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성(遼東城)의 육왕탑(育王塔)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에 이렇게 실려 있다. 고구려 요동성(遼東城) 곁에 있는 탑은 고로(古老)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러하다. 옛날 고구려 성왕(聖王)이 국경 지방을 순행하던 길에 이 성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오색 구름이 땅을 덮는 것을 보고는 그 구름 속을 찾아가 보았다. 거기엔 중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 그 곁에는 세 겹으로 된 토탑(土塔)이 있는데 위는 솥을 덮은 것 같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이에 다시 가서 중을 찾아보았으나, 다만 거친 풀이 있을 뿐이다. 거기를 길 깊이나 되게 파보았더니 지팡이와 신이 나오고 더 파 보았더니 명(銘)이 나왔는데 명 위에 범서(梵書)가 있었다. 시신(侍臣)이 이 글을 알아보고 불탑(佛塔)이라고 말하였다. 왕이 자세한 것을 묻자 시신은 대답한다. "이것은 한(漢)나라 때 있었던 것으로, 그 이름을 포도왕(蒲圖王; 본래는 휴도왕休屠王이라 했는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금인金人이다)이라 합니다." 성왕은 이로부터 불교를 믿을 마음이 생겨서 이내 칠중(七重)의 목탑(木塔)을 세웠고, 뒤에 불법(佛法)이 비로소 전해 오자 그 시말(始末)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지금 다시 그 탑의 높이를 줄이다가 본탑(本塔)이 썩어서 무너졌다. 아육왕(阿育王)이 통일했다는 염부재주(閻浮提州)에는 곳곳에 탑을 세웠으니 이는 괴상할 것이 없다.
또한 당(唐)나라 용삭(龍朔) 연간(661-662)에 요동에 전쟁이 벌어져서 행군(行軍) 설인귀(薛仁貴)는 수양제(隋煬帝)가 토벌한 요동의 옛 땅에 이르렀다가 여기에서 산에 있는 불상(佛像)을 보았는데 모두 텅 비어 있고 몹시 쓸쓸하여 사람의 왕래가 끊어져 있었다. 고로(古老)에게 물었더니 "이 불상은 선대(先代)에 나타난 것입니다."한다. 이에 이 불상을 그대로 그려 가지고 서울로 왔다(이 사실은 모두 약함若函에 실려 있다).
서한(西漢)과 삼국(三國)의 지리지(地理地)를 상고해 보면 요동성은 압록강밖에 있으며, 한(漢)나라 유주(幽州)에 소속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의 고구려 성왕이란 어느 임금인지 알 수가 없다. 혹 동명성제(東明聖帝)라고 하나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동명제는 전한(前漢)의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前 37)에 즉위해서 성제(成帝) 홍가(鴻嘉) 임인(任寅; 前 19)에 승하했으니, 그때라면 한나라에서도 역시 패엽(貝葉)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해외(海外)의 배신(陪臣)으로서 범서(梵書)를 알아본단 말인가. 그러나 불(佛)을 포도왕(蒲圖王)이라고 했으니 서한(西漢) 때에도 필시 서역문자(西域文字)를 아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범서라고 했을 것이다.
고전(古傳)을 상고해 보건대, 아육왕(阿育王)이 귀신의 무리에게 명하여 인구 9억 명이 사는 곳마다 탑 하나씩을 세웠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염부계(閻浮界;인도)에 8만 4,000개를 세워서 큰 돌 속에 감추어 두었다고 한다. 지금 여러 곳에서 그 상서로운 징조가 한두 번 나타난 것이 아니니 대개 진신(眞身)의 사리(舍利)란 그 감응(感應)되는 것을 헤아리기가 어려운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아육왕(阿育王)의 보탑(寶塔)은 속세 곳곳에 세워져,
비에 젖고 구름에 묻히고 이끼마저 아롱졌네.
생각건데 그때의 길손들의 보는 눈은,
몇 사람이나 제신(祭神)의 무덤을 가리켰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