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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및 묵상

(전도서 8:1-17)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작성자정요한|작성시간25.07.31|조회수54 목록 댓글 0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전도서 8장 1절 – 17절)
 
  8:1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2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3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5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6 무슨 일에든지 때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8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9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11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14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15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16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았는데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17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개역개정)
 
 
  오늘의 성경 본문은, “전도자의 말씀”(1:1) 곧 ‘전도서’의 4편의 설교(1:12-12:7) 중에 세 번째 설교(6:1-8:13)를 마무리하는 내용이자, 네 번째 설교(8:14-12:7)가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세 번째 설교의 전반부(6:1-12)는 인생의 허무를 채울 수 없는 세상에 속한 것들과 그 이유를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억울한 일”(6:1,공동번역)들의 여러 사례로 제시했습니다. 세 번째 설교의 후반부(7:1-8:13)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7:13)며,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틀에 박힌 인간의 한계성에 갇힌 지식과 지혜로만 바라보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따라서 인생이 직면하는 상대적 현상에 대해서,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7:14,새번역)라고 일깨웁니다. 또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완전하지 않고 불완전하기에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 것을,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7:16-17)라고 일깨웠습니다. 우리 인간이 직면하는 한계성이 인생을 허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며,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서의 한계성을 인정할 때 극단을 피하는 분별력의 지혜를 얻게 하며 인생의 허무에서 벗어나게 할 것을,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7:18)고 일깨웁니다. 오늘 본문은, 세 번째 설교를 마무리하는 결론이자 네 번째 설교를 연결하는 가교로서,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8:1)라는 질문을 통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순된 현실에서 인생의 허무가 아니라 자기 역할과 사명을 잘 감당하며, 하나님이 베푸시는 삶의 “희락을 찬양”(8:15)하며 살 것을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1. 사물의 이치를 아는 것이 왜 필요합니까?
 
  “전도자” 곧 솔로몬은 세 번째 설교의 마무리를,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8:1)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이 질문에서 “지혜자”는 다름 아닌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라고 일깨웁니다.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는, 사리(事理)를 통찰하고 분별하여 해석할 줄 아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매순간 발생하는 삶의 문제들을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변화하는 시대 현상과 그 배후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섭리적 의미와 중요성을 통찰하여 이치에 맞게 그에 대비하고 행동할 줄 아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첫째로 “사물의 이치를 아는” 것이 필요한 이유를, “지혜”를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변화로써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8:1) 곧 “지혜는 사람의 얼굴을 밝게 하고, 굳은 표정을 바꾸어 준다.”(새번역)라고 했습니다. 참된 “지혜”를 깨닫는 자가 얻게 될 그 어떤 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영적 정신적 평안으로 인한 밝은 얼굴 표정으로 바뀌는 변화가 주어질 것과, 이는 무지몽매한 고집에 사로잡혔던 이기적이고 거칠었던 성품이 온화한 성품으로 변화했기 때문으로 증언합니다. 이 때문에 자기 고집만을 앞세우기보다 “사물의 이치를 아는” 통찰력과 분별력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이, 세상과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는 “지혜자”로 살아갈 수 있음을 일깨웁니다. 그러면서 솔로몬은 자신이 왕이었기에 왕권을 세우고자 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내가 권하노라.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8:2)고 선언합니다. 이 의미는,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왕의 취임식 때에 “왕의 명령”에 순복할 것을 “맹세하였음”을 상기시킵니다. 왕의 능력과 권세 이전에, 그를 지도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순복임을 일깨웁니다. “왕의 명령”이 아무리 불의하고 악하다 할지라도 복종해야한다는 무조건적인 굴종을 당부하는 선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한 국가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설정해놓으신 각종 법칙의 준수 중의 하나로서, 왕의 권위에 대한 인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둘째로 “사물의 이치를 아는” 것이 필요한 이유로서, 자기 시각이나 생각과 다른 “왕의 명령”에 어떻게 처세해야하는지를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8:3) 곧 “경솔하게 어전에서 물러나오거나, 임금이 싫어하는 일을 고집하지 않도록 하여라.”(공동번역)고 일깨웁니다. 왕의 정책이나 자신에 대한 처우에 대한 불만을 충동적으로 성급하게 표출하지 말고, 또 자기주장만을 고집하거나 맞서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8:3)며,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8:4) 곧 “왕의 말이 곧 최고의 법인데, 누가 감히 그에게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고 말할 수 있겠는가?”(새번역)라고 경계합니다. “왕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 같으니, 그를 노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니라.”(잠20:2)고 경계시켰던 것처럼, “왕”은 국가의 절대 권력을 가진 위협적 존재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갑작스럽게 “왕의 명령”에 대한 신중한 처세를 말한 것이 상황 판단을 잘 할 것에 대한 인간관계의 하나의 단적인 예라는 것을,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무슨 일에든지 때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8:5-6) 곧 “그러므로 그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은 화를 입지 않는다. 생각이 지혜로우면 어떤 경우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알게 된다. 무슨 일이든 때와 방식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아무리 제대로 하여도 화를 입는 경우가 많다.”(공동번역)라고 일깨웁니다. 결국 “지혜자”는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로서, “왕의 명령” 곧 인간관계에서 헛된 만용을 부리지 않고 “때와 판단” 곧 언제 어떻게 적당한 시기에 가장 알맞은 방법으로 대처해야하는지를 분별하여 행동하는 이들이 “화를 입지 않는다”라고 일깨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인생과 “지혜”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성을, “그러나 아무리 제대로 하여도 화를 입는 경우가 많다.”(8:6,공동번역)라며,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8:7) 곧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아무도 모르고,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알려줄 사람도 없다.”(공동번역)라고 일깨웁니다. “사물의 이치를 아는” 것은, 한계성을 인정할 줄 아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2. 누가 허망한 세상에서도 의를 추구합니까?
 
