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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설교문]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무렵에” 조태영 목사 (2026. 6. 14. 성령강림 후 셋째 주일)

작성자김윤식(한민교회)|작성시간26.06.14|조회수47 목록 댓글 0

2026. 6. 14. 성령강림 후 셋째 주일

예배시편/시편 85 : 10 – 12
찬송/507 주님의 마음을 본 받는 자
성서/ 신명기 5장 7~10절, 에베소서 2장 11~18절
말씀/ 나 우리의 대화와 소통의 자리

 

 

 

 

 

 

6.15남북공동선언이 내일로 16주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새 밀레니엄이 열린 2000년, 그해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고, 15일에 남북의 두 정상이 공동선언을 했습니다. 그것은 새 밀레니엄의 상징처럼 터진 역사적인 일대 사건이었지요. 그야말로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고, 문자 그대로 경천동지한 사건이었지요. 저도 그때 온몸이 전율하는 충격과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돌아보면 꿈 같고, 아스라한 기억 속의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그 꿈의 한 자락을 붙잡고 다시 꿈을 꾸고, 그 기억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흐릿하지만 여전히 꿈의 미래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6.15남북공동선언은 한반도의 긴장 완화뿐 아니라 세계의 평화를 증진시킨 성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 공적으로 노벨위원회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그해 노벨평화상을 수여하였지요. 6.15남북공동선언은 남북 정상이 평화 통일의 방안을 민족에게 제시한 획기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이 선언에서 남과 북은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할 것을 선언하였고,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였습니다. 이산가족과 비전향 장기수 문제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기로 하였고, 경제 협력을 비롯한 교류 활성화를 선언하였지요. 이 선언은 91년 12월에 채택한 남북기본합의를 크게 진전시킨 것이었습니다. 

91년의 기본합는 남과 북이 서로를 주권국가로 인정한다는 것, 그리고 남북 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관계”로 둔다는 것, 마지막으로 남과 북이 평화 통일을 성취하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경주하기로 다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통일 지향의 기본 원칙을 원론적으로 천명한 것이었지요. 6.15선언은 거기서 한 단계 더 나가서 통일의 방법과 과정상의 원칙을 천명하고, 구체적으로 실행할 현안들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오랫동안 닫혀 있던 남북 교류와 협력의 문이 급속하게 열리기 시작했지요. 

