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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품

현대 단시조 편 (6)- 석야 신웅순

작성자신웅순|작성시간18.11.09|조회수693 목록 댓글 0

현대 단시조 편 (6)

 

 

 

석야 신웅순

지금도 시조의 갈래 명칭들이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다. ‘평시조, 엇시조, 사설시조’ 로 나누는가 하면 ‘평시조, 지름시조, 사설시조’로 나누기도 하고, ‘단시조(단형시조), 중시조(중형시조), 장시조(장형시조)’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원래 시조라는 명칭은 ‘시조’ 하나밖에 없는 음악적인 명칭이자 문학적인 명칭이었다.『삼죽금보(1864년,고종원년?)』에 시조에서 파생된 ‘소이시조’가 생겨나게 되자 원래의 ‘시조’라는 명칭을 그대로 쓸 수가 없어 원래의 ‘시조’ 가 ‘평시조’라는 명칭으로 쓰게 되었다. 그래서 평시조와 소이시조는 시조의 하위 분류가 된 것이다. 소이 시조는 지금의 지름시조에 해당된다. 평시조는 원래의 시조처럼 평평하게 부르고 소이시조는 지름시조로 처음부터 높게 질러서 부른다. 이후 리듬을 촘촘하게 엮어 부르는 사설시조가 생겨났다. 그래서 평시조, 지름시조, 사설시조가 음악적인 명칭으로 시조의 하위 분류가 된 것이다.

 

시조-평시조

지름시조(소이시조)

사설시조

 

그러나 시조가 부르는 창에서 읽고 짓는 시조로 바뀜에 따라 음악적인 시조의 분류 명칭을 문학적인 분류의 명칭으로 그대로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장르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시조의 문학적 분류는 ‘단시조, 중시조, 장시조’로 나누어진다. 단시조는 물론 3장 6구 12소절을 말하고 중시조와 장시조는 3장은 같되 어느 한 장이 조금 늘어난 것과 길게 늘어난 것을 말한다. 이 용어는 1932년 1월 23일부터 2월 4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가람 이병기 선생의 ‘시조는 혁신하자’라는 시조론 이후에 정립된 시조의 문학적인 분류이다. 그래서 시조의 분류를 말할 때는 음악적인 분류와 문학적인 분류로 나누어 부르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시조-단시조

중시조

장시조

 

지금도 평시조와 단시조를 같은 종류로 생각해 잘 못 사용하는 일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단시조를 갖고 평시조로 부를 수도 있고, 지름시조로도 부를 수 있으며 또 다른 형태의 시조창으로도 부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단시조를 평시조라는 용어로 사용할 수가 없다. 평시조는 음악적인 명칭이요 단시조는 문학적인 명칭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는 시조가 전통에서 멀어져 갔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조가 음악과 문학이 함께 존재해왔던 것이 1930년 대 이후 읽고 짓는 시조로 패러다임이 바뀌어 감에 따라 음악은 음악대로 문학은 문학대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 것이다.

가람 이병기 선생님은 짓는 시조, 읽는 시조를 강조한 나머지 부르는 시조와의 화해를 전혀 고려하지 않아 이런 문제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시조가 과거의 창의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연작의 문제인데 흔히 연시조라 부르는 옛시조들은 같은 제목이라도 ‘춘·하·추·동’, ‘아침·점심·저녁’이라든지, ‘수·석·송·죽·월’이라든지 각수의 소재나 의미들이 독립되어 있다. 그러던 것이 제목의 기능을 살리고 현대시 작법을 도입하여 여러 수가 따로 존재하면서도 통일되도록 짓자는 것이 가람 이병기 선생의 주장이었고 선생은 이런 주장을 창작으로 실천하여 완성했다. 이러한 연작 작법이 오늘날 시조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를 시조의 진화나 발전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시조의 전통적 연작법과는 어긋난다고도 볼 수 있다. 시조는 3장 6구 12 소절인 단시조가 시조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시조를 읽노라면 시조를 이렇게까지 길게 써야만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물론 복잡한 현실 사회를 담기 위해서는 주제에 맞는 이야기를 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시조는 우리만이 있는 우리만의 고유한 그릇에 담겨져야 한다. 시조는 시조답게 써야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이것이 전통 시조의 담백한 우리만의 멋과 맛이 아닐까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시조는 청자 같은 그릇이어서 청자빛 같은 색이어야하고, 백자 같은 그릇이어서 백자빛 같은 색이어야 한다고 또한 생각해보는 것이다.

 

오남매 가슴에 품고 주린 배 채워주시던

우리 어매 돌아가셔도 착한 밥 되셨는지

함박눈 봉긋이 담고 선영에 누워 계시네

- 손증호의 「고봉밥」

 

지난날 고봉 쌀밥 한그릇 제대로 먹는다는 것은 5, 60 년대에는 언감생심이었다. 당시엔 산아제한이라는 것이 없어 5남매, 7남매는 보통이었다. 대부분 먹는 데에만 급급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5남매를 가슴에 품고 주린 배를 채워주셨던 어머니. 어머니 무덤에 함박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소복하게 퍼주시고 싶었던 그런 고봉밥이다. 돌아가신 다음에도 오죽했으면 착한 밥이 되셨을까 싶다. 어머니는 봉긋이 담긴 하얀 고봉밥이 되어 이렇게 선영에다 차려주신 것이다.

