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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및 묵상

(사복음서/마가복음 4:35-5:43) 이적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예수

작성자정요한|작성시간26.06.12|조회수54 목록 댓글 0
이적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예수
(사복음서연대기26 / 마가복음 4장 35절 - 5장 43절)
 
  4: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5: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6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8 예수께서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12 이에13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14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17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22 회당장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23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29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33 여자가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36 예수께서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38 회당장의 집에39 들어가서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개역개정)
 
 
  오늘의 성경 본문은, 제2차 갈릴리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께서 천국에 대한 비유 설교에 이어서 행하신, 4가지 이적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와 능력을 나타내심으로써, 자신이 누구인가를 계시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로써 “천국”의 임재를 나타내 보여주신 계시이자, 바로 자신이 그 나라의 왕으로 오셨음을 선포합니다. 마태복음(8:23-34,9:18-26) 마가복음(4:35-5:43) 누가복음(8:22-56) 곧 공관복음에 공통으로 기록되어 있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고,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고, 혈루증 여인을 치유하시며,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4가지 이적을 연속적으로 소개하는 것은, 단순히 놀라운 기적 이야기를 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지 곧 자연과 영적 세계와 질병과 죽음까지 다스리는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 대한 증언입니다.
 
1. 거친 풍랑에서 예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오늘의 본문은 예수께서 “천국”의 “비유” 말씀(마13장)을 하셨던 사건이 있었던,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4:35)라고 하신 증언으로 시작합니다. 이 본문을, 누가는 “하루는”(눅8:22)이라는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고, 마태 역시도 전혀 다른 사건 뒤에 증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 본문은 마가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주님께서 신적 권위와 능력을 가지신 분임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예수님이 행하신 4가지 이적을 함께 증언한 것으로 봅니다. 그 첫 번째 이적의 배경 사건을,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4:37)고 밝힙니다. 갈릴리 호수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계곡 사이로 부는 차가운 바람이 호수의 따뜻한 기류와 만나면서 생기는 돌풍인 “큰 광풍”이 자주 있는 곳입니다. 이 때문에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마8:24)고, 따라서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눅8:23)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비록 그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들이었지만, 자신들의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위기 상황에 치달았습니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은 피곤하셨는지 “행선할 때에… 잠이 드셨더니”(눅8:23), 아예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4:38)라고 했고,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계속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마8:24)고 했습니다. 너무나 태평하게 자는 모습에,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4:38)라며, 예수께 일말의 희망을 찾는 다급한 모습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눅8:24,마8:25)라는 호소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놀랍게도 이러한 상황에 전혀 당황해하거나 그 어떠한 동요도 없이,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4:39)고 증언합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4:40) 곧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눅8:25)라고 책망합니다. 비록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들의 “믿음”이 아직 온전히 성숙한 것이 아니기에, 예수님은 이러한 상황을 통해서 저들의 “믿음”이 더욱 자라가야 한다는 경각심을 심어준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 앞에 “제자들”은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눅8:25)라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질문이 생겼습니다. “제자들”이 “심히 두려워”한 것은 직면했던 풍랑이 아니라, 예수께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눅8:24)게 변한 사건이었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4:41,눅8:25) 곧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마8:27)라는 질문은 자연 만물조차 순종하는 권위 앞에, “제자들”이 비로소 예수께서 단순히 질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내쫓는 수준을 뛰어넘는 존재라는 인식을 하게 된 것입니다.
 
2. 귀신 들린 자가 예수 앞에 보여준 모습은?
 
