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조의제문을 지은 김종직 답①
사화와 관련한 문제도 자주 출제되는 문제이니 잘 알아두세요.
문제에 제시된 자료는 조선 성종 때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입니다.
조의제문은 초나라 의제와 그를 죽인 패왕 항우의 이야기를 어린 단종과 수양대군(훗날 세조)의 이야기에 비유해, 결국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할 것을 비판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 제자인 김일손이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이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렸는데, 이를 발견한 훈구 세력 이극돈은 이것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고 왕위를 물려받은 예종, 성종, 연산군의 왕권 정통성 마저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한 후 유자광 등과 협의하여 김종직과 김일손 등이 역모를 꾀했다고 연산군에게 보고합니다.
결국 이것이 빌미가 되어 죽은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며, 김일손, 권오복 등 많은 제자가 죽음을 당하였는데, 이것이 무오사화(1498)입니다.
그러나 무오사화의 직접적인 배경은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 세력들이 주로 3사 언관직에 진출하여 훈구 세력을 비판하자 훈구 세력이 사림 세력을 제거하고자 했던 이유에서 나타났던 사건이죠.
① 김종직은 길재 이후 영남학파의 종조이며, 문하생으로는 정여창(후일 5현으로 문묘에 배향) ·김굉필(후일 5현으로 문
묘에 배향) ·김일손(후일 사관으로 무오사화와 관련됨) ·유호인 ·남효온 등이 있습니다.
특히, 김굉필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조광
조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던 인물입니다.
② 김종직(1431~92) 당시 서원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서원은 중종 때인 1543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을 세운 것이 최초입니다.
③ <동국사략>은 1402년(태종 2) 권근, 하륜, 이첨 등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습니다.
단군조선~삼국 시대까지의 역사를 편년체, 강목체, 사론 형식으로 다루었으며, 신라 중심적 서술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④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다 죽임을 당한 인물들은 사육신이죠.
사육신은 성상문, 박팽년, 유응부, 유성원, 이개, 김문기(1982년 추가)입니다.
⑤ 조광조의 개혁의 내용입니다.
조광조는 경연의 강화, 언론 활동의 활성화, 위훈(僞勳) 삭제, 소격서의 폐지, 소학의 보급, 향약의 보급, 내수사 장리
폐지, 방납의 폐단 시정 등의 혁신 정치를 폈죠.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 사화(士禍)
① 사화(士禍) : 성종 대 이후 중앙 정계에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사림 세력과 기존 세력인 훈구의 대립
각 사화마다 일어난 원인은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사림이 피해를 입음
② 4대 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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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원인 |
가해자 |
피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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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 (연산군4, 1498) |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린 것을 빌미로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한 사건 → 향사례․향음주례 주관했던 기구 혁파, 영남 사림 몰락 |
유자광, 이극돈 |
김종직, 김일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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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사화 (연산군10, 1504) |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 폐출 사건과 관련된 훈구와 사림을 제거한 사건 → 영남 사림의 몰락 |
연산군, 임사홍 |
윤필상, 김굉필, 정여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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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사화 (중종14, 1519) |
중종반정을 통해 등극한 중종은 훈구 세력 견제와 유교 도덕 정치 회복을 통한 정치 기강 확립을 위해 조광조 등 사림 대거 등용 → 사림의 삼사 언관직 진출, 공론 강화을 통해 훈구 대신을 비판하고 왕도 정치 이상을 내세워 급진적 개혁 요구 → 조광조의 혁신 정치, 위훈(위훈) 삭제에 불만을 갖은 훈구 세력이 조광조 일파를 제거 →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의 몰락 |
남곤, 심정, 홍경주 |
조광조, 김안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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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사화 (명종1, 1545) |
훈구 대신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등용 → 왕세자(대윤, 인종-장경왕후-윤임)측과 경원대군(소윤, 명종-문정왕후-윤원형)측 대립 → 윤원형 일파인 소윤이 윤임 일파인 대윤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 → 왕위 승계를 둘러싼 외척 간의 갈등, 양측에 모두 사림이 가담했다는 점에서 종래의 사화와 양상이 다름 |
윤원형, 정순명, 김명윤 등 소윤파 |
윤임, 이언적 등 대윤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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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의 혁신 정치 개혁 ∘ 현량과(賢良科)의 실시 : 능력있는 자를 국왕이 추천에 의거 직접 등용(과거제 ×) → 사림의 등용 확대 ∘ 향촌 자치의 강화 : 향약의 시행 (최초) ∘ 삼사 언관직 진출, 공론 강화 → 훈구 대신을 비판하고 ‘왕도 정치’ 이상을 내세워 급진적 개혁 요구 ∘ 위훈 삭제의 시도 : 반정 공신(훈구세력)들의 토지와 노비의 삭감을 시도 ∘ 불교와 도교 관련 행사의 폐지 : 소격서 등을 폐지 ∘ 소학 교육의 장려 : 성리학적 사회 질서 강화 ∘ 수미법을 주장 ∘ 경연의 강화와 언론 활동의 활성화 추진 |
■ 유사 기출문제 더풀기
2회 1급 20번 문제
문제해설
이 문제는 4대 사화(士禍)와 관련한 사료를 자료로 주고 이를 시기 순으로 파악하는 문제네요.
이러한 유형도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는 자주 출제되는 문제입니다.
사료의 특정 개념들을 통해 어떤 사화와 관련한 사료인지 먼저 파악하고,
이 사료들을 시기순으로 연결해 봅시다.
(가)는 '항적이 의제를 시해한 일'이라는 내용으로 이는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관련된 사료입니다.
조의제문과 연관되어 일어난 사화는 무오사화(1498)입니다.
