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좋은글모음★

최경창과 홍랑의 사랑이야기,

작성자백장 / 서재복|작성시간24.12.05|조회수134 목록 댓글 2

[최경창과 홍랑의 사랑이야기]



조선시대 사랑이야기로는 황진이와 서경덕, 정철과 평양 기생 강아, 이황과 두향, 유희경과 매창의 이야기가 있는데 "최경창과 홍랑"의 지고지순하고 뜨거운 순애보도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홍랑(洪娘)이라는 여인(女人)]


함경도 홍원 출신의 예기(藝妓)이자 재색을 겸비한 여류시인이었으나 그 생몰년도는 미상이고 함경도 홍원현 출신이라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기생으로서는 유일하게 명문 사대부집안(해주최씨)의 문중 산에 무덤과 비석은 물론 족보에도 올라있으며 최씨 문중에서는 지금까지도 해마다 시제와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뛰어난 미모와 글재주를 지닌 홍랑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살았는데 어머니가 병환에 눕자 약을 구하러 꼬박 사흘을 걸어 80리 떨어진 곳의 명의를 찾아 나선 효녀였다.


열두살 소녀의 효성에 감탄한 의원은 자신의 나귀에 홍랑을 태우고 함께 그의 집에 도착했으나 홍랑의 어머니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홍랑은 슬픔과 절망 속에 상을 치르고 석 달간을 어머니 무덤에서 시묘를 한다. 홍랑의 지극한 효심을 전해들은 의원은 감격하여 홍랑을 자신의 수양딸로 삼고 시문과 가무는 물론 예의범절을 가르쳐 곱게 키웠다.


의원은 홍랑의 혼사를 주선하며 혼담도 오갔으나 늘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한 한과 그리움을 떨칠 수가 없었던 홍랑은 그동안 자신을 돌봐준 의원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잡초에 묻힌 어머니의 무덤에서 대성통곡을 하며 다시 시묘살이에 들어갔다. 의원에게 받은 금전도 다 떨어지고 몸도 마음도 지쳐갔고 도움 받을 가족도 없었다.


자신의 여건 상 좋은 배필을 만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홍랑은 고심 끝에 생계의 방편으로 기적에 이름을 올리고 경성관아 관기가 되었다.


홍랑은 경성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해졌다. 홍랑의 미모, 홍랑의 시문, 홍랑의 예의범절.....홍랑은 경성 최고의 예기가 되었다.


입적 후에나 안돌아가는 머리로 억지로 배운 다른 기생들과는 달리 홍랑은 스스로 익히며 몸에 밴 것들이어서 온몸에 저절로 녹아들어간 시문과 예능으로 뭇남자들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한다하는 한량들과 대가집 자제들은 돈 꾸러미를 싸들고 홍랑을 찾았다 한다.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이라는 남자(男子)]


최경창(1539-1583 선조)은 전남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 태생이며, 자는 가운, 호는 고죽이다.


고죽은 1568년(선조1) 우리 나이로 서른 나이에야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치다가, 그 5년 후인 35세 되던 해인 1573년(선조6)에 함경도의 북평사로 경성도호부에 부임하면서 홍랑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북평사란 조선 때 국경지방이었던 함경도에만 있었던 북병영에 딸린 정육품 문관으로 북병사를 보좌하는 참모벼슬이었다. 즉 병사가 사령관이면 평사는 부사령관 정도 되는 벼슬이었다.


조선 시대 3당 시인 중 하나였던 고죽 최경창이 1573년(선조 6년) 북도평사로 발령받아 임지로 갔을 때, 함경도 홍원현 현감이 이를 축하하기 위해 연회를 열었고, 이 때 홍원현 관기(官妓) 홍랑과의 첫 만남이 이뤄진다.



기생들이 돌아가며 한 수씩 읊어서 취흥을 돋우어도 최평사는 그저 잠잠... 한 심술궂은 벼슬아치가 홍랑의 어깨를 잡아끌어 당겼다. 홍랑은 조심스럽게 그 손을 뿌리치더니 한 수 하겠다고 했다.


