늘은 어제보다
더욱 믿으니까요


☞ 매화 앞에서 ☜

보이지 않기에
더욱 깊은
땅속 어둠
뿌리에서
줄기와 가지
꽃잎에 이르기까지
먼 길을 걸어온
어여쁜 봄이
마침내 여기 앉아 있네

뼛속 깊이 춥다고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가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하던
희디흰 봄햇살도
꽃잎 속에 접혀 있네

해마다
첫사랑의 애틋함으로
제일 먼저 매화 끝에
피어나는 나의 봄

눈 속에 묻어두었던
이별의 슬픔도
문득 새가 되어 날아오네
꽃나무 앞에 서면
갈 곳 없는 바람도
따스하여라

'살아갈수록 겨울은 길고
봄이 짧더라도 열심히 살 거란다
그래, 알고 있어
편하게만 살 순 없지
매화도 내게 그렇게 말했단다'
눈이 맑은 소꿉동무에게
오늘은 향기 나는 편지를 쓸까

매화는 기어이
보드라운 꽃술처럼 숨겨두려던
눈물 한 방울 내 가슴에 떨어뜨리네


☞ 춘분 일기 ☜

바람이 불 듯 말 듯
꽃이 필 듯 말 듯

해마다 3월 21일은
파밭의 흙 한 줌 찍어다가
내가 처음으로
시를 쓰는 날입니다

밤과 낮의 길이가
똑같다구요?

모든 이에게
골고루 사랑을 나누어주는
봄햇살 엄마가 되고 싶다고

춘분처럼
밤낮 길이 똑같아서 공평한
세상의 누이가 되고 싶다고
일기에 썼습니다

아직 겨울이 숨어 있는
꽃샘바람에
설레며 피어나는
내 마음의 춘란 한 송이

오늘따라
은은하고
어여쁩니다


☞ 봄까치꽃 ☜

까치가 놀러 나온
잔디밭 옆에서

가만히 나를 부르는
봄까치꽃

하도 작아서
눈에 먼저 띄는 꽃

어디 숨어 있었니?
언제 피었니?

반가워서 큰소리로
내가 말을 건네면

어떻게 대답할까
부끄러워
하늘색 얼굴이
더 얇아지는 꽃

잊었던 네 이름을 찾아
내가 기뻤던 봄

노래처럼 다시 불러보는
너, 봄까치꽃

잊혀져도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며
나도 너처럼
그렇게 살면 좋겠네


☞ 여름 일기 ☜

* 1 *

사람들은
나이 들면
고운 마음
어진 웃음
잃게 쉬운데
느티나무여

당신은 나이 들어도
어찌 그리 푸른 기품 잃지 않고
넉넉하게 아름다운지
나는 너무 부러워서
당신 그늘 아래
오래오래 앉아서
당신의 향기를 맡습니다.
조금이라도 당신을 닮고 싶어
시원한 그늘 떠날 줄을 모릅니다.

당신처럼 뿌리가 깊어 더 빛나는
시의 잎사귀를 달 수 있도록
나를 기다려주시시오.
당신처럼 뿌리 깊고 넓은 사랑을
나도 하고 싶습니다


* 2 *
사계절 중에
여름이 제일 좋다는
젊은 벗이여
나는 오늘
달고 맛있는
초록 수박 한 덩이
그대에게 보내며
시원한 여름을 가져봅니다

한창 진행중이라는
그대의 첫사랑도
이 수박처럼
물기 많고
싱싱하고
어떤 시련 중에도
모나지 않은 둥근 힘으로
끝까지 아름다울 수 있기를
해 아래 웃으며 기도합니다


