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말씀과 함께

[설교문] “우리는 믿습니다” 서재경 목사 (2026. 6. 21. 성령강림 후 넷째 주일, 민족화해주일)

작성자김윤식(한민교회)|작성시간26.06.21|조회수39 목록 댓글 0

우리는 믿습니다

─ 창세기 15장 1-6절, 사도행전 15장 6-11절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창세기 15장 6절)

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그들도 꼭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우리는 믿습니다.(사도행전 15장 11절)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비난하는 말을 내뱉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용서하소서.” 지난달 27일, 예루살렘 국회에서 열렸다는 조찬기도회에서, 어느 한국 목사라는 여자가 하나님께 드렸다는 기도입니다. 한국이 저지른 악한 일을 용서해 달라고 울먹거리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곧 한국의 하나님이라고 소리치기도 했지요. 유럽 어느 나라 목사라는 자는,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주시고,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려 달라면서, 자기 나라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참 어이없고 황당하지요. 휴전 기간에도 폭격을 멈추지 않는 이스라엘의 네타냐후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난데없이 기독교 목사라는 자들이 예루살렘에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찬양하는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스라엘은 무조건 옳다, 무슨 짓을 해도 선하다는 것입니다. 이건 믿음이 아니지요. 정말 邪惡하고 無知莫知한 盲信이요 獨善입니다. 그런데 이 막무가내식 독선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지만, 그들이 그렇게 흠모하는 이스라엘은 기독교 국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번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인들은 교회를 파괴하고 예수상을 때려 부수며 조롱하고 모독하지 않았습니까? 복음서를 보면, 이미 2천 년 전에 유대인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희롱하고 침을 뱉고 저주하며 모욕했지요. 지금도 저들에게 예수는 메시아/그리스도가 아니라 이단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무슨 순교자라도 되는 양 예루살렘에 몰려가서 이스라엘을 칭송하는 저 목사라는 자들의 믿음은 도대체 무슨 믿음일까요? 차라리 저들에게 ‘믿음’이 없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정말 맹신을 경계해야 합니다. 盲信으로는 결코 眞實에 닿을 수 없고, 眞理에 이를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맹신은 사이비 교주나 사악한 권력자에게 좀비처럼 조종당하기 쉽습니다. 사실 기독교는 아주 뼈아픈 前過가 있습니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 동조하고 협력한 크나큰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아무리 변명해도, 최소한 방관자의 혐의를 벗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독일의 교회가 히틀러에 동조했을까요?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배척했고, 예수를 체포해서 고문했고, 빌라도를 압박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복음서, 특히 요한복음이 그 부정할 수 없는 증거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나쁘다, 그렇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을 배척하고 체포하고 고문하고 학살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인을 혐오하고 배척했던 극우 기독교가 이번에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칭송하는 것입니다. 정말 대책 없는 맹신과 독선 아닙니까?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2천여 년 전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였던 ‘예루살렘 회의’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예루살렘 회의는 교회가 함께 모여 토론하고 결의했던 ‘첫 공의회’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첫 번째 회의니까,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합니다. 회의로 모인 시기는 언제였을까요? 그 일시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40~50년 어간으로 추정됩니다. 이 회의에는 누가 모였을까요? 사도들과 장로들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람들이고, 장로들은 교회의 원로 어른들이지요.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루살렘 회의에서 무슨 논의를 했을까요? 회의의 주요 주제는 ‘이방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당시에는, 교회의 초기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주로 유대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이니까 당연히 유대교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지요. 남자들은 할례를 받았고, 율법을 의무로 지켰습니다. 모이는 장소도 자연스럽게 성전이나 유대 사람들의 회당에서 모였지요. 그런데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면서, 바빌론 포로 시기부터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 중에, 다시 귀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들은 유대인 2~3세대였지요. 그런데 이들 중에는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태어난 지 여드레면 할례를 받았는데, 이방 땅에 떠돌면서 할례를 받는 게 쉽지 않았지요. 그들 중에는 부모 중 한쪽만 유대인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들을 다시 공동체에 받아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리새파가 주도했던 유대교는 그들에게 할례를 필수로 요구했습니다. 물론 율법 준수도 요구했지요.