  솔로몬은 “지혜자”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8:1)라고 하면서도, 또한 역설적으로 “사물의 이치를 아는” 것은 “지혜”의 한계성을 인정할 줄 아는 것(8:5-7)이라고 밝힙니다. 솔로몬은 첫 시작에서 “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1:16)라고 자랑했다며, 자신이 권력과 번영과 지혜만 있으면 대단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1:17-18)며, 자신이 자랑했던 것들의 한계성을 토로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중요한 성공과 축복의 척도라고 자랑하는 “재물과 부요와 존귀”(6:2) 곧 “부귀영화”(공동번역)와 많은 “자녀”와 “사는 날”이 많은 “장수”(6:3) 역시 헛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들이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생의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서, 인생의 허무를 충족시켜줄 수 없는 그 한계성을 인식하고 인정하라는 자각과 각성의 요청입니다. 따라서 셋째로 “사물의 이치를 아는” 것이 필요한 이유로서, 인생이 이 모든 것을 다 가졌다 할지라도 할 수 없는 한계성들을,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8:8) 곧 “바람을 다스려 그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듯이, 자기가 죽을 날을 피하거나 연기시킬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전쟁이 일어나면 벗어날 사람이 없듯이, 악은 행악자를 놓아 주지 않는다.”(새번역)라는 것을 분별하여, “악”을 행하는 자가 되지 말 것을 경계합니다. 우리가 자연의 “바람”도 자기 “죽는 날”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또한 “전쟁”이 일어나면 그 참상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는 한계성을 솔로몬이 밝힌 이유를,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8:8) 곧 “악한 일을 하고 살아날 길도 없다”(공동번역)라는 선언에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는 “악”들을 자행하는 것이 우리 인생을 허무하게 한다는 것을 알 것을,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8:9)라고 밝힙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 중에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곧 “악”이 범람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말씀대로 살고자하는 의지가 없기에, 자신의 뜻대로 행하다보니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동방의 의인 욥이 친구들과의 변론 가운데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28:28)고 증언했던 이유입니다. 솔로몬도 하나님의 “지혜”가 당부하는 선언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잠8:13)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믿는다는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이유를 어떻게 증언합니까? “그런 후에 내가 본즉 악인들은 장사지낸바 되어, 거룩한 곳을 떠나, 그들이 그렇게 행한 성읍 안에서 잊어버린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8:10) 곧 “나는, 악한 사람들이 죽어서 무덤에 묻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장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악한 사람들을 칭찬한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 악한 사람들이 평소에 악한 일을 하던 바로 그 성읍에서, 사람들은 그들을 칭찬한다. 이런 것을 보고 듣노라면 허탈한 마음 가눌 수 없다.”(새번역)라며, 믿는 신앙인들이 저지른 “악”을 덮어버리는 행태로 인한 인생의 허무를 탄식합니다. “거룩한 곳을 떠나”라는 의미는, “악인들”이 “거룩한” 성전을 드나들며 예배를 드리면서도 온갖 악을 저질렀다는 것으로, 그런 사람이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어떠한 보응도 받지 않고 평안히 지내다가 무덤에 묻혔을 뿐만 아니라, 그가 저지른 악행마저 사람들에게서 잊혀진다고 탄식합니다. 부정직하고 부도덕한 사회와 종교의 타락한 현실에 대한 고발입니다. 이러한 타락한 현실 때문에 믿는 자들이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악”을 자행한다는 것을,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8:11)라고 경계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세 번째 설교의 마지막 결론으로서,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8:1)는 이처럼 타락한 현실의 모순된 허망한 세상을 직시하며 인생의 한계성을 인식하기에, 오히려 하나님의 최종적인 주권적 섭리와 그 뜻을 깨닫고 믿음으로 끝까지 순종할 것을,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잘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8:12-13)고 선언합니다.
 
3. 누가 허망한 세상에서 희락을 노래합니까?
 
