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기 초, 중국 대륙과 만주, 한반도에는 크고 작은 여러 왕조가 들어섰으나, 이후 송, 거란, 고려가 각 지역의 강력한 통일 왕조로 등장하여 동북 아시아 세계를 주도하는 다원적인 국제 질서가 형성되었다.
거란이 만리장성 이북 지역을 점령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가자, 옛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고려의 북진 정책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거란은 사신을 보내어 고려와 친교를 맺으려 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켰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야만의 나라로 여겨 이를 거절하였다.
한편, 송과 거란은 중국 대륙의 패권을 둘러싸고 대치하고 있었다. 거란은 고려가 송과 연합하는 것을 경계하였으며, 송은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와 관계 개선을 꾀하였다. 고려는 이러한 대륙의 정세를 이용하여 외교적으로 송과 관계를 맺고 거란을 견제하였다. 정종 때에는 광군(정종 2년(947)에 설치한 특수부대로, 설치 당시의 병력은 30만이었다.)을 조직하여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국경 지대에 성을 쌓는 등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거란의 원래 공격 목표는 송이었다. 그러나 먼저 배후 세력을 없애기 위하여 발해 유민이 세운 정안국을 정벌하고, 이어서 성종 때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여,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옛 고구려 땅을 내놓고 송과 교류를 끊을 것을 요구하였다(993).
이때, 고려 조정에서는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 주고 화평을 맺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외교 담판에 나선 서희는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과 교류할 것을 약속하는 대신,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압록강 동쪽의 280리 지역인 강동 6주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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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이 지역의 여진족을 몰아 내고 6성을 쌓아 고려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강동 6주를 회복하였고,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대하였다. 거란은 나중에 이 지역이 전략의 요충지임을 알고 반환을 요구했으나 고려는 거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