그렇다면 교회는 어땠을까요? 초기 교회 구성원은 대부분 유대 사람들이었으니까, 또 유대교 안에 있었으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할례가 필요했습니다. 실례로, 바울이 아들처럼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는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이고 어머니가 유대인이었습니다. 모계 유대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데리고 다니기 위해서, 먼저 할례를 행했습니다. 바울 자신은 할례를 주장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점점 이방인들이 늘어나면서, 할례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란이 되었습니다. 특히 바리새파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강경했습니다. 그들은 이방 사람도 할례를 반드시 받아야 하고, 율법의 규례도 다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문제로 갈등이 불거지자, 교회는 회의를 열어서 함께 의논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첫 공의회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 회의’입니다.

 

회의의 분위기는 어땠을까요? 아쉽게도 예루살렘 회의의 회의록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슨 얘기가 어떻게 오갔는지 상세하게 알 수는 없지요. 사도행전은 한마디로 ‘많은 논쟁’을 했다고 기록합니다. 많은 논쟁을 했다니까, 상상해 보면, 서로 자기 의견을 개진하며 진지하게 토론했을 것입니다. 당시는 유대 사람들이 주류였으니까, 그리고 더구나 예루살렘에서 열린 회의니까, 할례와 율법 준수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목소리도 컸겠지요. 갈라디아서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할례를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많은 토론이 오간 후에 마지막으로, 드디어 의장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가 일어나서, ‘예루살렘 회의’의 모든 토론을 매듭짓는 최후발언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논쟁을 어떻게 마무리했을까요? 베드로가 말한 論旨를 살펴보면, 먼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택하셔서 이방 사람들도 복음을 듣고 믿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진지하게 자기 경험을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크지요.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납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 그러니까 이방인이었습니다. 이 고넬료를 만나기 전에 베드로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기도하다가 배고파서 잠들었는데, 하늘에서 온갖 짐승과 새가 담긴 보자기가 내려왔지요. 그리고 그걸 먹으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았고 먹을 수 없다(율법 준수)고 했지만,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이 들려왔지요. 그렇게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부정한 이방인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이 환상을 통해서 이방 사람도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고넬료를 만나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이방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믿게 된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또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할례받은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들에게도 성령이 내렸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내리는 것을 본 베드로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령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할례받은 사람들에게만 내리는 게 아니라 이방 사람들에게도 내렸으니, 이건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하는 사건 아닙니까? 

이렇게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방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리는 것을 본 베드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할례도 받지 않고 율법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복음과 성령을 주셨는데, 그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율법 준수의 멍에를 메운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셨는데, 하나님이 차별하지 않으셨는데, 하나님이 할례 없이도 이방인에게 복음과 성령을 내려주셨는데, 그런 데도 할례와 율법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짓이다, 그 말입니다. 이렇게 이방인에게 할례와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역설한 다음에, 베드로는 마지막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도행전 15장 11절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그들도 꼭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베드로의 마지막 말을 듣고 온 회중은 조용해졌습니다. 이렇게 모든 토론을 종결되었고, 예루살렘 회의를 마무리 짓는 베드로의 말은 교회의 신앙고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그들도 꼭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교회의 물러설 수 없는 확고한 신앙고백입니다. 

