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乞骸骨(걸해골)
[字解]
[意義] 해골을 빈다는 뜻으로, 재상이 나이가 들어 조정에 나오지 못하게 되었을 때 주군에게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주청(奏請)하는 말이다. 심신은 주군에게 바친 것이지만 뼈만은 돌려달라는 즉, 자신의 몸을 해치지 말고 돌아가게 해달라는 뜻이다. 진(秦)나라가 멸망하자 천하를 다투었던 크고 작은 군웅(群雄) 중에서 차츰 초(楚)나라의 패왕(覇王) 항우(項羽)와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항우와 유방이 천하통일을 놓고 건곤일척(乾坤一擲)을 벌일 때 유방이 항우에게 쫓겨 고전(苦戰)하고 있었다. 유방은 지난해(BC 203년) 항우가 반란을 일으킨 팽월(彭越)·전영(田榮)·진여(陳餘) 등을 치기 위해 출병한 사이에 관중(關中)을 합병하고, 의제(義帝) 시해(弑害)에 대한 징벌을 명분으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의 도읍인 팽성(彭城)을 공략하였다가 항우의 반격을 받고 겨우 형양(滎陽)으로 도망쳤다.
그로부터 수개월 후 유방은 군량 수송로가 끊겨 더 이상 지탱하기가 어렵게 되어 항우에게 휴전을 제의하였다. 그러면서 형량을 국경으로 삼기로 하였다. 항우도 오랜 싸움으로 지쳐 있었으므로 이 제의에 응하려고 하였다. 이때 범증(范增)이 유방의 사정이 절박함을 알아차리고 오히려 형양을 포위할 것을 건의하였고 항우도 이에 따르기로 하였다. 유방의 참모 진평(陳平)은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단순하고 성급한 항우의 성격을 이용하여 군신(君臣) 이간책(離間策)을 쓰기로 하고, 황금을 뿌려 많은 첩자를 초나라 진영으로 보내어 '범증이 유방과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문은 항우의 귀에까지 들어가 범증을 의심하게 되고 항우는 유방과 강화하기 위해 은밀히 유방에게 사신을 보냈다.
진평은 대신들과 함께 음식을 푸짐하게 준비하여 항우의 사신들을 정중히 맞이하였다. 진평은 사신에게 "아부(亞父:범증을 지칭함)께서는 안녕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항우의 사신은 불쾌한 말투로 "나는 초패왕의 사신으로 온 사람이오"라고 대답하였다. 진평은 짐짓 놀란 체하며 "나는 아부의 사신인 줄 알았소" 하고는 잘 차린 음식을 형편없는 음식으로 바꿔 차려 오게 하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이렇게 하여 항우는 어리석게도 진평의 책략에 걸려 유일한 모신(謀臣) 범증을 잃고 말았다. 범증은 팽성으로 돌아가던 중에 홧병으로 인하여 등창병이 터져 75세의 나이로 죽었다. 항우는 해하(垓下)에서 유방군에 포위되어 대패하였으며, 겨우 오강(烏江)으로 빠져나갔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기(史記) 평진후전(平津侯傳)이나 한서(漢書) 조충국전(趙忠國傳)등에는 '걸해골'이라 되어 있는데, 사기(史記) 항우본전(項羽本傳)과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등에는 '원사해골(願賜骸骨)'이라고 되어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걸해골'을 줄여서 '걸해(乞骸)' 또는 '걸신(乞身)'이라고 하는 사례가 있다.
유방과 항우의 흥망을 건 싸움은 인간관리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유방이 모신과 용장(勇將)들을 잘 통솔한 반면, 항우는 적(敵)의 간계(奸計)로 단 한 사람의 모신인 범증마저 잃고 말았다. 고려·조선시대의 재신들도 임금에게 벼슬을 사퇴할 것을 청할 때 이 말로 표현했다고 한다.
출처:NAVER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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