  이제 “전도자의 말씀”(1:1) 곧 ‘전도서’의 세 번째 설교(6:1-8:13)가 끝나고, 마지막 네 번째 설교(8:14-12:7)가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8:14)라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세상 현실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단순히 인과응보(因果應報)와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도식적(圖式的)인 시각에만 갇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처럼 사물의 본질이나 구체적인 특성을 밝히려는 창조적인 태도 없이 일정한 형식이나 틀에 박힌 기계적인 시각으로만 부정적인 세상 현실을 보지 말 것을,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8:1)라는 질문으로 솔로몬은 도전했습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네 번째 설교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틀에 갇힌 시각에서 벗어날 것을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8:14)는 문제의 돌출 선언으로부터 시작하며,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8:14) 곧 “나 어찌 헛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새번역)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이미 이 문제를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7:15)라고 제기했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우리로 인생의 허무를 느끼게 하고 허망한 세상을 탄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 우리로 이러한 현실을 겪게 하는지를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온실 속에 살게 하신 것이 아니라, 광야 같은 세상에서 왜 이러한 온갖 모순의 풍파를 겪게 하는 지를 깨닫고, 건강한 믿음의 “지혜”로 행동하는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가 되기 원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흔히들 세상의 현실적 한계성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찾고자 하기보다 인간 중심적인 입장만을 생각하다보니, 우리 인간은 모순과 불합리가 지배하는 것이 세상인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로 허무한 인생과 허망한 세상으로 절규하게 합니다. 지금까지 솔로몬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효용성이 부딪히는 한계성을 증언하던 상황에서,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8:15) 곧 “나는 생을 즐기라고 권하고 싶다. 사람에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일하면서, 하나님께 허락받은 한평생을 사는 동안에, 언제나 기쁨이 사람과 함께 있을 것이다.”(새번역)라며, 허망한 세상 탓만 하지 말고 “희락을 찬양”하는 삶이 될 것을 권고합니다. 인생의 한계성으로 인한 절망감에만 갇혀 원망하고 불평하는 삶이 아니라, 그 한계성 안에서 우리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솔로몬은 “희락을 찬양”하는 것 곧 “즐겁게 사는 것이 좋은 것”(공동번역)이라며,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잔잔한 일상의 삶의 모습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일깨웁니다. “희락을 찬양”하라는 것이, 향락과 쾌락을 추구하며 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허락받은 한평생”을 사는 동안, 그 시간의 생애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매일의 일상 속에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야말로, “언제나 기쁨이 사람과 함께 있을 것” 곧 인생의 “수고” 가운데 누리게 하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앞에서 인생을 허무하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예증하면서도, 이러한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게 하는 일상에서의 소소한 “기쁨”을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2:24), 또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3:13)고 했고,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5:18)라고 반복했던, 그 의미를 깨닫는 이들의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솔로몬은 허망하게 느끼는 세상의 현실에서도 누가 “희락(喜樂)을 찬양”하며 살 것인가를 일깨웁니다.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는, 현실만을 보지 않고 그 상황을 주관하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볼 줄 압니다. 이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희락(喜樂)을 찬양”하며, 오늘의 삶을 “기쁨”과 감사로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믿음의 사람을,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0)라고 증언합니다. 하박국 선지자 역시 생명과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전쟁의 와중에도,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라며, “희락(喜樂)을 찬양”했던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나 대부분의 인생들이 거창한 대의명분(大義名分)만을 앞세우며 그것만을 인생의 성공과 축복의 척도로 여기는 가치관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중요한 축복의 “몫” 곧 “분복”(分福,개역)을 소홀히 여겨 놓치고 살면서 인생의 허무를 탄식하며 세상을 허망하게 볼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이러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았는데,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8:16)라고 밝힙니다. 이미 솔로몬이 첫 번째 설교에서도, 열심히 수고하며 애쓰면서도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2:23)라고 밝힌바 있습니다. 왜 이들이 이렇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나는 지혜를 통해, 사람들이 땅 위에서 밤낮 눈도 못 붙이고 수고하는 까닭을 알려고, 무던히 애를 써보았지만”(8:16,공동번역)이라고 솔로몬은 탄식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인식의 한계성을,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8:17)라고 인정하는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8:1)로 살아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본질을 다 알 수 없다는 겸손한 한계성의 인정이 참된 “지혜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솔로몬이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8:1)라고 질문했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인생의 허무를 느끼는 허망한 세상에서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8:1)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떻게 유익한지를, “지혜는 사람의 얼굴을 밝게 하고, 굳은 표정을 바꾸어 준다.”(8:1,새번역)라고 한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물의 이치를 아는” 것이 단지 어떤 상황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이면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깨달아 아는 믿음이 주는 유익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순된 세상 현실의 한계성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때, 주어진 한계성을 극복하고 겸손히 순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 입장에서만 모든 것을 바라보던 원망과 불평 그리고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음으로써, 그러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채우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아 누리는 변화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들은, 자기 탐욕의 야망을 불태우기 위해서 세상적인 성공과 축복의 척도에만 사로잡혀서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8:16) 곧 “밤낮 쉬지도 않고 수고하는 사람”(새번역)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깨닫는 이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매일의 일상 속에 허락하신 가장 기본적인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8:15)이야말로, “하나님께 허락받은 한평생”을 사는 가장 소중한 삶의 시간과 방식임을 깨닫고, 그 “희락을 찬양”하는 “기쁨”과 “수고” 가운데 오늘을 살아가는 복된 이들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6:7-9)고 경고한 것인지를 깨닫고, 인생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로서의 신실한 믿음의 삶의 여정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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