다들 홍랑에게 시선이 모아졌다. 최평사는 그윽히 눈을 감고 듣고 있었다.


含情還不語 함정환불어

如夢復如痴 여몽복여치

綠綺江南曲 녹기강남곡

無人問所思 무인문소사


"하소연할 길 바이 없어 말 못하는 이 마음/ 이것이 진정 꿈일까 아니면 어리석음일까/대답없는 <江南曲>을 비파에 실어 보나/내 심정 묻는 이는 한 사람도 없구려"


처음으로 최평사의 가늘고 기인 숨소리가 들렸다. ‘명문이로!.’ 그가 조선 최고의 문장이 아닌가?


이런 지방 구석에선 그의 찬사, 한마디만 듣는다 해도 다시 없는 영광이었고 대단한 기회였다. 그의 입에서 떨어진 한 마디에 누구나 ‘과연 경성의 홍랑이로구나!.’ 감탄해 마지않았다.



홍랑은 자리를 옮겨 최평사의 옆으로 갔다. ‘네 속을 다 알겠다.’ 긴 말이 필요 없었다. ‘자네 얘기야 익히 소문을 들어 다 아는 바이지만 이리도 능할 줄은 몰랐네.’ 오늘날 말에도 있지 않은가?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단다.


홍랑은 기생의 출신으로 비록 신분은 비천했으나 문학적인 교양과 미모를 겸비했는데 남자들의 유혹이 많았는데도 아무에게도 자신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최경창을 만나면서 세세생생에 변하지 않을 뜨거운 사랑으로 내뿜어지게 된다. 고죽 최경창은 음률을 잘 알고 문장에도 뛰어나


이이(李栗谷), 정철, 송익필 등과 함께 삼청동에서 어울려 몇 날 낮과 밤을 지새우며 시문으로 문답하였다 하니 그의 재주는 하늘이 내린 듯하다고 하였다.


변방에 위치한 경성은 옛부터 국방의 요지로 취급되는 대단히 중요한 군사 지역이었으므로 가족을 동반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경창은 이미 처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부임하여 오지 중의 오지인 경성에 머물러야 했다.


당시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던 고죽 최경창과 경성의 최고 기생이었던 홍랑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홀로 생활을 하던 최경창에게 홍랑은 운명적 사랑에 불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농밀한 사랑은 날이 갈수록 더욱 뜨거워져 한 몸처럼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결국 홍랑은 최경창과 동행하여 군사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막중에서 함께 기거하며 부부처럼 정을 쌓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 봄, 두 사람의 사랑에 이별이라는 엄청난 시련이 찾아온다. 임기가 끝난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노비와 비슷한 신분이었던 기생은 관아에 속해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법으로 강력히 구속당하고 있어서 해당 지역의 관청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뜻밖의 이별 앞에 선 홍랑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것 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최경창의 상경은 홍랑에게 있어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으니 이별을 눈앞에 둔 그녀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홍랑은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 있기 위하여 서울로 가는 최경창을 배웅하며 경성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쌍성까지 태산준령을 넘고 넘어서 며칠 길을 마다 않고 따라갔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두 사람의 발길은 이윽고 함관령 고개에 이르렀고, 더 이상 경계를 넘을 수 없었던 홍랑은 사무치는 사모의 정을 뒤로 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 때 그녀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길옆에 피어있는 산버들이었다. 울음을 삼키면서 버들가지에 다가간 홍랑은 그 가지를 꺾어 고죽에게 주며 구슬프게 시조 한 수를 읊었으니,


<묏버들 가려 꺾어>


“묏버들 가려 꺾어 님에게 보냅니다.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날 본 듯이 여기소서”


최경창이 떠난 뒤 홍랑은 그리움으로 눈물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함관령에서 홍랑과 애끓는 이별을 뒤로 하고 떠나온 최경창 역시 서울에 돌아온 뒤 곧바로 병으로 자리에 누워 그해 봄부터 겨울까지 일 년 내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최경창이 아파서 누워있다는 소식은 바람에 바람을 타고 멀고 먼 경성의 홍랑에게도 들렸으니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곧바로 경성을 출발하여 서울을 향해 길을 나섰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7일 만에 서울에 이르렀고, 곧 바로 병석에 누워 신음하는 최경창을 찾아 갔다.