* 3 *
바다가 그리운 여름날은
오이를 썰고
얼음을 띄워
미역 냉국을 해먹습니다

입 안에 가득 고여오는
비릿한 바다 내음과
하얀 파도소리에
나는 어느새 눈을 감고
해녀가 되어
시의 전복을 따러 갑니다


☞ 가을 편지 ☜

초록의 바다 위에
엎질러 놓은
저 황홀한 불빛의
세례성사

솔숲 사이로 빛나는
한 그루 단풍나무처럼
그대는 내 앞에 계십니다

푸름 속에 혼자 붉어
가을 내내
눈길을 주게 되는
단풍나무 한 그루처럼

나도 자꾸
그대를 향해 있는
눈부신 가을 오후


☞ 장미를 생각하며 ☜

우울한 날은
장미 한 송이 보고 싶네

장미 앞에서
소리내어 울면
나의 눈물에도 향기가 묻어날까

감당 못할 사랑의 기쁨으로
내내 앓고 있을 때
나의 눈을 환히 밝혀주던 장미를
잊지 못하네

내가 물 주고 가꾼 시간들이
겹겹의 무늬로 익어 있는 꽃잎들 사이로
길이 열리네

가시에 찔려 더욱 향기로웠던
나의 삶이
암호처럼 찍혀 있는
아름다운 장미 한 송이

'살아야 해, 살아야 해'
오늘도 내 마음에
불을 붙이네


☞ 석류의 말 ☜

감추려고
감추려고
애를 쓰는데도

어느새
살짝 빠져나오는
이 붉은 그리움은
제 탓이 아니에요

푸름으로
눈부신
가을 하늘 아래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서
터질 것 같은 가슴

이젠 부끄러워도
할 수 없네요

아직은
시고 떫은 채로
그대를 향해
터질 수밖에 없는

이 한 번의 사랑을
부디 아름답다고
말해주어요


☞ 다시 겨울 아침에 ☜

몸 마음
많이 아픈 사람들이
나에게 쏟아놓고 간 눈물이

내 안에 들어와
보석이 되느라고
밤새 뒤척이는
괴로운 신음소리

내가 듣고
내가 놀라
잠들지 못하네

힘들게 일어나
창문을 열면

나의 기침소리
알아듣는
작은 새 한 마리
나를 반기고

어떻게 살까
묻지 않아도

오늘은 희망이라고
깃을 치는 아침 인사에

나는 웃으며
하늘을 보네


☞ 말의 빛 ☜

쓰면 쓸수록 정드는 오래 된 말
닦을수록 빛을 내며 자라는
고운 우리 말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억지부리지 않아도
하늘에 절로 피는 노을 빛
나를 내어주려고
내가 타오르는 빛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언제나 부담없는
푸르른 소나무 빛
나를 키우려고
내가 싱그러워지는 빛

"용서하세요"라는 말은
부끄러워 스러지는
겸허한 반딧불 빛
나를 비우려고
내가 작아지는 빛


☞ 꽃밭에 서면 ☜

꽃밭에 서면 큰 소리로 꽈리를 불고 싶다
피리를 불 듯이
순결한 마음으로

꽈리 속의 잘디잔 씨알처럼
내 가슴에 가득 찬 근심 걱정
후련히 쏟아 내며
꽈리를 불고 싶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동그란 마음으로
꽃밭에 서면

저녁노을 바라보며
지는 꽃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고 싶다

남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나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받고 싶다

