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竊符救趙(절부구조)
[字解] 竊 : 훔칠 절
병부를 훔쳐 조나라를 구했다는 말이다. 이 '절부구조'란 말은 보다 큰 목적을 위해서는 사소한 의리 같은 것은 버려도 된다는 뜻으로 쓰인다.
[出典] 사기(史記)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
[解義] 맹상군(孟嘗君)과 함께 전국사군(戰國四君)으로 손꼽히던 신릉군(信陵君)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신릉군이 조나라의 위급 함을 구하기 위해, 임금의 병부를 훔쳐내어 위나라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 군사를 물리친 사건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다. 첫째 신하의 신분으로 임금을 속였으니 그것은 불충부덕한 일이다 하는 주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요, 이웃을 위하는 길이요, 침략자를 응징하는 길이었으니 보다 큰 목적을 위해서는 그런 형식적인 도덕 같은 건 지키지 않아도 된다 하는 이론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내용을 간단히 더듬어 보기로 하자.
신릉군 위무기(魏無忌)는 위소왕(魏昭王)의 작은 아들이었고 안희왕(安釐王)의 배다른 동생 이었다. 소왕이 죽고 안희왕이 즉위하자 그를 신릉군에 봉했다. 신릉군은 덕이 있고 지혜가 있고 또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다. 그는 이문(夷門)을 지키는 후영(候영)이란 늙은 문지기를 스승처럼 위했고, 백정인 주해(朱亥)를 귀한 손님처럼 받아들였다.
안희왕 二十년에 조나라 군사를 장평(長平)에서 크게 깨뜨린 진나라는 다시 조나라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했다. 신릉군의 자형(姉兄)인 조나라 평원군(平原君)은 조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아우였다. 혜문왕과 평원군은 각각 안희왕과 신릉군에게 거듭 사람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안희왕은 진비(晋鄙)에게 십만의 군사를 주어 조나라를 구하게 했다. 그러자 진나라에서 위협해 왔다. 제후들로서 조나라를 구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조나라를 깨뜨린 다음에는 군대를 그곳으로 옮기겠다는 것이었다.
안희왕은 겁이 났다. 곧 사람을 보내 진비를 국경선을 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자 평원군에게서 거듭 신릉군을 책망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신릉군은 그때마다 왕에게 간청을 넣었으나 왕은 진나라가 무서워 허락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신릉군은 백여 대의 수레에 손들을 태우고 진나라 군대와 싸워 죽을 결심을 하게 된다.
가는 도중 이문을 지나며 후영을 만나 가게 된 동기와 죽을 결심을 말했다. 후영은 담담한 표정으로 "수고가 많으시겠습니다. 늙은 몸은 공자를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얼마를 가던 신릉군은 후영의 태도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내가 그를 그토록 성의껏 대했는데 죽으러 가는 마당에 이렇게 보낼 수가 내게 무슨 잘못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는 다시 후영에게로 갔다. 그러자 후영 노인은, "공자께서 다시 올 줄 알았습니다."하고, 무모한 죽음은 어리석은 일밖에 될 것이 없다면서 조용한 곳으로 가 그에게 조나라를 구할 수 있는 꾀를 일러 주었다. 그것이 병부를 훔쳐 조나라를 구하는 일이었다.
안희왕의 총회 여희(如姬)는, 자기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잡으려 했으나 왕의 힘으로도 三년이 되도록 범인을 잡지 못했다. 여희의 청을 받은 신릉군이 범인을 잡아 목을 베어 여희에게 보내 주었다. 여희는 신릉군의 은혜를 목숨으로라도 갚겠다는 약속을 했다.
한편 진비가 가지고 있는 호부(虎符)의 한 쪽은 안희왕의 침실 깊숙이 감춰져 있었다. 그것을 훔쳐 내기만 하면 진비의 군대를 앗아 조나라를 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안희왕의 침실에서 그것을 훔쳐 낼 수 있는 사람은 여희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진비는 예상한 대로 병부를 대조해 보고도 신릉군을 의심하여 순순히 지휘권을 넘겨 주려 하지 않았다. 사태가 원만하게 수습될 수 없는 것을 알아 차린 주해는 소매 속에서 四十근 철퇴를 꺼내 진비의 머리를 쳐 죽였다.
진비의 군대를 손에 넣은 신릉군은 즉시 군중에 영을 내려 부자가 같이 와 있는 아버지, 형제가 같이 와 있는 형, 형제가 없는 외아들은 전부 돌려 보내고 남은 팔만의 군대로 진나라 군대를 쳐서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신릉군은 그 길로 조나라에서 一十년을 지내게 된다. 안희왕이 그를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진나라가 위나라를 침략해 오게 되었다. 안희왕은 다급한 나머지 신릉군을 어서 돌아와 달라고 애원을 했다. 무심했던 왕이 다급한 이제야 그를 필요로 하는 것이 노여웠다. 그러나 결국은 새로 사귄 모공(毛公)과 설공(薛公)의 권유로 위나라로 돌아가 진나라를 크게 이기고 함곡관(函谷關) 까지 쳐들어가 시위를 하고 돌아온다. 그러나 안희왕은 다시 진나라 간첩들의 모략에 넘어가 신릉군을 멀리 하게 되고 신릉군은 망해 가는 조구의 모습이 안타까와 어서 죽기 위한 타락된 여생을 보내게 된다.
이 ‘절부구조’는 정도(正道)가 아니라 패도(覇道), 즉 패자의 도이다. 곧 인의(仁義)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력과 권모를 통한 패업의 추구이다. 전국시대에나 가능했던 이야기이다.
출처:NAVER백과사전. 고사성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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