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頑石點頭(완석점두)
[字解]
[意義] 감지(感知) 못하는 돌이라도 감명을 받아 머리를 끄떡인다는 말로 감화(感化)를 깊이 받았을 때 쓰는 말이다.
[出典] 송서(宋書) 이만전(夷蠻傳). 연사고현전(蓮社高賢傳).
[解義] 중국 晉나라때 유명한 스님이 있었는데 그를 도생법사(道生法師)라고 불렀다. 그는 어려서 법태(法汰)스님을 따라 출가하여 불도를 닦아 불경을 암송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그는 벌써 15세의 어린 나이에 불경을 강좌(講座)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후 그는 長安으로 가서 라습(羅什)에게서 수업을 받고 여러종류의 佛書를 내었다. 그는 불경에 대해서 아주 심오한 깨침이 있어 때때로 새로운 경지를 발견, 배워온 구파스님의 이론을 배척하고 남으로 내려가 소주(蘇州) 호구산(虎邱山)으로 들어갔다. 道生法師는 호구산에 入山하니 다만 自己 혼자뿐으로 산위의 돌 바위만을 상대로 해서 불법을 강론(講論)하였다.
그는 늘 자기가 주장하는 바의 정묘(精妙)한 佛法을 講論하고 앞에 있는 돌바위에게 묻기를 "내가 말한 佛法이 合理的이냐?"하고 말하니 모든 돌바위가 듣고서 함께 머리를 끄떡였다. 이 말이 곧 산아래로 퍼지자 열흘쯤 지나 각 지방의 스님들이 구름같이 虎邱山으로 모여 들었다. 그의 佛法은 너무도 설득력(說得力)이 있어 돌바위 마저도 깊이 감화되어 움직였다.
지금도 虎邱山 위에 '생공석(生公石)'이라고 해서 道生法師가 설법하던 곳이 전해지고 있다. 道生法師는 원가(元嘉)11年(AD 434)에 여사(廬山)에서 입적(入寂)하였다. '生公'이란 道生法師의 경칭(敬稱)이다.
*夷(오랑캐 이), 蠻(오랑캐 만), 羅(그물 나,라), 什(세간집 집), 蘇(깨어날 소), 嘉(아름다울 가), 廬(오두막집 여,려), 寂(고요할 적), 敬(공경할 경), 稱(저울대 칭).
출처:월간 한글+한자문화 글.成元慶-建國大學校 名譽敎授.
[한자이야기]頑石點頭(완석점두)
우리는 가끔 열심히 설명하고 열심히 가르쳤는데도 상대방은 이에 감동하지도 않고 심지어 동의를 받아 내는 데에도 실패하는 경험을 맛보곤 한다. 왜 그럴까? ‘頑石點頭(완석점두)’라는 말이 있다.
‘頑’은 ‘무디다, 둔하다, 재주가 없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頑固(완고)하다’라는 말은 ‘무디고 단단하다’라는 말이 되며, 이는 곧 융통성이 전혀 없는 사람의 성격을 가리킨다. ‘固’는 ‘단단하다, 고정되어 있다’라는 뜻이다. ‘石’은 ‘돌’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頑石’은 ‘무디고 무딘 돌’이라는 뜻이 된다.
‘點’은 ‘점’이라는 뜻이지만, 이것이 동사로 사용되어 ‘점을 찍다’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점을 찍는 행위’는 하나하나 확인하는 행위와 유사하므로 ‘點’에는 ‘하나하나 세다’라는 의미도 생겨나게 되었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點呼(점호)’는 ‘하나하나 세어 가며 부르는 행위’이다. ‘呼’는 ‘부르다’라는 뜻이다. ‘點檢(점검)’은 ‘하나하나 세어 가며 검사하는 행위’이다. ‘頭’는 ‘머리’라는 뜻이다. ‘點頭’의 ‘點’은 ‘점을 찍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點頭’는 ‘머리로 점을 찍다’라는 뜻인데, 이는 곧 ‘머리를 끄덕이다’라는 말이 된다. 우리는 ‘머리를 끄덕이다’라고 사유하지만, 한자의 세계에서는 ‘머리로 점을 찍다’라고 사유하는 것이다.