꽃들의 죄없는 웃음소리
붉게 타오르는
꽃밭에 서면


☞ 5월의 편지 ☜

해 아래 눈부신 5월의 나무들처럼

오늘도 키가 크고 마음이 크는 푸른 아이들아

이름을 부르는 순간부터

우리 마음 밭에 희망의 씨를 뿌리며

환히 웃어 주는 내일의 푸른 시인들아

너희가 기쁠 때엔 우리도 기쁘고

너희가 슬플 때엔 우리도 슬프단다

너희가 꿈을 꿀 땐 우리도 꿈을 꾸고

너희가 방황할 땐 우리도 길을 잃는단다

가끔은 세상이 원망스럽고 어른들이 미울 때라도

너희는 결코 어둠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지 말고

밝고, 지혜롭고, 꿋꿋하게 일어서다오

어리지만 든든한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 다오

한번뿐인 삶, 한번뿐인 젊음을 열심히 뛰자

아직 조금 시간이 있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마음에 하늘빛 창을 달자

너희를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에도

더 깊게, 더 푸르게 5월의 풀 물이 드는 거

너희는 알고 있니? 정말 사랑해


☞ 산 위에서 ☜

그 누구를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이 들 때
그 마음을 묻으려고 산에 오른다
산의 참 이야기는 산만이 알고
나의 참이야기는 나만이 아는것
세상에 사는 동안 다는 말 못할 일들을
사람은 저마다의 가슴속에 품고 산다
그 누구도 추측만으로 그 진실을
밝혀낼 수 없다
꼭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기 어려워 산에 오르면
산은 침묵으로 튼튼해진 그의 두 팔을 벌려
나를 안아준다
좀더 참을성을 키우라고 내 어깨를 두드린다.


☞ 산처럼 바다처럼 ☜

산을 좋아하는 친구야
초록의 나무들이
초록의 꿈 이야기를 솔솔 풀어내는
산에 오를 때 마다
나는 너에게 산을 주고 싶다
수많은 나무들을 키우며 묵묵한 산
한결 같은 산처럼 참고 기다리는 마음을
우리 함께 새롭히자.

바다를 좋아하는 친구야
밀물과 썰물이 때에 따라 움직이고
파도에 씻긴 조가비들이
사랑의 노래처럼 널려있는
바다에 나 갈 때 마다
나는 너에게 바다를 주고 싶다
모든 걸 받아안고 쏟아낼 줄 아는 바다
바다의 넉넉하고 지혜로운 마음을
우리 함께 배우자.

젊음 하나만으로도
나를 기쁨에 설레이게 하는
보고 싶은 친구야
선한 것 진실한 것 아름다운 것을
목말라하는 너를 위해
나는 오늘도 기도 한다
산의 깊은 마음과 바다의 어진 마음으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


☞ 살아 있는 날은 ☜

마른 향내 나는
갈색 연필을 깎아
글을 쓰겠습니다

사각사각 소리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깍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
어둠속에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 석류꽃 ☜

지울 수 없는
사랑의 火印
가슴에 찍혀

오늘도
달아오른
붉은 석류꽃

황홀하여라
끌 수 없는
사랑

초록의 잎새마다
불을 붙이며
꽃으로 타고 있네


☞ 선물의 집 ☜

사랑할 때 우리 마음은
바닥이 나지 않는 선물의 집
무엇을 줄까
어렵게 궁리하지 않아도
서로를 기쁘게 할 묘안이
끝없이 떠오르네

다른 이의 눈엔 더러
어리석게 보여도 개의치 않고
언어로, 사물로 사랑을 표현한다
마침내는 존재 자체로
선물이 되네, 서로에게

사랑할 때 우리 마음은
괴로움도 달콤한 선물의 집
이 집을 잘 지키라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 준 것이겠지?


☞ 수녀 1, 2. ☜

* 수녀 -1- *

누구의 아내도 아니면서

누구의 엄마도 아니면서

사랑하는 일에

목숨을 건 여인아

그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부끄러운 조바심을

평생의 혹처럼 안고 사는 여인아

표백된 빨래를 널다

앞치마에 가득 하늘을 담아

혼자서 들꽃처럼 웃어 보는 여인아

때로는 고독의 소금 광주리

머리에 이고

맨발로 흰 모래밭을

뛰어가는 여인아

누가 뭐래도

그와 함께 살아감으로

온 세상이 너의 것임을 잊지 말아라

모든 이가 네 형제임을 잊지 말아라



* 수녀 -2- *

크고 작은 독 속에

남모르게 익어 가는

간장 된장 고추장

때가 될 때까진

갑갑해도

숨어 살 줄 아네

수도원은

하나의 커다란 장독대

너도 나도 조용히

독 속에 내뿜는

저마다의 냄새와 빛

더러는 탄식하며

더러는 노래하며

제 맛을 낼때까진

어둠 속에 익고 있네

즐겁게 기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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