 

정말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向方을 교회가 함께 모여 토론하고 결정했다는 것도 중요하고, 또 그 결정한 내용도 너무나 소중합니다. 유대 사람이나 이방 사람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이 신앙고백은,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바울의 편지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9장 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되, 유대 사람 가운데서 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 가운데서도 부르셨습니다.” 10장 1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님이 되어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는 이렇게 말하지요.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유대인과 이방인뿐 아니라 종과 자유인, 그리고 남자와 여자도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도 그렇지만, 종과 자유인의 문제는 로마 시대의 근간을 뒤흔드는 폭발적인 선언입니다. 로마제국의 맨 밑바닥에 있는 종(δουλο󰐠, 노예)들이 우리와 자유인은 동등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를 차별하지 말라고 일어선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골로새서 3장 11절에 가면, 이렇게 말합니다.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받은 자와 할례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골로새서는 여기서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 ‘스구디아인’은 성서에서 여기서만 한 번 언급됩니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을 보면, 이 스구디아인은 전쟁 용사로 유명했습니다. 적군의 피를 마시고 두피를 벗기는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는 공포의 대상이었지요. 야만인 중의 야만인, 짐승 같은 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스구디아인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 차별과 배제의 시대에,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유대인도 이방인도, 종도 자유인도, 남자도 여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이 놀라운 신앙고백은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그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하셨고,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19절에서 바울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신의 몸으로 허무신 분,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신 분을 말합니다. 바로 우리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차별과 혐오의 벽을 허무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교회는 그 첫 공의회인 예루살렘 회의에서, 유대 사람이나 이방 사람이나 예수 안에서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소중한 신앙고백을 거듭 확인하고 다시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은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다, 참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신앙고백’은 성서에서 이미 아주 오래된 고백입니다. 성서는 처음부터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선민이라고 맹신하는 근거가 있다면, 하나님이 자신들을 선택하셨다는 ‘선민사상’이겠지요. 그런데 바울이 지적했던 대로,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택하신 까닭은 결코 혈통이나 의로운 업적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창세기 15장 6절) 하나님은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람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구약성서는 유대 사람들이 자부하는 그 선민사상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신랄하게 드러내 줍니다. 이스라엘이 배척하고 혐오하는 민족 중 에돔과 모압이 있지요. 그런데 그 에돔은 누구입니까? 바로 야곱의 형입니다. 에돔에 대한 저주는 곧 자기 형제에 대한 저주다, 그 말입니다. 모압은 또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게서 나온 족속이지요. 무엇보다 성서는 처음부터 모든 사람이 다 아담의 후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아담은 하나님이 지으셨지요. 결국,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그 칼은, 그 마지막 칼끝은 결국 하나님을 겨누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지독한 대립과 갈등, 혐오와 적대, 독선과 폭력 아닐까요? 이번 잠실 투표소 강점 시위에서도 입에 담지 못할 끔찍한 욕설을 퍼부으며 적대와 혐오를 부추기는 사람들이 나타났지요. 자기들과 좀 다르다 싶으면 다 ‘빨갱이’라고 저주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 정말 이상한 게 하나 있습니다. 이 사람들, 왜 何必 성조기를 들고 둘러 입고 나대는 걸까요? 이들이 믿는 게, 맹신하는 게, 미국, 미국의 극우 기독교라는 말 아닐까요? 실제로 오래전부터 뉴라이트 기독교 인사들이 공교육을 거부하고 ‘대안학교’를 만들어서, 어릴 때부터 맹신과 독선을 가르쳐 왔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들이 지금 이런 방식으로라도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정말 교회가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깊이 성찰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가장 나쁜 것은 밖에 있는 似而非가 아니라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盲信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차별하고 배제하고, 혐오와 폭력을 부추기는 것은 결코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맹신이요 독선일 뿐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76년 전 이 땅에서 벌어졌던 참혹한 전쟁을 기억하며, 우리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기도하는 ‘민족화해주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 사람도 이방 사람도 없다는 우리의 신앙은, 남과 북이 다시 화해하고 평화의 길을 찾아가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분단의 장벽을 자기 몸으로 허무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셔서, 둘을 하나로 만드신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무엇보다 분단의 땅 한반도에 함께 하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