이상의 풀이를 종합하면 頑石點頭(완석점두)는 ‘무디고 무딘 돌도 머리를 끄덕인다’라는 말이 된다. 이는 다음과 같은 불교의 전설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의 진(晋) 나라에 축도생(竺道生)이라는 훌륭한 법사가 있었다. 그가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가 돌을 모아 놓고 열반경(涅槃經)을 강설하였는데, 그 무딘 돌들도 이 말을 알아듣고 모두 고개를 끄덕이더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는 사람이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이를 쉽게 풀어 주면 무딘 돌조차도 그 어려운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나의 말이나 글에 감동을 받음이 없으면 ‘頑石點頭’라는 말을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출처:동아일보 글.허성도 서울대 교수·중문학
頑石點頭 : 무딘 돌도 머리를 끄덕인다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동진(東晋)의 고승 도생법사(道生法師)가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가 돌들을 모아 놓고 ‘열반경(涅槃經)’을 강의하였는데. 강의를 워낙 잘하여 돌들이 감동하여 마침내 머리를 끄덕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대개 무슨 일을 하여 결과가 좋지 못하면. 도구(道具)를 탓하거나 환경(環境)을 탓한다. 농부는 수확이 좋지 못하면 기후가 좋지 않아서 그렇다고 탓하고. 장사하는 사람은 물건이 잘 팔리지 않으면 손님들이 물건을 잘 몰라서 그렇다고 탓하고, 교육자(敎育者)들은 교육의 성과가 없으면, 학생들이 배우려는 정성(精誠)이 없어서 그렇다고 탓한다. 예술가들은 사람들이 심미안(審美眼)이 부족하다고 탓한다. 그러나 성공하는 사람은, 모든 잘못의 근본원인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린다.
요즈음 흔히 하는 말로. “에스키모인들에게 에어컨을 팔고, 사하라 사막에 가서 난로를 팔 수 있는” 그런 자세로 어떤 일에 임한다면, 안 되는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돌을 감동(感動)시킬 정도로 정성을 다해서 설득력(說得力) 있게 강의를 한다면, 어떤 학생이 강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사람을 감동(感動)시키는 데는 말이 중요하다. 번지러한 말이나 웅변조의 말이 잘하는 말이 아니고,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진실된 말이 잘하는 말이다.
말은 자연 그대로 놔두면 점점 저급(低級)한 생활언어(生活言語)로 변해간다. 계속 갈고 다듬어야만 고급(高級)의 문화어(文化語)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말을 갈고 다듬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문학가(文學家), 곧 시인(詩人), 소설가(小說家), 수필가(隨筆家), 평론가(評論家) 등이다. 문학가가 밥을 먹고 생활을 하려고 하면, 일반 백성들이 문학에 관심을 갖고 문학에 관한 서적을 많이 읽어야 한다. 우리 나라에는 문학가로 활동하는 사람이 5만 명 정도 된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순수하게 문학활동을 통해서 생활해 가는 사람은 1백 명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나머지 문학가들은 생활을 위해서 직업을 갖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 보니, 문학에 전념할 수가 없다. 또 문학과 관계 있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대부분 문학과 전혀 관계없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니 기적(奇蹟)이 일어나지 않는 한, 좋은 작품이 나오기는 어렵다. 아무리 국가에서 문예진흥(文藝振興) 기금을 지급하는 등 여러 가지 지원을 하지만, 소용없다.
문학이 발전하려면 백성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영국 북쪽에 있는 아일랜드는 인구 350만에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3명이나 배출하였다. 이 나라 사람들은 문학을 아주 좋아한다. 이 나라는 한 15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못사는 나라에 들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어 지금은 영국보다 더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 그 이유는 정보산업이 발달하여 세계적인 정보산업강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보산업은 그 관건(關鍵)이 창의력(創意力)에 있는데, 아일랜드 사람들은 늘 시를 읽고 외우는 등 문학을 좋아하기 때문에 창의력이 매우 발달해 있다. 이런 창의력이 정보산업시대를 맞이하여 그 진가(眞價)를 발휘하다 보니, 부강한 나라로 발전한 것이다.
문학은 경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지만. 정보화시대에는 경제력을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우리 국민 모두는 무딘 돌이 감동하여 머리를 끄덕일 수 있는 문학적 표현력과 상상력을 갖추도록 노력하자. 그 정도의 표현력과 상상력을 갖춘다면 이 세상에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출처:경남신문 글.허권수(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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