얼마나 한이 되었길래 돌아가셨어도 5남매 걱정을 했을까. 이 추운 겨울 아이들이 배고플까 돌아가셨어도 하얀 고봉밥이 되신 어머니. 흰눈이 내린 무덤을 하얀 고봉밥으로 포착한 기막힌 명구이다.

시조는 이런 맛이어야한다. 말이 많으면 실수를 하게 되어 있다. 여기에 한 두 글자 덧붙이면 사족이 될 수 밖에 없다. 시조는 더도 말고 덜도 말아야한다. 여기에 어머니의 고봉밥이 놓여있다.

 

차마 다 말 할 수 없어

꽃잎으로 지는 그리움

 

누군가의 창가에

보랏빛 등을 켜면

 

허기진

그림자로 와서

가로눕는

그 이름

- 박연옥의 「익명이 시」

 

늦은 6유월이었을까. 등나무꽃 창가에 앉았나보다. 아마도 저녁이었을 성싶다. 꽃잎도 밀려오는 그리움을 어쩌지 못해 지는가보다. 그 지는 꽃잎을 시인은 말 못하고 그저 지켜만 보고 있다. 그리움에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님은 긴 그림자로 와서 그만 거기에서 쓰러지고 만다.

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밝히고 싶지 않은 익명의 시는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그리움이 무엇이길래 익명의 시로 와서 이리도 애를 태우는가.

금심수구. 한 올 한 올 흐트러짐이 없이 짜인 비단에 이런 절구를 남길 수 있는 시인, 이 익명의 붓질은 이리도 잡티가 하나도 없다. 꽃이 지는 모습을 시인은 차마볼 수가 없었나보다. 세상에 말없이 지는 것들이 어디 꽃만이고 세상에 차마 볼 수 없는 것들이 어찌 꽃만이랴. 그래서 시인은 시를 쓰는 것이다.

 

시장길 접어들면 우체통 하나 있지

괜시레 울먹이는 마음 하나 집어넣고

뒤돌아 뒤돌아서면 따라오는 그리움

- 안영희의 「그리움」

 

시장길 접어들면 거기 우체통 하나가 있다. 괜시리 울먹이는 마음 하나 집어넣고 뒤돌아 또 뒤돌아서면 그리움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다정도 병이련가 어떤 편지이길래 우체통 앞에서 울먹이어야하고 어떤 사연이길래 마음 하나 집어넣어여하고 어떤 추억이길래 되돌아서야만 하는가.

그날 밤 가을 달빛이 쏟아졌으리라. 귀뚜라미가 섬돌 밑에서 밤새도록 울어댔으리라. 밤새도록 달빛과 귀뚜라미만이 내 노래를 들어 줄 수 있고 내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었으리라.

자신이 자신의 그리움을 이겨낼 수 있는 시인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그 그리움을 줄 수도 누가 가지고 갈 수도 없다. 그래서 우체통에다 울먹이는 마음을 집어넣은 것인가. 그래도 따라오는 그리움을 어찌하는가. 이것이 시이고 시인이고 시인의 마음이다. 님이라는 사람은 종내도 그립고 그립고 그리운 것이다.

 

돋아난 이 가시로

너를 찌른 적은 없다

 

밟히지 않으려는 자존의 몸짓일 뿐

 

움츠려

죽은 척도 한다

 

산다는 게 그렇다

- 이광의 「고슴도치」

 

돋아난 이 가시로 찌른 적이 없는데 다만 밟히지 않으려는 자존의 몸짓일 뿐인데 움츠려 죽은 척도 하며 산다는 것이 다 그렇다는 것이다. 시조는 종장에서 바로 카운트 다운이 시작된다. ‘움추려 죽은 척도 한다. 산다는 것이 다 그렇다’는 이 말 한마디가 축포를 쏘아올렸다.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안개를 가까이에서 보는 것일까. 함박눈을 멀리서 보는 것일까. 새소리를 떨어져서 듣는 것일까. 물소리를 옆에서 듣는 것일까.

가시가 있어도 찌르지 않고 다만 밟히지 않으려는 자존심일뿐 움츠려 죽은 척도 해보는 것. 이렇게 우리는 살아왔다. 사람들 보고 뭐라 말하지 말라. 다 나름대로 살아가는 삶이 따로 있는 것이다. 경전이 따로 없다. 겸손하게 살아가는 이런 삶이 바로 경전이다.