이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 1001 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넘는 극적인 방북 행사가 있었습니다. 김대중 정부 출범 4개월만이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 바닷길이 열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습니다. 6.15선언 후에는 이산가족 상봉이 연례화 되어 그해 8.15 광복절에 1차 상봉이 이루어졌고, 그 이후 노무현 정부 시절까지 매년 두 차례씩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습니다. 2003년에는 육로도 열려 금강산 관광 등 북한 관광이 활발해졌지요. 2003년에 개성공단이 착공되었고, 2004년부터 공단이 가동되었습니다. 꿈 같은 일들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이 시기는 평화가 상승한 시기였습니다. 남북 교류와 협력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분단의 빗장이 많이 풀렸지요. 그러나 이후 보수정부가 들어선 10년 동안 남북 관계는 적대 관계로 급반전하여 교류와 협력이 곤두박질치다가 끝내 완전히 단절되었지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대화와 교류 협력을 복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북미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남북 관계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후 윤석열 정부 2년은 대북 적대가 최악으로 치달아서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로까지 갔지요. 미치광이처럼 치닫는 극단적 적대 행위에 대하여 북의 정부는 “한 민족 안의 특수관계”라는 남북 관계의 기본합의를 일방적으로 폐기해버리고,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변경하는 등, 초극단적으로 반응하였습니다. 헌법을 개정하여 남과 북을 적대적 두 국가로 못박았고, 통일 조항을 아예 삭제해버렸습니다. 남북 대화와 교류가 시작된 이래 통일의 길에 최악의 장애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지난 시기의 남북 간 평화와 교류 협력은 진정성 있는 대화와 소통으로 얻어낸 소중한 결실이었지요. 그런데 지금까지 진행해 왔던 남북 간 대화의 대전제가 폐기되었고, 남아 있었던 가느다란 소통의 통로마저 폭파되고, 교류의 문이 못질 되어버린 현 상태에서 앞으로 어떻게 대화하고, 어떻게 소통하고 교류할지 걱정이 많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명과 평화, 화해와 일치를 위한 새로운 소통의 길이 어떻게 해야 다시 열릴 수 있을지, 분단을 해소하고 통일을 이룰 새로운 대화의 방도가 무엇일지 가늠하기 어려운 암담한 지경에 처했습니다. 분열되고 파손된 ‘삶의 온전함’을 회복하는 길이 대화와 소통이지요. 그것이 평화 통일의 길이라면 아무리 암담하더라도 다시 길을 닦고, 새로운 문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문제의 근원으로 돌아가 성찰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과 북의 이념의 분열과 체제의 분단은 근원적으로 아집과 탐욕에서 생긴 것이지요. 자기 이념과 체제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는 아집, 자기 이념과 체제로 전체를 차지하고 지배하겠다는 탐욕입니다. 아집의 본질은 자기 중심성입니다. 자기가 중심이 되겠다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 자기를 내놓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마지막은 자기를 하나님 대신 전체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이지요. 존재 자체인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기가 하나님 존재 안에 있음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 탐욕은 궁극적으로 자기가 전체가 되기를 탐하는 욕망입니다. 탐심은 결국 하나님의 존재를 탐내고, 하나님의 것을 탐내는 욕심이지요. 하나님이 만민에게 주신 것을 자기가 차지하고 사유화하려는 욕심, 내가 전체를 차지하겠다는 욕심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만민이 공유해야 할 공유물을 자기가 차지하여 사유물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남과 북 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전제적 지배자들이 그러한 아집과 탐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분열과 분단의 막다른 길목에서 단절과 경색을 해소하고, 대화와 소통을 회복하는 길이 어디에서 다시 시작될 수 있을까요? ‘먼저 본 사람들’이 자신부터 탐욕을 버리고 아집을 내려놓고 자기를 비우는 것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먼저 들은 사람들’이 자신부터 아집과 탐욕을 비워 자기가 공空하고 무無하게 되는 자리에 서야할 것입니다. 그 자리가 대화와 교류가 일어나는 자리이지요. 거기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소통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자리가 자유와 평등이 서로 수렴하고 일치를 이루는 자리입니다. 거기에서 평화와 통일이 시작되지요. 그 공空과 무無, 비움의 자리가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거기에 세워지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이지요. 

