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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무렵에” 서재경 목사 (2026. 6. 7. 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

작성자김윤식(한민교회)|작성시간26.06.07|조회수57 목록 댓글 0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무렵에

─ 룻기 1장 16-22절, 마태복음 1장 1-6절

 

그들이 베들레헴에 이르렀을 때는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무렵이었다.(룻기 1장 22절)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 저녁노을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예전에 이맘때쯤이면, 길을 걷다가 흥얼거리곤 했던 ‘보리밭’이라는 가곡의 노랫말입니다. 우리 조 목사님이 한번 불러주시면, 아마 우리 중 절반 정도는 단박에 추억 속으로 손잡고 달려가겠지요. 예전에는 보리밭이 흔하게 가까이 있었습니다. 정월 보름이 지나면 아이들은 겨우내 얼어서 들떴던 보리밭을 밟아주었지요. 봄이면 파릇한 보리싹을 잘라서 나물로 먹기도 했습니다. 유월 초여름이면 어느새 보리 이삭이 패고, 누렇게 익어가기 시작했지요. 산들바람에 보리밭은 온통 금빛으로 출렁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 보리는 참 중요했습니다. 쌀이 다 떨어지고, 먹을 게 없어서 草根木皮로 견뎌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리는 그야말로 일용할 양식이었지요. 늘 배고픈 아이들은 여물지도 않은 이삭을 불에 구워 먹고, 시커먼 깜부기도 비벼 먹었습니다. 입술이 꺼멓게 되었지요. 보리타작 후에는 보리밥이 주식이었습니다. 요즘은 보리밥이 별미라지만, 그땐 깔깔하고 잘 씹히지 않아서, 아이들에게는 고역이었지요. 보리는 그렇게 봄과 가을 사이를 이어주는 고마운 곡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보리밭에는 배고픈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노고지리 높이 떠 지저귀는 보리밭은, 아이들에게는 숨바꼭질 놀이터였지요. 보릿대 풀피리로 동네 처녀 꾀어내려는 총각들에게는 낭만의 데이트 장소였고, 추수 때가 되면 온 동네 사람들의 흥겨운 잔치 마당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보리밭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열린 마당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룻기에서, 룻이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에 돌아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두 여인이 베들레헴에 돌아왔을 때는 ‘보리를 거두어들이기 시작할 때’였지요. 그런데 여기서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때’라는 이 말, 이 말은 그냥 무심히 지나치듯 하는 敍事가 아닙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룻기’를 완벽한 문학작품이라고 했지요.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슬쩍 내비친 이 ‘보리밭’은, 룻 이야기를 공연하는 무대와도 같습니다. 룻 이야기는 보리밭에서 시작해서 보리밭에서 끝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룻기’를 좀 문학적인 제목으로 바꿔본다면, ‘보리밭 연가’라고 해도 괜찮을 듯합니다. 

룻 이야기는 비극적 서사로 시작합니다. 정말 참담한 불행이 줄지어 닥쳐오는데, 룻기는 그저 담담하게 서술하지요.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어서, 한 남자가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떠났습니다. 남자는 엘리멜렉(나의 하나님은 왕)이고, 아내는 나오미(기쁨)입니다. 선남선녀 이름이지요. 그런데 두 아들은 말룐(질병)과 기룐(황폐)입니다. 이거 뭔가 불길합니다. 그렇게 네 식구가 모압에서 살다가 가장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두 아들을 모압 여자와 결혼시켰지요. 그 며느리들이 룻(친구)과 오르바(뒤)였습니다. 그렇게 십 년쯤 살았는데, 그만 두 아들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낯선 타향에 아무런 의지가지없는 세 과부만 남은 것입니다. 얼마나 막막하고 얼마나 황망했을까요?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마침 고향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오미는 다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며느리들은 어차피 자식도 없으니, 각각 제집으로 돌려보내야 맞겠지요. 그래서 오르바는 ‘뒤’라는 이름 그대로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룻은 ‘친구’라는 그 이름대로, 기어이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何必, 그때가 바로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나오미와 룻이 고향에 돌아오자, 온 동네가 다 떠들썩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10년 넘게 객지를 떠돌다가 남편도 아들들도 다 잃고, 게다가 웬 이방인 며느리를 달고 돌아온 나오미의 몰골이 어땠겠습니까? 이게 정말 나오미 맞냐고 기함하는 사람들에게, 나오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나오미(기쁨)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이제는 나를 마라(괴로움, 쓰다)라고 부르십시오.” 마라! 쓴 쑥과 같은 괴로움! 이것이 나오미의 비참한 현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나오미는 자신을 이토록 괴롭게 하신 이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라고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하셨으니, 전능하신 분이 나를 불행하게 하셨으니, 그러니 어떻게 어디로 피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그 불행 중에 하나 다행이라면, 이 괴로움을 함께 할 친구, 룻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사실 생각해 보면, 룻 역시 나오미 못지않게 괴롭고 불행한 여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청상과부로 낯선 땅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하는 룻은, 얼마나 불안하고 얼마나 고단했겠습니까? 이 세상 팔자 사나운 쌍 과부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런데 때마침 보리가 익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룻은 일어나서 보리밭으로 나갔습니다. 보리밭은 가난한 이방 여인 과부에게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보리를 추수하면서, 땅에 떨어진 이삭은 줍지 않고 남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은 과부와 고아와 떠돌이의 몫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지요. 보리밭으로 나간 룻은 일꾼들을 멀찍이 따라다니며 이삭을 주웠습니다. 젊은 과부가 보리를 줍는 것은 여러 가지로 위험한 일이었지요.

