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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詭辯(궤변)

작성자于天|작성시간06.11.12|조회수232 목록 댓글 0

 

 

[고사성어]詭辯(궤변)

 


[字解]

 : 속일 궤.

 : 판별할 변.
     

[意義]

이치에 맞지 않는 사실을 그럴듯하게 둘러대는 말.

궤변은 얼른 들으면 옳은 것 같지만 실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억지로 둘러대어 합리화시키려는 허위적인 변론을 일컫는 말이다.

상대방을 속여 참을 거짓으로, 거짓을 참으로 잘못 생각하게 하거나, 또는 거짓인줄 알면서도 상대방이 쉽게 반론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사상적 혼란과 감정이나 자부심 등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궤변은 처음부터 어떤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목적을 위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出典]

사기(史記) 굴원열전(屈原列傳)

 

[解義]

궤변의 원어인 Sophistik 란 낱말은 그리스의 궤변학파에서 나온 말이며 궤변학파는 본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으로 오늘날의 궤변을 뜻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것이 후세에 이르러 목적을 위해 논리적인 규범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둘러대는 궤변으로 타락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사기 굴원열전에 이 말이 나온다.

 

굴원(屈原)은 이름을 평(平)이라 하며 초(楚)의 왕족과 동성이다.

초의 회왕(懷王)의 좌도(左徒)가 되었다.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좋아서 치란(治亂)의 도리에 밝고 문장이 능하였다.

궁중에 들어가서는 임금과 국사를 의논하여 명령을 내리고, 밖에 나와서는 손님을 접대하고 제후를 응대하여 왕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다.

 

屈原者,名平,楚之同姓也. 爲楚懷王左徒. 博聞彊志,明於治亂,於辭令. 入則與王圖議國事, 以出號令; 出則接遇賓客,應對諸侯. 王甚任之. 

 

굴원이 물러난 후에 진(秦)은 제(齊)를 치려고 하였다.

제나라가 초나라와 합종을 맺었으므로 진의 혜왕(惠王)은 이를 근심하여 장의(張儀)에게 명하여 거짓으로 진을 떠나, 예물을 후하게 가지고 초나라에 가도록 하면서 “秦은 매우 齊를 미워하고 있는데, 齊는 楚와 합종을 맺었으므로, 만약에 楚에서 齊와 국교를 끓을 수만 있다면 秦은 상어(商於)의 땅 6백리를 바치겠다.” 고 말하게 했다.

 

屈平旣,其後秦欲伐齊,齊與楚從親,惠王患之,乃令張儀詳去秦,厚幣委質事楚, 曰:秦甚憎齊, 齊與楚從親,楚誠能絶齊,秦願獻商、於之地六百里.

 

초의 회왕은 욕심내어 장의 말을 믿고 齊와 절교하여 토지를 받으려고 秦에 사자를 보내었다. 그러자 장의는 속임수를 써서 “장의는 초왕에게 6리의 땅을 약속하였는데, 6백리라고는 말한 기억이 없다.”고 말하였다. 초의 사자가 노하여 초나라에 돌아와 초회왕에게 보고하니 왕이 노하여 秦을 치기위해 대군을 일으켰다.

 

楚懷王貪而信張儀,遂絶齊,使使如秦受地. 張儀詐之曰: 儀與王約六里,不聞六百里. 楚使怒去, 歸告懷王. 懷王怒,大興師伐秦.

 

그러나 결과는 초(楚)의 대패로 끝났다.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장수가 포로가 되고 한중의 땅까지 빼았꼈다.

거기에 위나라까지 나서서 땅을 차지하고 제나라는 구원하지도 않았 초나라는 크게 고통을 당했다.

 

秦發兵擊之, 大破楚師於丹、淅,斬首八萬,虜楚將屈匈,遂取楚之漢中地. 懷王乃悉發國中兵以 深入擊秦,戰於藍田. 魏聞之,襲楚至鄧. 楚兵懼, 自秦歸. 而齊竟怒不救楚,楚大困.

 

이듬해에 제나라를 의식한 혜왕이 초와 화의(和議)를 위해 빼앗은 한중(漢中)땅을 되돌려 주겠다고 하자 초왕은 말했다.
“토지를 얻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원하는 것은 장의를 얻어서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이다.”
장의는 이 말을 듣고 “일개의 신하의 몸이 한중의 땅과 바꿀 수 있다면, 신을 초나라로 보내 주십시오.”하고 말했다.

자진하여 楚로 간 장의는 楚의 권신인 근상에게 정중히 예물을 바치고 또 궤변을 써서 초회왕의 애첩 정수(鄭袖)에게 자기를 돌봐 줄 것을 청하였다.