이념과 체제에 대한 아집과 그 동기인 탐욕이 남과 북에서 각자의 이념과 체제를 우상으로 만들었고, 지금도 만들고 있습니다. 이 거짓 신들이 ‘사로잡힌 자들’을 움직여 하나님의 자리에 이념과 체제의 우상을 세우게 하고, 그것들을 숭배하게 하고, 그것들에게 제물을 바치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우상들을 무너뜨리고 우상숭배를 폐지하기 위해 자기를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집착과 일체의 탐심을 비우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요. 자기를 고스란히 비워 공空하고 무無하게 되셨습니다. 그러한 자신을 십자가 위에 올려놓으셨습니다. 자신이 순결한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 제단에서 죽임을 당하고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은 모든 담을 십자가로 무너뜨리셨습니다. 닫힌 문을 열고, 끊어진 길을 이어서 다시 개통시키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대화와 소통의 문을 활짝 열고, 민족과 나라들 사이의 교류와 교통의 대로를 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움의 자리, 십자가의 공空하고 무無한 자리가 소통과 교류의 통로가 되고 대화의 광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대화하실까요? 예수님은 어느 누구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먼저 아버지와 대화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어떻게 대화하실까요? 예수님은 먼저 들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오직 아버지께 들은 것을 말한다고 하십니다(요5:19, 30, 7:16) 그런데 아들인 예수님만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말씀하시고, 다시 아들을 통하여 당신의 말씀을 들으십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아버지께 돌려드리는 것이지요. 아버지로부터 나간 말씀이 아들에게서 메아리쳐 돌아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이 하신 말씀을 아들을 통하여 되돌려 듣는 내적 순환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삼위일체에서 일어나는 대화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도 같은 공명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 안에서도 삼위일체의 내적 순환이 일어나고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 간에 삼위일체의 순환이 일어나고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을 들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기 언행으로 나타내고, 삶으로 드러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누군가에게 자신의 언행으로 말하고 삶으로 표출할 때, 그것은 그 말씀을 그리스도께 돌려드리는 일이 되지요. 그렇게 했을 때 그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또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결국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와 무엇을 말하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이 되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언행으로 누군가에게 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언행을 통하여 당신이 하신 말씀을 들으십니다(벧전4.11).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당신의 말씀을 들으실 때, 하나님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대화로 말미암아 기쁨에 겨우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어나는 교류와 교통이고, 그 대화와 소통으로 이루어지는 평화이고 통일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이 대화와 소통, 교류와 교통이 먼저 나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고, 나 우리의 생활 현장 가운데서 일어나면, 그것이 빛이 되어 우리의 분단 현실인 주변 곳곳을 비출 것입니다. 또 누룩이 되어 분단의 현장인 갈등하고 분쟁하는 사회적 사태들에 속속들이 퍼져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작은 대화와 소통들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의 손이 닿고 하나님의 숨결이 미치는 모든 곳에서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응원봉 같은 무리를 통하여 큰 빛을 발하시고, 가루 서 말 속에 섞인 누룩 같은 당신의 민초들을 통하여 겨레의 분단을 해소하고 평화와 통일을 일으키는 당신의 큰 역사를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이 평양에서 만나고, 공동선언을 발표하였을 때, 그때 제가 받은 충격과 감동을 적은 시 한 편을 남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읊어 잠시 그때의 감격을 함께 되돌아보면서 말씀을 마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새날

역사가 몸을 일으켜 움직이는 

거룩한 광경을 보았다. 

역사가 한 번 틀고 움직이는 

꿈속 같은 일이 

눈 앞에 벌어지는 것을 

눈이 시리게 보았다. 

눈부시게 드러난 

역사의 장엄한 얼굴. 

아하! 이렇게 하시는구나. 

 

온통 혼이 떨리는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실시간으로 들여다보는 

개벽의 드라마 앞에서 

조무래기 같은 감정들, 

알량한 분별과 사려들, 

잗다란 욕망들이 안개처럼 걷히고, 

불티처럼 날아가고, 

큰 용광로 속에 

녹아버리는 것을 보았다. 

 

한 많은 땅이 족쇄를 푸는 

희한한 일을 보았고,  

꿈 같은 신기한 일을 보았으니 

이제 여한도 없다. 

남은 일도 스스로 하실 것이니 

아무 문제 없어. 

이 은총의 경험을 갖고 

이제부터 산다는 것이 명백하다. 

더는 헛된 것들을 위해 살지 말아야지. 

이후로는 구질구질하게 

헛눈 돌리지 말아야지. 

이제 주저할 것 없이 

확신을 가지고 

대담하게 살 수 있겠다. 

 

하루만 살면 돼. 

새날을 더럽히지 말아야지. 

더럽힐 바에는 차라리 버려 

영생을 사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할 것 없고, 

다만 님의 삶을 잠깐 살다, 

세상에 비굴하지 말고 

가볍게 가는 것뿐. 

원 없이 잠깐, 

오늘 하루 원 없이 사랑할 뿐이다. 

내일 깨어나면 다시 하루 

영원을 사는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실지, 

가봐야 알 것이다. 

내일 눈 떠 봐야 알 것이다. 

매일 죽고 다시 사는 것, 

하루씩, 오늘을 종말처럼 살 것. 

영원에 섬을 말씀하는 것이다. 

오늘 살고 저녁에 가면 족해. 

아쉬울 것 없지만, 

원하신다면 오늘 하루 

고스란히 살아 드려야지. 

이 몸 통하여 이 땅에서 

오늘 하루 오롯이 사시기를. 

하루 일하시기를. 

그 일만이 나의 일, 

그밖에 무엇을 바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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