그런데 그 밭이, 우연히도,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시아버지 아비멜렉과 같은 집안사람이었지요. 보아스는 자기 보리밭에서 이삭을 줍는 여인이 나오미를 따라온 모압 여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룻을 안쓰럽게 여긴 보아스는 다른 밭으로 가지 말고 자기 밭에서 주우라고 했지요. 일꾼들에게는 룻을 건드리지 말라고 단단히 이르고는, 물도 주고, 빵도 주고, 볶은 곡식도 내주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일꾼들에게 아예 곡식단에서 뽑아서 흘려주라고 했습니다. 이거 뭔가 수작 부리는 것 같지요?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댁이 주 하나님의 날개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 그분께서/하나님께서 댁에게 넉넉히 갚아주실 것이오.”(2장 12절) 보아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의 따뜻한 배려로, 룻은 저녁때까지 땅 짚고 헤엄치기로 이삭을 주웠습니다. 얼마나 주웠을까요? 한 에바, 두 말 가까이 되는, 상당히 많은 양입니다.

저녁이 되어 룻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시어머니에게 주워온 보리를 보여드렸지요. 온종일 피죽도 못 얻어먹을 줄 알았는데, 배불리 먹고 남긴 볶은 곡식도 꺼냈습니다. 이거 좀 뭔가 촉이 이상하지요? 나오미는 룻에게 어디서 주웠느냐고 물었지요. 룻은 자초지종을 이실직고했습니다. 보아스의 밭에서 주웠는데, 물도 주고 빵도 주고 볶은 곡식도 주고, 아예 단에서 빼내 흘려주고, 추수 끝날 때까지 계속 오라 했다는 것입니다. 룻의 말을 듣고 나오미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놈 뭔가 수상쩍으니, 절대 그 보리밭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말라고, 호되게 며느리 잡도리를 했겠지요? 아닙니다. 