거의 2년만에 최경창을 다시 만난 홍랑은 그의 수척함에 마음이 아팠지만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조석으로 병수발을 들었다. 그 결과 최경창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차츰 회복되어 갔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두 사람의 재회는 뜻밖의 파란을 몰고 왔다. 홍랑과 최경창이 함께 산다는 소문은 최경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로 까지 비화되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1576년(선조 9년) 봄에는 사헌부에서 양계(兩界)의 금(禁)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의 파직을 상소하기에 이른다.


결국 최경창은 당쟁의 세력다툼이 치열한 당시 사회의 표적이 되어 파직 당했고, 홍랑은 나라의 법을 원망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경성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양계의 금’이라고 하는 것은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의 서울 도성 출입을 제한하는 제도를 말하는데, 함경남도의 홍원 출신인 홍랑이 서울에 들어와 있는 것을 문제로 삼은 것이었다.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때는 마침 명종 왕비인 인순왕후가 돌아간 지 1년이 채 안 된 국상중이라 홍랑의 일은 결국 최경창을 파직까지 몰고 가는 불씨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두 연인의 애틋한 재회는 파직과 이별로 막을 내렸지만 최경창은 자신을 향한 홍랑의 지극한 사랑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되었는데, 안타깝고 가여운 자신의 마음을 ‘송별’이란 시에 담아 떠나는 홍랑에게 주었다고 한다.



<송별>


“말없이 마주보며 고운 난초 건네노라 이제 하늘 끝 떠나가면 언제 돌아올 꺼나 함관령에 올라서 옛 노래 부르지 마시오 지금까지도 구름비에 청산이 어둡나니”


옛날, 함관령에서 이별할 때 버드나무 가 지를 꺾어 보내며 이 가지를 자신처럼 여겨 달라 했던 그녀의 시에 최경창은 난초 한 포기를 건네는 것으로 화답하며 자신의 애끓는 심정과 쓸쓸한 홍랑의 마음을 위로했던 것이다.


홍랑과의 두 번째 만남과 이별 후에 곧바로 파직을 당한 최경창은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 1583년(선조 9년)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멀리 함경도 땅에서 사랑하는 임과 다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홍랑에게 날아든 최경창의 사망소식은 그녀로 하여금 몸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을 안겨주었다.



최경창이 죽어 파주에 묻히자 홍랑은 3년 넘게 시묘 살이를 하다가 임진란이 일어나서 더 하지 못했으며 홍랑은 최경창의 시를 모아 두었다가 최씨 가문에 넘겨 주어 ‘죽곡시집’이 탄생했다고 한다.


홍랑이 묘 앞에서 자결하자 최씨 문중은 홍랑을 최경창 묘근처에 묻어주고 최씨 문중에 족보를 올렸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 최고의 명문가라고 할 수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그녀의 무덤과 비석이 있으며, 그 문중에서는 지금까지도 해마다 시제와 제사를 홍랑에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백장 / 서재복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12.05 한파날씨 속에서 목요일날을 잘 보내시고 계시는지요 컴앞에서 음악소리와.
    좋은글을 읽으면서 머물다 갑니다 오늘도 날씨는 싸늘한 영하의 날씨를 보이고 주말까지.
    이어진다고 합니다 몸 관리를 잘 하시고 어수선한 국내정치 보면서 즐겁고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람니다..
  • 작성자백장 / 서재복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12.05
    댓글 이모티콘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