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사랑] 孝와 忠
왕조시대에는 효도보다 충성을 더 높였을 것으로 보통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선 태종 12년(1412) 8월 전사직장(典祀直長) 박욱(朴彧)이 역모(逆謀)에 참여한 혐의를 받은 부친 박계생(朴桂生)과 관련해 투옥되었는데, 역모의 연좌죄가 아니라 부친이 3개월 투옥된 동안 가보지 않았다는 불효죄였다.
부친의 혐의는 무고로 밝혀졌지만 사간원에서 “불효하고도 충성한 자는 있지 않다”며 탄핵한 것이다.
이 사례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선인(先人)들은 효와 충의 대립이 아니라 ‘후한서(後漢書)’의 “충신은 효자의 집에서 구하라”는 말처럼 일체화를 추구했다.
“진(晋)나라 이밀(李密)의 진정표(陳情表)를 읽고 슬퍼하는 마음이 없으면 효자가 아니며, 촉한(蜀漢)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를 읽고 격렬한 마음이 없으면 충신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효와 충의 일체화가 동양적 가치관의 핵심이었다.
이밀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가 개가(改嫁)한 상황에서 자신을 양육해준 조모(祖母) 봉양을 위해 벼슬을 사양하는 진정표를 올린 인물이다.
효와 충의 일체화를 위해서는 국왕이 먼저 효의 모범을 보여야 했다.
문종과 인종이 부왕을 극진히 간호하다 얻은 병 때문에 요절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가장 슬픈 ‘효왕(孝王)’은 정조였다.
그는 사도세자의 묘소 현륭원에서, “네 감히 어디의 솔잎을 갉아먹느냐”라며 송충이를 씹어 먹었다는 야사(野史)까지 전할 정도였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영조 때문에 죽은 것을 슬퍼했다.
그렇게 죽은 자체가 불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조는 영조가 생전에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금등(金縢)편을 먼저 죽은 부인 정성왕후(貞聖王后)의 휘령전(徽寧殿) 신위(神位) 아래 넣어둔 사실에 주목했다.
금등편은 주공(周公)이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병을 대신 지고 죽겠다고 기도한 내용으로서, 사도세자가 영조의 병을 대신해 죽겠다고 할 정도의 효자였다는 후회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정조는 심지어 사도세자가 칠순이 되는 갑자년(1804)에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사도세자 추숭(追崇) 사업을 하려 했으나 1800년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조의 슬픈 효심이 떠오르는 5월이다.
출처:조선일보 글.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