나오미는 룻을 목욕 단장시켰습니다. 향수까지 발라주고, 고운 옷을 입혀서, 다시 보아스의 타작마당으로 보내며 단단히 일렀지요.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잠자리에 들면 발치를 들추고 누우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뒤로는 다 알아서 AI 콤보로 전자동이라네요. 이거 돈 많고 어리숭한 사내 등치고 간 빼내려는 姑婦 사기단의 간계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당시에는 레비리트(levirate)라는 법이 있었습니다.(신 25:5) 형이 아들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 대를 잇게 하는 법이지요. 가문을 지키고 땅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생긴 법입니다. 동생이 없으면,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 의무를 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나오미는 같은 집안사람인 보아스를 통해 대를 이으려는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지엄하신 분부대로, 보아스가 잠자리에 들기를 기다렸다가, 몰래 발치를 들고 들어가 누웠습니다. 잠들었던 보아스가 한밤중에 으스스 추워 돌아눕다가 룻을 발견했지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시어머니 말씀대로 진도가 잘 나갔을까요? 아닙니다. 신중한 사람이었던 보아스는 룻을 떳떳한 아내로 맞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보아스는 룻에게 보리를 여섯 번 되어서 이어주고는, 해 뜨기 전에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구설에 오르지 않게 룻을 지켜주려는 것이었지요. 그렇게 하고 나서, 보아스는 성읍으로 들어갔습니다. 문제의 그 친족을 만나서, 성읍 원로 열 사람을 증인으로 세우고 담판을 지으려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그 친족에게 죽은 엘레멜렉의 밭을 사서 법적 책임을 다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친족은 괜히 모압 여인까지 떠안았다가 재산만 축나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보아스에게 자기 신발을 벗어 증표로 주면서 책임을 넘겼습니다. 보아스는 성문 회관에서 열 명의 원로 증인 앞에서 친족의 권리와 의무를 이어받고, 룻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룻은 보아스의 아들을 낳아 나오미의 품에 안겨주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이웃 여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며느리, 아들 일곱보다도 더 나은 며느리가 아기를 낳아주었다!”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다!” 그 아기의 이름은 오벳(섬기는 자)이었습니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룻 이야기는 悲劇으로 시작되었지만, 그래도 그 끝은 해피 엔딩이었습니다. 참 다행이지요? 룻 이야기는 불과 넉 장으로 짧기도 하지만, 이야기 전개도 빠르고, 흥미로운 연애 사건까지 있어서, 요즘 말로 시간 瞬削입니다.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지요. 그런데 정말 궁금합니다. 이 지극히 사적이고, 또 세속적인 이야기가 왜 어째서 聖書에 들어온 것일까요? 더구나 룻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이 부정하다고 혐오하는 이방인, 게다가 여인 아닙니까? 이 모압 여인의 이름을 버젓이 제목으로 내건 책이 어떻게 성서가 될 수 있을까요? 백번 양보해서, 그래도 룻이 나오미를 따라 낯선 땅에 와서 지극정성으로 섬겼으니, 그것을 가상하게 여겨서, 그냥 별책 부록 정도로 끼워주면, 그것만으로도 백골난망이 아닐까요? 그러나 아닙니다. 룻기는 당당하게 聖書에 들어와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성서로서 룻기가 말하려는 것, 룻기가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룻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겠습니까?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도 오르바처럼 뒤로 가지 말고 시어머니를 따라라, 시어머니가 말씀하시면 이불 속이라도 들어가라, 뭐 그런 지극한 효와 순종일까요? 물론, 룻기에는 참 애틋하고 따뜻한 人情이 있고, 약자에 대한 配慮와 憐愍이 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의 맛이 보리 내음처럼 구수하게 풍겨오지요. 모두 참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룻기가 진짜 말하려는 것은, 그런 人之常情의 덕목들만이 아닙니다. 룻기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을 보여주려 합니다. 룻기는 오벳의 출생으로 마무리되지요. 그런데 룻기는 그 마지막에서, 나오미가 오벳을 안고 있는 그 장면을 더 넓히고 더 크게 확장해서, 위로는 6대에 아래로는 2대까지, 그 가문의 계보를 보여줍니다. 이 계보를 보면, 룻이 낳은 오벳은 누구입니까?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룻은 다윗의 할아버지를 낳았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연약하고 가련한 이방 여인이 없었다면, 그랬다면 다윗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 이방 여인 룻이 이스라엘의 왕조를 잇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잇는 역사적 소명을 이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이방 여인의 고단한 삶을 통해서 다윗 왕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런데 성서를 더 크게 더 넓혀서 보면, 룻의 역할은 다윗 왕을 예비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신약성서의 첫 복음서 마태복음은 한 계보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의 선조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계보입니다. 이 계보는 다윗에게까지 이어지고, 다윗 이후로도 스물여덟 대에 이르록 계속됩니다. 그런데 이 계보의 끝에는 누가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한 가련한 이방 여인 룻이 아들을 낳은 그 사건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사건이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잇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역사를 잇는 거룩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세속적인 인간의 사건을 통해서 놀랍게도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한 가련한 이방 여인의 고단한 삶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루시고, 그것을 넘어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가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방 여인 룻을 통해서 다윗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뿐 아니지요. 놀랍게도 하나님은 마침내 약속하신 메시아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습니다. 룻이 어떻게 그 놀라운 비밀을 알 수나 있었겠습니까? 룻은 그 무슨 대단한 역사를 이룬다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 하나 지키기도 버거운 고단한 삶이었지요. 그러나 룻은 포기하거나 함부로 살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께서는 룻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셨습니다. 사람은 자기 할 바를 다할 뿐, 이루시는 분은 오직 다만 하나님이십니다.

어쩌면 우리도 세상에 살아가면서 룻과 나오미처럼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때로는 너무 괴롭다고,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히신다고 절망하고 탄식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룻기는 우리가 고통스러울 때, 그때도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함께하셔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가신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우리가 때로 ‘마라’처럼 쓰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지라도, 우리가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하며, 서로 존중하고 위로하고 사랑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작은 자들의 고단한 삶을 통해서 놀랍고 거룩한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가 오늘 우리의 보리밭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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