초회왕은 마침내 정수의 말을 받아들여 장의를 용서하여 보냈다.

 

明年,秦割漢中地與楚以和, 楚王曰: 不願得地,願得張儀而甘心焉.  張儀聞,乃曰: 以一儀而當 漢中地,臣請往如楚. 如楚,又因厚幣用事者臣尙,而設詭辯於懷王之寵姬鄭袖. 懷王竟聽鄭袖, 復釋去張儀. *=아낄 근.

 

이 때 굴원은 이미 임금의 곁에서 멀어져 옛 벼슬자리에 있지 않았고, 사자로서 齊에 가 있었는데 나라에 돌아와 최회왕에게 간하기를 “어째서 장의를 죽이지 않았습니까?”하고 책하였다. 회왕은 후회하여 장의를 뒤쫓게 하였으나 이미 늦었다.

 

是時屈平旣疏,不復在位,使於齊,顧反,諫懷王曰: 何不殺張儀? 懷王悔,追張儀不及.

*장의(張儀)라면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뛰어난 변설가(辯說家)이다.

일찍이 소진(蘇秦)이 주창한 합종책(合縱策)을 깨고 연횡책(連橫策)을 성공시킴으로서 후에 진(秦)이 천하를 통일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이다.

 

[參考]

[부산일보]세상이 어지러우면 詭辯이 기승을 부리게 된다.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誹謗(비방)과 暴言(폭언)이 일상화되면서,사람들의 판단력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 詭辯을 호도하거나 감싸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할 줄을 모른다.
정치적 집단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이런 점에서 춘추전국시대의 대표적인 法家(법가) 사상가인 韓非子(한비자)가 '五蠹 (오두)' 편에서 말한 것을 귀담아 들을 만하다.
(두)는 책이나 나무 등을 파먹는 좀벌레를 가리키는 글자이므로,五蠹란 '나라를 좀먹는 다섯 종류의 벌레같은 인간들'이란 뜻이다.

 

韓非子가 말한 五蠹란 學者(학자) 論客(논객) 俠士(협사) 側近(측근) 商工人(상공인) 등이다. 韓非子의 말은 이들 모두가 좀벌레 같은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이들이 잘못해서 나라를 그르치게 하는 사례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韓非子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學者는 先王(선왕)의 道理(도리)라는 말로 仁義(인의)를 빙자하여 겉모습을 화려하게 꾸미고 교묘한 말솜씨로 법을 미혹하게 하며,군주의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論客은 거짓말과 간사한 칭송의 말로 타국의 힘을 빌려 자신의 私利(사리)를 채우면서 社稷(사직)의 이익은 내버리며,俠客(협객)이라는 자들은 무리를 모아 자신들의 절개와 지조를 지키며 이름을 드러내나 나라에서 금하는 법령을 어긴다.

側近은 군주의 곁에 있으면서 자신의 집에 私財(사재)를 쌓아가며 온갖 뇌물을 다 받는다. 이들은 권세가들의 청탁은 들어주고 전쟁터에서 말에게 땀을 흘리게 하면서도 수고한 사람들의 공적은 물리쳐 버린다.

商工人들은 형편없는 물건을 만들며 좋지 않은 물건들은 사모아 두었다가 때를 기다려 농부들의 이익을 가로챈다.

 

韓非子는 마치 오늘날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온갖 非理(비리)의 유형들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하다.

그가 말한 五蠹란 곧 詭辯으로 惑世誣民(혹세무민)하는 지식인과 정치인,매판적 로비스트나 얼치기 論客,시대착오적인 이념과 명분에 함몰되어 마구 날뛰는 얼빠진 무리들,權府(권부)의 家臣(가신)들과 친·인척,야비한 기업주나 악덕 상인 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춘추전국시대처럼 불안정하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詭辯을 늘어놓는 자는 예나 제나 결국은 자신이 쳐놓은 말의 그물에 걸려 넘어지는 법이다.

 

詭의 危가 '위태롭다' '불안정하다'는 뜻이니,결국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거짓말이 곧 詭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詭에는 '어그러지다' '헐뜯다'는 뜻도 있다.

 

辯은 본래 '말로 다투는 것'을 가리키며,논리로써 일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 역시 辯이라 한다. 그런 점에서 辯은 辨과 통하기도 한다.

 

그저 하루 빨리 억지와 詭辯이 발붙일 수 없는 바르고 투명한 사회가 되길 기원할 뿐이다.

[English]
*궤변 詭辯 sophistry:sophism: casuistry:deceptive talk.
*궤변적 sophistic:casuistic *궤변을 부리다 quibble:sophisticate.*-술 sophistry.

 

출처: http://blog.naver.com/hjh044 .부산일보 글.김성진·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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