  바다의 풍랑을 꾸짖어 잔잔케 하신 이적은, 예수께서 자연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심을 계시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상황을 보며 두려워했지만, 예수님은 그 상황 위에 계셨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베푸신 수많은 말씀과 이적을 지켜봐왔으면서도, 정작 “제자들” 자신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질문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어떤 사람들보다 뛰어난 능력자라는 시각에서, “그가 누구이기에” 곧 “어떠한 사람이기에”라는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적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제 예수께서 행하신 4가지 이적 중에 두 번째 이적 사건의 배경을,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5:1-2)고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4:35)고 하셨던 목적지가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이었음을 밝힙니다. 그런데 마태는 “건너편 가다라 지방”(마8:28)이라고 했습니다. “거라사”나 “가다라”는, 갈릴리 바다 동편부터 남쪽에 이르는 10개 성읍을 가리키는 ‘데카폴리스’ 곧 “데가볼리”(5:20)의 서로 다른 지역입니다. 그런데 “거라사”는 남쪽으로 32km나 떨어져 있어 바로 건너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지만, “가다라”는 “건너편” 동쪽으로 10km 지점에 있다는 점에서 “거라사인의 지방”을 “가다라”의 ‘케르샤’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추정합니다. “데가볼리”는 과거 알렉산더 대왕의 식민지였다가 로마의 식민지가 된 곳으로,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의 예수님의 첫 사역이기도 했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왜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까? 그 사람의 존재와 상황을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5:3-5)고 증언합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은 “귀신”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스스로를 자해하고 있었습니다.
 
  누가는 그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거처하게 된 이유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눅8:29)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그러한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5:6-7)라고 했다고 증언합니다. 이렇게 행동한 이유를 마가나 누가는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5:8,눅8:29)고 하셨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놀라운 것은 “바리새인들”이나 “제자들”조차 예수님이 정확히 누구인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그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이 정확히 누구인지를 알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고백했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 선생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고 말씀한 이유입니다. 이 “귀신들”의 고백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았지만 경배하고자 하는 의도나 믿고 순종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사탄’이라는 이름이 ‘거짓말 하는 자, 이간질 하는 자’라는 뜻처럼, 단순히 위기 순간만을 모면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귀신”은 “하나님을 두고 애원합니다.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새번역), “왜 저를 간섭하십니까?”(공동번역)라고 항변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8:29)라고 했고, 누가복음에서는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눅8:31)라고 함으로써, 예수께서 마지막 심판 때에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계20:10)리라고 했던 그 심판자가 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자신 앞에 나온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 아니 “더러운 귀신”을 향해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5:9)라고 묻자,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5:9)라고 답변했습니다. “이름”은 그 존재의 전인격적 정체성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그 “귀신”의 실체를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그 실체를 알게 하고자 한 것이자, “귀신”을 영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군대”라고 밝힌 이 단어는, 라틴어 ‘레기온’으로 6천명 병력의 군단을 가리키며, “귀신”도 자신들의 숫자가 많다는 의미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그 “군대 귀신”이 예수께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5:11-12)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라”(마8:32)고 “허락”(5:13)하시자, “더러운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5:13)이라고 증언합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돼지의 큰 떼”가 “몰사”하는 사건이 발생됩니다. 왜 그 “귀신”들이 이런 요청을 했는지는 잘 모릅니다. 아마도 엄청난 “돼지”가 죽는 경제적 피해를 통해서, 예수님을 위기에 몰아넣기 위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때문에 “돼지…떼”를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눅8:34)게 되었고,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5:14) 보니, 아무도 통제할 수 없었던 사람이, 스스로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5:15)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결국 “귀신”의 의도처럼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눅8:37)고 했습니다. 저들은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눅8:36)와, 이 일을 행하신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관심보다, 자신들에게 더 큰 경제적 손해가 닥칠 것만을 우려했습니다. 거부하는 저들에 대해서, 주저하지 않고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 새”(눅8:37)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에 오히려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5:18-19)며, 예수께서는 먼저 “가족” 공동체로의 회복과, 그들에게 주님이 행하신 일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가족”뿐만 아니라,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5:20)고 했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이 살던 “거라사”나 “가다라” 지방만이 아니라, 그는 놀랍게도 “데가볼리” 전역을 향한 “복음” 전도자로 살았음을 증언합니다.
 
3. 절망에 두 사람이 보여준 신앙의 모습은?
 
