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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安貧樂道(안빈낙도)

작성자于天|작성시간07.02.25|조회수157 목록 댓글 1

 

 

[고사성어]安貧樂道(안빈낙도)

 

 

[字解]

편안할 안
가난할 빈
즐길 낙(락)
길 도

 

[意義]

①구차()하고 궁색()하면서도 그것에 구속()되지 않고 평안()하게 즐기는 마음으로 살아감 ②가난에 구애()받지 않고 도()를 즐김을 이르는 말이다. 

 
[出典]
論語 先進篇(선진편)에 孔子(공자)가 안연(顔淵)의 생활관을 평한 구절이 있다.
주희(朱熹)가 이 구절을 풀이하면서 使用(사용)한 말로 보인다.
 
[解義]
‘安’은 집과 여자의 상형인 ‘女’(녀)를 합한 會意字(회의자)다.
여자는 집에 있으면서 밖으로 露出(노출)되지 않아야 안전하다는 데서 착안하여 ‘편안하다’는 뜻이 생겼다고 한다.

‘貧’은 ‘나누다’라는 의미의 ‘分’(분)과 ‘재물’을 뜻하는 ‘貝’(패)가 합쳐진 글자이다. 재물을 나누고 나니 남은 것이 적다는 데에서 ‘가난하다’는 뜻이 되었다.

‘樂’의 甲骨文(갑골문)은 나무 위에 실이 매어져 있는 모양으로 ‘樂器’(악기)가 본뜻이다. 후대로 오면서 ‘음악’‘즐겁다’‘좋아하다’는 뜻이 파생하였다.

이 글자에는 세 가지 發音(발음)이 있는데,‘즐겁다’의 뜻으로 쓰이면 ‘락’,‘음악’이라 할 때는 ‘악’,‘좋아하다’라는 뜻으로 쓰이면 ‘요’로 읽는다.

‘道'는 원래 ‘길’과 ‘梟首(효수)된 사람의 머리 상형인 ‘首’(머리 수)’를 합하여 國法(국법)의 준엄함을 의미하는 글자였으나 점차 그 뜻이 ‘거리’, 혹은 ‘길’로 굳어졌다.

그밖에 ‘도리’‘말하다’의 뜻으로도 쓰인다.

 

무엇이 幸福(행복)인가.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생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衣食住(의식주)가 足하고 나아가 富貴榮華(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다면 일단은 幸福하다고 여기는 게 俗人(속인)의 幸福觀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하지만 개의치 않고 八字려니 여기면서 기꺼이 順應(순응)하며, 더 나아가 聖人(성인)의 道(도)를 좇아 즐겁게 산다면 확실히 凡人(범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孔子(공자)는 일생 동안 무려 3000명의 弟子(제자)를 두었는데 그 중 뛰어난 弟子가 77명, 다시 가려 뽑은 자가 10여명이었으니 가히 首弟子(수제자)라 할 만하다.

그 중 다시 가장 뛰어난 弟子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顔回(안회)를 꼽아야 할 것이다.

그는 孟子와 함께 亞聖(아성)으로 불린다.물론 孔子가 가장 총애했던 弟子도 그였다.

孔子와 같은 魯(노)나라 사람으로 字(자)가 子淵(자연)이라 일명 顔淵(안연)이라고도 한다. 어찌나 열심히 학문을 익혔는지 나이 29세에 벌써 백발이 되었다고 한다.

 

孔子의 評에 의하면 그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으며 특히 德行(덕행)에 뛰어나 스승인 자신이 때로 배웠다고 할 정도다.

“나는 종일토록 顔回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지만 한 마디 道에 어긋나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물러가서 내 자신을 반성해 보아도 역시 배울 점이 많았다.”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것.

그래서 평생토록 끼니 한 번 제대로 잇지 못했고 지게미조차도 배불리 먹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누구를 탓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현실에 順應하면서 聖人의 道를 추구하기에 열심이었다.

‘참 장하구나 顔回여! 보통사람 같으면 견디기 어려워하거늘 너는 가난을 예사로 여기면서도 여전히 聖人의 道를 즐겨 좇으니 이 얼마나 장한가.’ 孔子의 칭찬이다.

 

그러나 그런 顔回였지만 29세에 백발이 되더니만 31세에 夭折(요절)하고 말았다.

孔子가 하늘을 원망하면서 통곡했다. ‘아! 하늘이 나를 망쳤구나.’

극진히 아꼈던 제자가 갑자기 죽었으니 그의 심정을 이해할만도 하다.

孔子는 평소 그를 아들처럼 생각해 오던 터였다.

孔子가 그를 높이 평가한 까닭은 그의 安貧樂道에 있었다.

그것은 곧 聖賢(성현)의 道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후에 사마천)은 史記의 孔子弟子列傳에서 顔回를 제일 앞에 세웠다.

도를 추구하는 사람은 가난을 부끄러워하거나 욕심 때문에 良心(양심)을 저버리지 않는다.

私利(사리)를 멀리하고 公義(공의)를 추구하며 착한 일에 말보다 행동을 앞세운다.

집안에서는 安貧樂道(안빈낙도)하고 사회에 나아가서는 殺身成仁(살신성인)하는 것이 그들의 모습이다.

 

고려 중기의 함유일(咸有一)은 몹시 가난해 항상 해진 옷을 입었다.

벼슬을 하면서도 곤궁한 생활이 여전하자 신세타령을 늘어놓는 부인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평생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았으며,勤儉(근검)하고 志操(지조)를 지킴으로써 가문의 이름을 지켰소.

자식들도 그저 正直(정직)하고 節約(절약)하며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스스로의 운명을 기다릴 것이니 어찌 빈곤한 것을 걱정하겠소?”

 

광해군 때 곧은 행실로 명망을 얻은 이위경(李偉卿)은 광해군의 인목대비 廢位(폐위)에 반대하다가 生活苦(생활고)를 핑계로 이이첨(李爾瞻)의 무리에 휩쓸렸다.

덕분에 登科(등과)해 벼슬을 얻었으나 사람들은 그를 욕하였다.

仁祖反正(인조반정)후 그는 刑場(형장)으로 내몰리면서 이렇게 絶叫(절규)하였다.

“세상 사람들이여! 굶주림을 참을 줄 알라!”

 

일부 고급 공무원,정치인들의 부정 사건이 보도되었고 보도되고 있다.

衣食(의식)이 족하고 아울러 官職(관직)까지 높은데 더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출처:동아일보 글.鄭錫元(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 중국문화)

출처:서울신문 글.김석제(경기도군포의왕교육청 장학사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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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現代始巨安多尼 | 작성시간 07.02.26 지족이상지족이면 매여족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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