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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周夢蝶(장주몽접), 그리고 나비는?
동의어:胡蝶之夢(호접지몽).莊周之夢(장주지몽)
“장주몽접(莊周夢蝶)”이라고 있지요. 이를 풀면, 장주가 꿈꾼 나비, 즉 “장자의 나비 꿈”이라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장자몽접”이지 왜 “장주몽접”인가? 그건, 장자(莊子)에 붙는 “자(子)”는 공자, 맹자처럼 “높은 가르침을 주시는 선생”이라는 존경의 칭호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고, 장자의 본래 이름이 “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여기서 장자인가 장주인가가 문제는 아니고, 그 꿈 이야기가 대체 무엇이기에 우리에게 그토록 오랫동안 전해져 오는 것인지 그 까닭이 궁금합니다. 그 이야기의 대강은 세상에 이미 잘 알려지긴 했으나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잠이 든 장자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날개를 펄럭이면서 꽃 사이를 즐겁게 날아 다녔던 것이다. 나비는 자신이 장자인지를 까맣게 잊었든지, 또는 모르는 채였다. 그러다 불현듯 꿈에서 깨어나 보니 자신은 나비가 아니라 장자로 돌아와 있다. 하여 장자는 생각에 잠겼다. 아까 꿈에 나비가 되었을 때에는 나는 내가 장자인지 몰랐다. 그런데 지금 꿈에서 깨어보니 나는 분명 장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정말 장자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깨어나 장자가 된 것인가? 지금의 나는 과연 진정한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나로 변한 것인가?”
이 이야기는 흔히들 거론하듯이 인간이 자신의 진정한 자아, 또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보다 깊게 던지게 만든 장자의 화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꿈속의 나비가 자신이 장자인 것을 모르는데, 그렇다면 꿈을 깬 장자가 자신이 혹 나비인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이를테면 “꿈과 각성상태의 경계선을 의식하면서 진실을 응시할 수 있는 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또한 더 확대 해석해보자면, 일체의 만물이 너 나의 구별 없이 다 하나가 아닌가, 라는 생각에 이르는 매우 동양적인 명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장자는 자신의 장례식과 관련하여 제자들에게 그저 자신의 몸을 들판에 두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묻게 되든지 결국 하늘을 나는 새의 몸, 아니면 땅에 있는 벌레의 몸이 되거나 할 텐데 그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내 몸이 온 세상을 향해 열려 있고, 온 세상이 또한 내 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니 그런 존재의 마음의 크기는 그야말로 우주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이와 같은 제법 고풍스러운 논의와는 달리, 장자 개인에게로 집중해보면 이 꿈의 정체는 세속의 이런 저런 굴레에 묶이지 않고 자유스럽게 삼라만상을 즐기며 날개를 펄럭이고 훨훨 날아다니는 삶을 꿈꾸어 온 열망의 표현이기도 하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마음은 하늘을 날아다니지만, 언뜻 정신을 차려보면 현실의 여러 제약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부정할 수 없어 그로 인해 고뇌하는 장자가 떠오르는 듯 합니다. 그래서 어느 것이 진정 자신의 정체일까 하고 묻게 되는 것이겠지요.
인간이란 사실 내가 누구인가를 아예 물을 이유도 없이 꽃 사이를 유쾌하게 날아다니는 나비로 살고 싶지만, 정신을 차리고 깨어 마주하게 되는 현실은 꿈과는 사뭇 다른 것임을 부인하기 어렵게 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인간은 나비로서 살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장자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늠하고 부단히 결정해가야 하는 운명에 처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장자가 나비 꿈을 꾸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비 꿈을 꾸지 않는 장자”는 장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여 나비와 장자의 관계는,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장자가 되었는가?”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라기보다는, 장자가 어느 날엔가는 과연 나비가 될 수 있을까?로 이어지는 질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라크 저항 단체의 한국인 인질 납치, 교육인적자원부총리 인사 패착, 어느 골목길에선가 실종된 개혁, 경제논리로 무장한 신자유주의 교육철학으로 말미암은 대학의 인문학적 위기, “참여정부”의 사라지고 있는 “참여”, 무너지는 민생경제, 어물쩍 부패한 언론 그리고 참담한 사회적 양극화. 오늘의 장자가 목격하고 있는 우리 현실의 이름입니다. 그 어디에도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가 될 애벌레의 유체(幼體)가 보이지 않는 듯 합니다.
“꿈꾸기를 멈추어버린 정부”가 있다면, 그러고도 계속 자신이 이 시대의 고민을 성찰하는 장자라고 여긴다면, 그건 이런 동요를 습관처럼 부르는 아이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 오너라 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오너라.” 장주몽접(莊周夢蝶)이야 옛날에 망각?것 같고, 정작 나비가 오고 싶을 만한 꽃밭일랑은 제대로 가꾸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김민웅/프레시안 기획위원
[고사성어]胡蝶之夢(호접지몽)
[字解] 胡 : 오랑캐 호
[意義] 나비가 된 꿈이라는 뜻으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 또는 인생의 무상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줄여서 호접몽(胡蝶夢)이라고도 한다
[同意語] 莊周之夢(장주지몽).
[解義]
장자는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성은 장(莊), 이름은 주(周)이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불안한 시대를 살았던 그는 인간의 참 자유가 무엇인지를 사유하게 되었고, 그 자유를 추구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그 결과 물(物)의 시비(是非)·선악(善惡)·미추(美醜)·빈부(貧富)·화복(禍福) 등을 구분짓는 일이 어리석은 일임을 깨닫고, 만물은 결국 하나의 세계로 귀결된다[物我一體]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제창하였다. 호접지몽이라는 고사에 이러한 생각이 비유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장주와 나비는 분명 별개의 것이건만 그 구별이 애매함은 무엇 때문일까? 이것은 사물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도대체 그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는 것인가?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피상적인 구별, 차이는 있어도 절대적인 변화는 없다. 장주가 곧 나비이고, 나비가 곧 장주라는 경지, 이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세계이다. 물아의 구별이 없는 만물일체의 절대경지에서 보면 장주도 나비도, 꿈도 현실도 구별이 없다. 다만 보이는 것은 만물의 변화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이처럼 피아(皮我)의 구별을 잊는 것, 또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비유해 호접지몽이라 한다. 오늘날에는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해서 쓰이기도 한다.
[English] - A butterfly's dream.[호접지몽(蝴蝶之夢)] -Vanity of vanities; all is vanity.(성경 전도서1:2)(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Life is but an empty dream.(인생은 공허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 -All is vanity in life.(인생에서는 모든 것이 덧없다) -The pomps and vanity of this wicked world.[속세(俗世)의 허식(虛飾)과 허영(虛榮)] -A sense of futility.[공허감(空虛感)] -The frailty of life.(인생의 덧없음) -Ephemeral life.(덧없는 인생)
출처:NAVER백과사전.풀어쓴 중국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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