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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한자]]수양(修養)/수련(-練)/수행(-行)

작성자우천|작성시간04.05.04|조회수661 목록 댓글 0

 

 

[생활한자]수양(修養)/수련(修練)/수행(修行)

1. ‘지금은 수행시대’

독자들에 따라서는 이른바 수련과 수행이란 것들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가 서양문화에 길들여지는데서 오는 문화적 저항감, 아마 비과학적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과학에 앞서고 근대학문에 앞선 서양에서 동양적 수련 수행이 각광을 받고 가히 붐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우리보다 더 진지하게 이 문제에 대해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기술개발과 근대학문에서는 앞섰지만 그러나 인간개발, 자기개발에서는 대안이 없다는 것, 그런데서 동양적 수련과 수행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떤 면에서는 그들은 서구문명의 한계와 약점을 더 잘 알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첨단과학시대에 동양적 수련과 수행이 일정 정도 지구적 시민권을 획득하고 있는 배경을 그런 측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근대문명사를 보건대 인간은 자연개발, 기술개발, 또 경제개발 등 그 모든 개발은 다 해보았다.
그렇게 해서 도달한 것이 혼돈과 위기의 시대, 해체의 시절이다.
인간사회에 희망을 찾는다면 인간에서 찾는 이외 다른 어떤 것에서 찾을 수 없다.
결국 인간의 문제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스스로 갖고 있는 자기 생명력, 자기능력 이것을 이제는 한번 더 고민해 보고 거기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자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서 미래적 인간사회의 구체적 가능성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지금은 수행시대’를 말하게 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최근의 우리 사회를 보면 정말 분분하다.
어지러울 정도로 분분하다. 정파적 이익과 분파적 주장들만이 난무하고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인간적 응집력과 사회적 통합력이 상실되면서, 마치 수명이 다한 콘크리트가 응집력을 상실하면서 내려앉는 것 같은, 먼지를 날리면서 미세입자로 해체되는 것과도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해체의 시절, 인간의 문제를 비켜가서는 더 이상 희망은 없다. 새로운 사회, 참다운 역사는 없다. 새로움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문제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
간명하게 말하면 이제 마지막 남은 개발가능의 영역은 인간개발이다.
그런 면에서는 인간개발은 21세기의 화두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개인사적 차원에서도 그렇다. 사회적 전망도 자기전망도 불투명하다.
언제나 짙은 불안감이 깔려있다. 생활자체가 날로 황폐해져 가는 느낌을 떨치지 못한다.
일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전방위적으로 무력감과 피로감이 더해 온다.
그래서 무언가의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하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느끼고 있다.
당면하고 있고 부대끼고 있는 생활의 문제, 건강의 문제 현장의 문제를 타개할 수 있는 그리고 정신적 육체적 장애를 돌파할 수 있는 그런 탈출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다들 느끼고 있다.
이러한 개인사적 차원에서도 우리는 자기개발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지금은 수행시대’를 말하는 이유일 것이다.

뮬론 우리가 자주 접하게 되는 수련과 수행이라는 것들의 부작용들이 만만치 않다.
이를테면 이것들이 신비주의로 빠지면서 삶과 생활현장으로부터 일탈하는 양상으로 비쳐지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상업주의에 매몰되면서 자기 본래적 의미를 상실하는 폐단도 연출하고
있다. 분명히
이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수련이나 수행론에는 또 워낙 다양한 유파 분파들이 많아서 여하히 이것들의 합리적 핵심을 살려내고 인간개발 내지는 자기개발론으로 체계화할 수 있는가 라는 간단치 않은 문제가
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오늘은 일단 수양, 수련, 수행에 대한 기초적 개념정리를 하는 정도에서 이야기를 마칠까 한다.

 

2. 수양, 수련, 수행의 차별성



우리가 수양, 수련, 수행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이 용어들은 그 차별성이 무시된 채 서로 혼용되고 있다.

때문에 이에 대해서 간단하게나마 좀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수양은 일상생활에서 지켜 가야할 온당한 법도, 규범에 충실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생활을 가지런하게 하라’ ‘방자하게 방탕하게 하지말라’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라’는 것 등이다.

그래서 조신(操身)해라, 조심(操心)해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반경 내의 것들이 수양이라고 할 수 있다.

조식(操息)까지 포함하기도 하는데 말하자면 수양은 일상 생활의 기초소양에 해당하는

바의 것이다.

여기에 특별한 훈련이나 단련을 요하지 않는다. 그 점이 수련과 다른 바다.

수양은 크게 둘로 나누면 섭생과 양생인데, 그러니까 전자는 음식이나 보약 같은 것을 잘

먹어서 자기의 본원적 생명력을 기르는 것이고 후자는 몸과 마음가짐을 잘 가져서 자기관리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양생 중에서도 단전호흡을 한다거나 명상을 한다거나 훈련을 요하는 반경의 것들은

수련에 포함된다.

수련은 절차탁마, 반복적 단련을 통해서 자기화하는 과정을 요한다.

이 점에서 수련은 수양과 다르다.

수련과 수행은 엄격하게 구분된다.

수련은 그 목적이 개별적이고 특수적이고 구체적이다.

저마다의 취사선택에 따라서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건강이 목적이 될 수도 있고 기공이 목적이 될 수도 있고 정신적인 평온이 목적이 될 수도

있다. 또 힘을 기르고 무술이나 스포츠 형태의 수련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수련의 목적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또한 그 목적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수련의 목적은 어떤 것일 수도 있다.

자기가 필요한 부분만을 특별히 갈고 닦을 수 있는 것이 수련이다.

그러나 수행은 이와 다르다. 수련은 개별화될 수 있는 것에 반해서 수행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이다.

수행은 삶이란 문제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나 보편적이다.

삶의 모습 전반에서 인간이 마땅히 따르고 쫓아야 할 행동, 인간으로서 해도 좋은 행동,

그것을 날로 더 보태어 가는 것 이것이 수행이다.

수행(修行)이란 문자가 의미하는 바도 그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수행이라고 하면 ‘도닦는 것’이라 해서 이를 신비화시키거나

일상생활과 뭔가 유리되거나 일탈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수행의

목적은 삶이다.

삶을 떠난 삶에서 연소될 수 없는 수행은 수행이 아니다.

수행은 나라는 실체, 자기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의문을 향한다.

도대체 나라는 것이 무엇인가? 사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사느냐?

삶의 가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러면 그러한 것 속에서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이러한 의문들은 나라는 실체가 무엇인가라는 이 한마디로 축약이 된다.

이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명확하게 각지(覺知)하기 위해서 수행을 하게 된다.

물론 그러한 의문도 의문에 대한 깨침도 삶을 떠나 있지 않다.

삶의 주인성을 획득하고 삶의 궤적을 확보해 가는 과정일 뿐이다.

수행은 깨침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또 수련과 수행의 관계라는 것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도 볼 수 있다.

수행은 삶이라는 총체적인 문제, 근본문제를 끌어안고 있다면 수련은 부분적인 문제해결을 목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련에서는 삶이라는 문제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수련이 제대로 된 기능과 역할을 하고 올바른 자리 매김을 하기 위해서는 전체와

연관성이 바르게 정립이 되어 있어야 한다.

즉 수련은 궁극적으로 수행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다듬을 필요가 있다.

수련을 제대로 하면 - 재대로 라는 단서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 자기세계가 열리고 수행으로 넘어가는 것이 순리다.

삶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전이해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좀 더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존재 개채적인 문제에서 존재세계성의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는 그런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련은 수행의 연습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배영순(영남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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