 

그대,

이승의 땀내

바람에 씻으며

 

날개란 날개 죄 달고

세상너머로 날거라

 

잘 가라,

뒤돌아보지말고

여기 우리는 다

괜찮다

-이경옥의 「사십구제를 지내며」

 

산 이가 죽은 이에게 되돌아보지 말고 여기 우리는 다 괜찮으니 잘 가라고 부탁하고 있다. 사십구제 마지막 편지이다. 망자는 남은 식구들이 많이 걱정이 되었는가 그래서 되돌아보지 말라했나보다.

이승에서 얼마나 고생했길래 이승의 땀내라했고 바람에 씻고 가라 했을까. 이승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살고 싶었길래 날개란 날개 죄 달고 세상 너머로 날아가라 했을까. 여기는 괜찮으니 미련을 두지 말고 되돌아 보지도 말라했을까.

이승과 저승은 먼 것 같지만 그렇게 먼 것도 아니다. 자칫 잘 못 디디면 그 곳이 바로 저승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해야할 일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이 시조는 평범하지만 진솔한 메시지를 주고있다.

우리 선조들은 이 12마디를 만들어내는데 수백년이 걸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배가 아파서 낳은 시조이다. ‘더’라는 부사, 이 한마디는 시조에서는 사족이다. 만들기만 하면 노래가 저절로 흘러 나오는 그릇은 시조말고는 그 어디에도 없다.

 

기한을 넘긴 고지서 상냥히도 받아주던

여직원 혼자 앉아 점심을 들고 있다

반 남은 도시락 속에 무말랭이 같은 가을

- 이승은의 「사강우체국」

 

어느 가을날 점심시간에 우체국에 들렸나보다. 그 잠깐의 풍경을 스캔한 따뜻한 시조이다. 기한이 지난 고지서를 상냥히 받아주는 이 예쁜 여직원이 혼자서 점심을 들고 있다. 시인은 순간 반 남은 도시락 속의 무말랭이를 보았다. 숨막힐듯한 ‘무말랭이 같은 가을’의 빛나는 이 구절, 평생에 있을까 말까하는 절구를 얻었다. 평생 절구하나 얻지 못하고 죽은 시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무말랭이에서 어떻게 가을 햇살 같은 이 한 구절을 생각냈을까. 감탄할 수 밖에 없다. 맞다. 소소한 것들은 소소한 것들이 아니다. 소소한 것들이라 생각해 그냥 지나가는 것일뿐이다. 보석은 이런 소소한 것들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가을 햇살이 창가에서 이 보이지 않는 보석을 훔쳐보고 있다. 눈치 빠른 시인이 쥐도 새도 모르게 이 눈부신 보석을 훔쳐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서로를 제대로 눈 여겨 볼 틈도 없이

 

버겁고 숨 가쁘게

부대끼며 사는 동안

 

나뭇잎

한 장의 잎맥

섬세하게 뻗는다

- 이정환의 「그동안」

 

세상은 바쁘게 돌아간다. 서로를 제대로 눈 여겨 볼 틈도 없다. 우리는 버겁고 숨 가쁘게 부대끼며 살아간다. 그러나 어디선가 그동안 나뭇잎 한 장의 잎맥이 섬세하게 뻗고있다. 아무도 그 뻗어가는 잎맥을 보아주는 이가 없다. 시인은 이 한 장의 잎맥에서 하나의 경이를 보고 있다. 섬세하게 뻗어가는 잎맥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내는 알 바가 아니다. 다만 상대방은 나와는 무관하게 때로는 무심하게 갈 길을 가는 것이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잎맥이 뻗어가는 순간의 정지 화면이다. 시인은 그것을 보고 있다.

동과 정의 만남이랄까. 천년 후에나 만날 선시 같다. 우리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볼 수 있는 것을 못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을 진실이라고 말해두면 어떨까 싶다.

 

야산 먹바위 안고

외틀어 앉은 저 소나무

 

금강송 아니어도

은은한 향기 품어

 

절벽을 숨 쉬는 인생이

한 점 그림 아닌가

-전일희의 「앉은뱅이 소나무」

 

외틀어 앉은 저 앉은뱅이가 참선하고 있다. 야산 먹바위를 안고 참선하고 있다. 금강송은 아니어도 은은한 향기를 품고 있는 이 소나무의 수행. 온갖 풍상을 겪어온 노승의 자태일까. 세상은 어마어마한 절벽일지 모르겠다. 인생은 그 절벽을 숨 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삶이 한 점의 그림이라니 그보다 더 아름다운 삶이 어디에 있는가. 고통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인생, 그런 인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다 외틀어앉은 그런 삶을 살아오지 않았는가. 어쩌면 삶은 참선이고 수행일 수 밖에 없다.

가을도 막 중간을 넘어서고 있다. 조석으로 바람이 차다. 올 여름은 그렇게도 덮더니만 얼마나 지났다고 금세 또 춥다. 조금 있으면 낙엽이 질 것이다.

오늘은 아름다운 단수의 그림 몇 점을 얻어 감상했다. 행복했다.

 

-서예문인화,2018.11,89-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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