(나)는 세조 때의 공신인 한명회 등까지 처벌되는 것으로 보아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문제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갑자
사화(1504)와 관련한 내용입니다.
(다)는 조광조 등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기묘사화(1519)임을 알 수 있어요.
(라)는 윤임의 등장으로 보아 을사사화(1545)입니다.
을사사화는 외척인 윤임, 윤원형이 대윤과 소윤으로 나뉘어 대립할 때 사림이 관련되어 화를 입은 사건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가)-(나)-(다)-(라)로 연결된 ①번입니다.
4회 고급 29번 문제
29. 무오사화 답⑤
이 문제에 주어진 자료를 보면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 죽은 김종직은 부관첨시를 당하고, 김일손, 권오복 등이 능지처사 당하는 내용이네요.
그럼 이것이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1494)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죠?
15세기 중반 이후, 중소 지주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리학에 투철한 지방 사족이 영남과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는데, 이들을 사림이라 부릅니다. 이들은 훈구 세력이 중앙 집권 체제를 강조한 데 비해, 향촌 자치를 내세우며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강조하였습니다.
향촌 사회에서 지위를 굳히던 사림은 김종직과 그 문인이 성종 때에 중앙에 진출하면서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죠. 과거를 통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림 세력은 주로 전랑과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림 세력을 중용하였기 때문에,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이 균형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종을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훈구 대신과 사림을 모두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폅니다. 이 과정에서 특히, 3사 언관직을 차지한 사림 세력의 분방한 언론 활동을 억제하죠. 결국 연산군과 유자광, 이극돈 등의 훈구 세력은 대간과 그들을 지지하는 사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김일손이 실록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초(史草)을 문제 삼아 김일손, 김굉필 등 신진 사림을 대거 처형하였는데 이것이 무오사화입니다.
사림들은 연산군 때 두차례에 걸친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를 겪으면서 영남 사림의 대부분이 몰락하게 되죠.
① 붕당은 사화를 겪고 난 후 향촌 사회를 바탕으로 성장한 사림이 중앙 정계를 장악하면서 발생하였습니다.
② 예송 논쟁은 사림이 중앙 정계를 장악한 후 붕당 정치의 과정에서 일어난 서인과 남인 간의 논쟁입니다.
③ 국가의 기본법전은 경국대전으로 이와는 무관합니다.
④ 사화를 통해서는 사림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0회 고급 30번 문제
문제해설
대화를 통해 볼 때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 일어난 사건임을 알 수 있죠.....
조의제문하면 김종직......그리고 이로 인해 사림들이 화를 입었던 사화, 즉 무오사화(연산군4, 1498)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무오사화는 김일손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로 올린 것을 빌미 삼아 훈구파가 사림파를 공격, 제거한 사건이죠.
①, ③ 기묘사화, ④ 을사사화, ⑤ 갑자사화에 해당하는 설명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12회 고급 17번 문제
문제해설
(가)와 (나) 사건을 파악하는 것도 힘든데,
(가)와 (나) 사건 사이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찾으라니 이런 문제는 정말 어렵게 느껴지지요?
그래서 3점 배점의 문제입니다.
(가)는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문제삼고 있네요.
연산군 때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 사림들이 화를 입은 사건은 무오사화(1498)입니다.
(가) 자료가 조선 후기에 쓰여진 연려실기술에 쓰여진 내용이니 조선 후기의 사건인가...하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나)는 대윤, 소윤, 윤원형이 등장하는 사건으로 보아 명종 때 일어난 을사사화(1545)입니다.
따라서 1498~1545년, 무오사화~을사사화 사이에 있었던 사실을 찾으면 되겠네요.
어렵지요?
(가)와 (나) 사건을 알고 있으면 (가)~(나) 사이에 들어갈 역사적 사실로 ㄴ은 해당되고 ㄷ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 것입니다. ㄷ은 붕당 형성을 의미하므로 붕당은 사화가 끝난 뒤 형성되었다는 것 정도는 알테니까요?
그래도 ㄱ, ㄹ은 확실히 아시는 분이 많지 않을테니 ①번과 ④번 중에 하나를 찍을 수밖에 없겠지요?
만약 시험에 이런 문제가 출제될 경우 틀린다고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푸세요.... ^^;
ㄱ - 유향소는 지방 자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기구였어요.
그래서 중앙집권을 강조한 태종과 세조는 유향소를 폐지하는 조치를 내리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태종 때 유향소 폐지 조치(1417)는 세종 때(1428년), 세조 때 유향소 폐지 조치(1467)는 성종 때(1488)에
복립됩니다.
ㄴ - 현량과를 통한 사림 세력의 대거 등용은 중종 때 등용된 조광조가 실시한 정책입니다.
조광조는 현량과 실시, 향약 시행, 소학 교육 장려 등의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어요.
하지만 급진적 개혁 정책, 삭훈 문제 등으로 훈구 세력의 반발을 사 결국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이 제거되는데,
이를 기묘사화(1519)라고 합니다.
ㄷ - 이이와 성혼의 무리들이 서인에 가담하였다는 것은 붕당의 형성을 의미하지요?
붕당은 선조 때인 16세기 후반에 성립됩니다.
ㄹ - 신언패(愼言牌)란 연산군 때 조정 관리들에게 차게 한, 일종의 말조심 패입니다.
연산군은 조정에 드나드는 관리들에게
"입은 화근의 문이요(口是禍之門)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라(舌是斬身刀)
입을 다물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閉口深藏舌)
몸이 어느 곳에 있던지 편안하리라(安身處處牢)."라는 문구가 적힌 신언패를 목에 차고 다니도록 했습니다(1504).
오늘날로 치면 언론 탄압 조치였지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ㄹ로 묶인 ④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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