  예수께서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눅8:22)고 하신 것은, “건너편 가다라 지방”의 “거라사”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당하는 고통을 아셨던 것 때문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포기한 그 사람을 찾아가셨고, 그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도 통제할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였지만, 예수님의 한 마디 명령에 “군대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영적 세계의 절대 주권자이심을 보여줍니다. 잃어버린 인격을 회복하신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그 사람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전하는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상황의 전환으로써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눅8:40)고 증언합니다. 그때 예수께서 행하신 세 번째 이적 사건의 배경을,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5:22-23)이라고 증언하며,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5:24)고 증언합니다. 당시에 “회당장”하면 덕망 높은 직책이면서도 “바리새인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예수님의 사역이 ‘회당’ 중심에서 떠난 상황에서, “회당장”이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죽어가는 딸에 대한 강한 사랑과 급박함이 묻어난 것입니다. 과거 이방인 “백부장”은 자신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눅7:2) 되자, “회당장”처럼 예수께 굳이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라고 간청한 것이 아니라,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눅7:7)라고 하는 놀라운 믿음을 보였습니다. “회당장”은 자기 종교 문화와 관습에 갇혀 있었다면, “백부장”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의 중간에 예수께서 행하신 네 번째 이적 사건의 배경이 개입하고 들어온 것을,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5:25-27)라고 증언하며, 그 이유를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5:28)고 밝힙니다. “회당장”이나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마음의 절박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더군다나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왔다면 육체적 정신적 종교적으로 얼마나 고통이 컸겠습니까? 경제적으로도 치료에 모든 재산을 쏟아 붓는, 그러면서도 아무 “효험”도 없고 병만 더 악화되는 상황의 고통과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믿음대로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5:29) 곧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눅8:44)고 증언합니다. 또한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5:30)라며, 수많은 인파들 속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이 상황을 감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5:30)라고 하십니다. 상황을 모르는 “제자들”은 예수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5:31)라며, 너무나 당연한 상황에서 무슨 황당한 말씀을 하느냐고 투정거립니다. 오직 예수님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만이 이 상황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눅8:46)라고 밝힙니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5:33) 곧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눅8:47)였습니다. 그 여자를 책망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첫째로 “혈루증으로 앓아 온” 여인이 더 이상 부정한 여자가 아님을 공표해주기 위함이었고, 둘째로 미신적 행위가 아닌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받았음을 확신시켜주고자 함이었고, 셋째로 여인의 입으로 “모든 사실”을 간증하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딸아”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5:34)라며, 그 여인의 “구원”을 선포합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예수님의 발걸음이 지체되면서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5:35)라며, 모든 상황이 끝났음을 알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5:36)며,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눅8:50)고 격려합니다. 상황에 흔들리지 말고, 죽음에 의해서도 정복되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강한 신뢰를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에 있어서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생각과 입장은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눅8:51)셨습니다. 이미 초상집으로 변해 있는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5:38-39)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래로, 더 이상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 가운데 잠시 잠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4:13-14)고 격려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리는 생명의 주관자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그 자리에서 슬퍼하던 사람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눅8:53)고 했지만, 예수님은 자기 할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5:40-41), 놀랍게도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5:42)라고 증언합니다. “달리다굼”은 “소녀야, 일어나라.”(5:41)는 당시 그들이 쓰던 아람어였습니다. 살아난 “아이”의 “나이가 열두 살이라”(5:42)고 밝히며, 이 상황에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5:42)이라고 증언합니다. 모두가 놀라서 정신이 없었지만, 예수님은 차분하게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5:43)며, 환자의 상황을 먼저 살피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5:43)고 경계했지만,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마9:26)고 증언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인생의 여정은 때로 예고 없이 찾아오는 거센 풍랑 앞에 깊은 절망감에 휩싸여야 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인생의 절박한 문제들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연속해서 등장합니다. “제자들”은 거센 파도로 인한 죽음의 위협 앞에서 떨었고,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은 이로 인한 자해의 고통 속에 신음했으며,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여인과 “회당장…야이로”의 가족은 절망의 끝자락에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으며, 그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이야말로 만물의 주권자이심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은, ‘우리가 지금 누구를 의지하고 있는가?’입니다. 죽음마저도 말씀 한마디에 생명으로 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심으로써, 자신이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계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늘 밀어닥치는 두려움의 파도를 넘어서, “믿음”의 기적을 경험하기 원하십니다. “회당장”의 “어린 딸”이 죽은 상황은, “야이로”에게 주어진 “믿음”의 시험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절망 앞에 서 있을지라도, 참된 “믿음”은 예수님의 인격과 능력을 신뢰하며 나아갑니다. 직면한 위기와 절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위기와 절망 가운데 계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며,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보다 크신 예수님을 아는 데 있습니다. “제자들”이 물었던 질문처럼 “그가 누구이기에”(4:41,눅8:25) 곧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마8:27)라는 고백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붙들고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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